책 읽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무렵 즐겨 사용한 방법이 있었다. 바로 '한 녀석만 공략해!' 전법.
전략은 단순하다. 나만의 펜을 만들어 그 녀석만 밑줄 긋는 용도로 죽어라 쓰면 된다.
1. 책 읽기는 주객전도의 힘으로
낭독 팟캐스트 <당신의 서재> 엔지니어 역할을 맡아 낭독 녹음을 해주다 보니 아나운서 동료들의 독서 스타일이 각양각색이었다. 독서를 하면서 비닐로 된 얇은 포스트잇을 붙여서 마음에 와 닿은 부분을 표시하는 사람, 전혀 표시를 하지 않은 채 처음 그대로의 상태로 깨끗하게 읽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밑 줄 긋고 되새길 부분은 페이지 귀퉁이를 접어놓기도 하면서 책을 읽어 나가는 편이다. 그때 우연히 집어 든 필기도구는 아이가 유치원 단체 견학을 가서 얻어 온 하늘색 색연필이었다.
생긴 건 일반 연필과 다를 바 없는데 색깔이 예뻐 검은 볼펜보다 단조롭지 않고 빨간 펜보다는 눈이 덜 피로한 느낌이 들었다. 밑줄 그을 때 살짝 힘을 주어 누르면 거칠기가 적당하고 뾰족하게 깎아 놓은 부분이 점점 뭉툭해지면서 다시 연필깎이 입구로 밀어 넣을 때 내심 뿌듯해지기도 했다. 연필깎이에 들어가고 나갈 때마다 점점 땅꼬마가 되어가는 모습에 적잖이 쾌감도 느꼈다.
이제는 이 녀석을 기어이 엄지손가락 마디만큼이나 짧게 만들겠다는 묘한 목표가 생겼다.
그래서 책을 읽을 때마다 꼭 먼저 찾게 되었다. 책 읽을 때마다 찾던 하늘색 색연필이 이제는 도리어 연필꽂이 꽂혀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아, 책을 읽어야겠구나'하는 일종의 독서 시작 스위치가 되기도 했다.
독서가 목적인지 아니면 밑줄 긋고 메모하고 책 내용을 그림으로 정리하면서 색연필을 다 써서 없애 버리는 게 목적인지 주객이 전도된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아무튼 나만의 독서용 펜이 생겨 책 읽기에 좋은 도구가 되니 속도도 붙고 집중력도 더해지는 것 같았다.
물론 볼펜이나 흑색 연필, 만년필로 표시하는 걸 선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사용할 때마다 눈에 띄게 줄어드는 색연필이 더 마음에 든다. 가끔 연필꽂이에 두었던 하늘색 색연필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대신 두루마리 종이를 휴지처럼 풀어쓰는 옛날 색연필로 대체하기도 한다. 아이가 쓰다가 남긴 거라 아까운 마음에 재활용하는 측면도 있지만 이 색연필 역시 열심히 쓴 티가 바로바로 난다는 점에서 권장할 만하다.
색연필 심이 굵어서 핵심만 간단히, 큰 글자로 메모할 때만 써야 좋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독서 시작 버튼이 나에게는 내가 콕 찍은 전용 펜이라면 스피치 강사 김 미경 씨는 유튜브 방송 김 미경 tv에서 책 읽으면서 스티커 붙이는 데 재미를 붙였다고 했다. 스티커 곳곳에 붙이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그것 때문에라도 책을 읽고 메모를 한다고. 아예 예쁘고 귀여운 스티커를 자체 제작할 계획이라던데 어쩜 그렇게 소녀 같은 감성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지. 이분도 나처럼 문방구 엄청나게 좋아하시는구나 싶었다.
그러니까 김 미경 씨에게 독서 시작 버튼은 앙증맞은 스티커가 되는 거다. 마음에 드는 글귀를 발견한 후 나만의 펜으로만 죽어라 밑줄을 긋든,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 스티커를 붙이든 중요한 건, 그것들이 독서와 메모를 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이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를 자연스럽게 책 읽기의 길로 안내하고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독서를 지속할 수 있는 아기자기한 잔재미를 선사하면서.
2. Book a Day
비장의 무기도 장착했겠다 내친김에 하루 한 권 읽기 프로젝트를 개인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그런데 이미 나보다 먼저 하루 한 권 읽기를 계속해 이미 천 권을 읽은 독서 선배가 있었다. <1천 권 독서법>의 전 안나 씨. <기적을 만드는 엄마의 책 공부>라는 제목에 이끌려 책장을 펼쳤는데, 읽다 보니 저자가 이미 천권 독서로 책까지 펴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역시 하늘 아래 처음은 없나 보다.
두 아이의 워킹맘으로 직장 생활에 대한 회의, 더 좋은 엄마가 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불만으로 오랫동안 우울증과 식욕부진, 불면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리다가 기적처럼 독서의 기쁨을 알게 되어 매일 책을 읽기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 100권을 읽자 불면증이 사라졌고, 300권을 읽자 미웠던 남편과 시어머니가 이해되고 관계로 좋아졌단다. 500권을 읽자 삶에 대한 의욕이 다시 타올랐고, 800권을 읽자 책이 쓰고 싶어 져 글을 쓰기 시작해서 1000권을 읽고 책까지 출간하게 되었다. 60세까지 만 권이 목표라는데 만 권을 읽으면 자신에게 또 어떠한 변화가 생길지 너무나도 기대가 된다고 책 서문에서 밝혔다.
비록 독서를 진정한 취미로 삼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풋내기지만 나도 비슷한 변화를 실감하고 있다.
나만의 독서 전용 펜을 갖게 된 것 말고도 당신의 서재를 직접 제작, 진행, 편집하면서 더더욱 책 읽기의 재미에 빠져들었다. 일과 취미의 구분이 없어진 것이다. 또 아나운서들의 낭독 녹음을 도맡으면서 동료들과 방송 뒷이야기, 고민, 일상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해당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낙도 생겼다. 작은 변화는 전염성이 커져 아나운서 팀원들의 책상 위에 책들이 자연스럽게 쌓였고 낭독에 참여하는 동료들은 늘어났다. 올해 안에 36명 팀 전원을 낭독자로 모시는 것이 나의 소박한 목표로 자리 잡았다.
3. 성형수술 효과
외모도 변하나 보다.
팀장님은 내 눈빛이 한층 깊어졌다고 했다.
친구의 말이 곧 진리였던 학창 시절, 흰자위가 맑다는 말, 시험기간이라 일주일째 제대로 씻지도 못했는데 전날 목욕 갔다 왔냐는 해맑은 질문에 뿌연 피부와 맑은 눈동자가 나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둔탁해 보이는 뿔테 안경, 보름달같이 터질 것 같은 얼굴에 비로소 자랑거리가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이제 흰자위에는 핏발이 서고, 툭하면 실핏줄이 터지며 눈 밑에는 온갖 착색과 기미가 자리 잡아 세월의 덧없음을 느끼고 있던 차에 눈빛이 그윽해졌다니! '의학기술로도 안 되는 부분을 독서가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구나. 탁해진 눈빛과 피부를 맑게 되돌리진 못해도 분위기 있어 보이게 할 수는 있구나.'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무언가 보상을 후하게 받는 기분이 든다.
4. 책 읽기는 곧 책 쓰기
저자가 생각의 변화를 느낀 시점은 300권 이후부터라고 한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으니 자연스럽게 복합적인 생각을 할 수 있게 되고 사고의 폭과 깊이가 이전과 달라지는 느낌이 들었단다. 독서의 양과 질이 쌓여 임계점을 맞은 것이다. 500권부터는 다른 사람과 걷는 방향이 달라짐을 느꼈다고 말한다. 그 좋은 느낌은 좋은 책을 다른 이에게 권하기도 하고, 같은 주제의 책을 연달아 읽어보거나 독서토론 모임, 자격증 공부, 교육 수강의 실천으로 이어졌다. 800권 정도 필사도 겸하며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첫 책의 글은 6주 만에 완성했다. 1700여 권의 책을 읽은 지금은 7년 전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길을 걷고 있다고 전했다.
나는 성급하게도 100권도 채 읽지 않아 글을 쓰고 싶어 졌다. 읽은 책들을 한번 정리해 보고 싶었다. 성질과 모양이 비슷한 것들끼리 모으고 조금 다른 것은 분류하여 가르던 학창 시절의 노트 정리 기술(?)을 되살려 보고 싶어 진 것이다.
지금까지 읽은 책들을 살펴보았더니 먼저 자기 계발 분야는 책 읽기, 공부법, 글쓰기에 관한 책들이 주를 이루었다. 직장 생활과 대인관계 분야는 직장 내 소통과 발표 및 경청, 퇴직 이후의 삶이 독자들의 주 관심사를 반영하고 있었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은 4차 산업혁명으로 대변되는 미래산업과 미래 인재가 갖추어야 할 창의력, 유튜브에 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재테크 관련 책들은 꾸준했다. 부동산과 경제전망, 최상위 부자들에 관한 책은 흔한 아이템이자 주제였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엄마의 책 공부, 말공부 등은 자녀교육의 필요성이 엄마 공부와 연계된 경우인 듯했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니 아이와 함께 잘 커나가려면 마음공부는 우선이요, 관련 지식 공부는 필수이므로.
행복, 감성, 마음 관련 힐링 책들은 여전히 인기가 많았다. 팍팍한 살이에 나부터 찾고 지켜야 세상에 똑바로 서있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과 몸은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으니 운동, 건강, 수면, 여행, 식이요법에 관한 책들도 다양했다. 역시 결론은 심신의 건강과 온전함인가 보다.
이렇게 크게는 자기 계발, 직장 생활, 미래산업, 재테크와 부동산, 마음공부, 자녀교육, 건강 등으로 읽은 책들이 나뉘었고 세부 갈래까지 정해 놓으니 얼추 목차 비슷하게 꼴을 갖추게 됐다. 이렇게책 읽기는 책 쓰기로 이어진다(이제 목차만 정했지만).
5. 양보다는 질
이 책 끝부분에서 저자는 하루 한 권, 7년을 꾸준히 읽어보니 마음이 치료되고, 스펙이 좋아지고, 생각이 깊어지고, 행동이 달라지고, 직업과 인맥이 다양해졌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이 다르게 평가하기 시작했고, 퍼스널 브랜딩 효과도 있었고 선한 영향력에 대한 책임감도 생겨 실천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나 역시 틈틈이 독서를 하면서 그냥 흘려버리는 시간을 알차게 끌어모아 쓸 수 있게 됐다. 인풋이 많아지니 자연스레 아웃풋이 생겨나 생각의 조각들이 둥둥 떠다니고 전에 없던 아이디어들이 살금살금 튀어나와 메모로 붙들고, 블로그 등 여러 SNS에 정리해서 담게 되었다. 읽은 책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유튜브에 북리뷰를 하기 시작했다. 조회 수에 상관없이 자기만족이었고, 나와의 약속이라는 기분 나쁘지 않은 강제성을 띠었다.
읽은 책들이 지식의 그물망을 가로 세로로 성글게나마 엮어나갔다. 겹치는 내용은 기억을 강화시키고 새로운 내용은 기존 지식의 폭을 넓혔다. 물론 천 권이상 읽은 독서 전문가들에 비하면 그 5분의 1이나 읽었을까 말까 한 나 같은 사람의 변화라는 게 그리 어마어마하거나 대단한 정도는 아니다. 씨줄과 날줄로 엮기 시작한 간접경험의 축적이라는 게 이제 겨우 첫걸음마 단계이니까.
그래도 그게 어디인가? 몇십 권을 읽었는지 몇 백 권을 읽었는지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얼마나'보다는 '무엇을' 읽었는지가 중요하다. 그리고 내 안에서부터 작은 변화를 감지하는 것. 남들이 먼저 느끼고 알아봐 주는 것. 내일은 어떤 책을 읽게 될까, 어떤 생각을 만나게 될까 기대하는 것. 앞으로 어떤 아이디어가 어떻게 다가올까, 그때 나는 무슨 방법으로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금방 사라지는 사고의 조각들을 온전한 내 것으로 만들까 궁리해 보는 것. 끄적여 담아낸 글들을 곱씹고 되씹으며 이리저리 다듬어 보는 것.
연예인 얘기보다,
남 험담보다,
지난날에 대한 의미 없는 자책과 후회보다 훨씬 더 소중하고 값진 일이다.
독서로 인한 삶의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티끌이 모여 태산이 된다고 하니, 변화의 시작은 아직 미미하지만 끝은 창대하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