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명장면은 계획표 바깥에 있었다.
나는 INTJ다.
MBTI 과몰입러는 아니지만, 이 네 글자만큼 나를 설명하기 좋은 핑계도 없다.
내 우주는 철저한 통제 하에 있어야 직성이 풀린다. 마음가짐도, 책상 위 물건의 각도도, 주말 일정과 인생의 변수들까지 엑셀 파일의 셀처럼 딱딱 맞아떨어져야 비로소 숨이 쉬어진다.
무언가 새로 시작하려면? 일단 설계도부터 펼친다. 플랜 A, 플랜 B, 혹시 모를 플랜 C까지 세워놓고, 시뮬레이션을 백 번쯤 돌린 뒤에야 신발 끈을 묶는 식이다.
세상만사가 어디 내 뜻대로, 준비된 대로만 흘러가던가. 머리로는 너무 잘 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불확실함이 나를 더 치밀한 계획으로 몰아넣었다. 무방비 상태로 맞을 변수들을 하나라도 더 예측하고 제거하고 싶은 욕망. 세상이 제멋대로 굴수록 나는 내 우주를 더 완벽히 통제해야 직성이 풀렸다.
그러니 늘 피곤할 수밖에. 사는 게 문자 그대로 ‘사서 고생’이었다.
그런데 내 치밀한 인생 계획표에 아주 치명적인, 하지만 꽤 맛있는 오류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내 인생의 타임라인을 되감아 보았다. 분 단위 계획을 짜서 갔던 3박 4일 해외여행? 글쎄, 남은 건 시간에 쫓겨 뛰어다닌 기억과 계획대로 되지 않아 받았던 스트레스뿐이다.
오히려 뇌리에 강렬하게 박힌 ‘인생의 명장면’들은 죄다 계획표 바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 시작은 맥주 한 캔이 쏘아 올린, 작지만 거대한 일탈이었다.
새벽 1시, 캔 뚜껑을 따는 순간 내 안의 ‘통제 본능’이 잠시 로그아웃된 게 분명했다.
“내일 서울이나 갈까?”
다음 날 아침, 나는 부산역에서 서울행 KTX에 몸을 싣고 있었다. 예매? 당연히 안 했다. 평소라면 상상도 못 할 입석으로.(고백하자면 평소라면 좌석이 없으면 여행 날짜 자체를 미뤘을 것이다.)
덜컹거리는 열차 통로 낚시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가는데, 다리는 저려오지만 가슴은 이상하게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마치 톱니바퀴 밖으로 탈출한 도망자가 된 듯한 그 짜릿한 해방감!
서울에 도착해서도 평소에 나라면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내 발길은 계획된 핫플탐방이 아닌, 그저 마음이 이끄는 대로 원래도 좋아하던 서촌과 북촌 사이를 부유했다. 그러다 우연히 발을 들인 곳이 순라길이었다.
서울 떠난 지가 오래라, 여기가 요즘 뜨는 곳인지 뭔지도 몰랐다. 그저 돌담길이 예뻐서, 길을 새로 놓았길래. 달라진 풍경에 많이 변했구나 하고 들린 그곳에서, 고즈넉한 분위기에 취해 걸었을 뿐인데 나중에 알고 보니 요즘 서울에서 제일 핫한 길이란다. 예전이면 검색하고 미리 일아보고 왔을 이곳을, 이번엔 뒷짐 지고 별일 없이 걷다가 얻어걸린 것이다.
“와, 계획 없이도 이게 되네? “
이제와 솔직히 말하자면 미리 찾아보고 알아낸 계획 없이 보물을 찾은 기분.
꽤 짜릿했다.
걷다 보니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가 찾아왔다. 검색? 귀찮았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눈앞에 보이는 아무 가게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런데 웬걸, 그곳의 인테리어며 흘러나오는 음악, 공기까지 내 취향을 저격했다. 별점 리뷰를 따져가며 찾아간 곳보다 훨씬 더 근사한 피신처였다.
언제고 벼르고 별러 찾아간 유명카페는 웨이팅에 지치고, 커피도 디저트도 엉망이어서 속상했던 경험들이 스쳐 지났다.
이 날의 즐거웠던 서울 나들이에서의 기분 좋은 충격은 삼청동 미술관에서도 이어졌다.
평소의 나였다면 전시 일정, 작가 약력, 관람 동선까지 파악하고 갔을 터였다.
하지만 그날은 그냥 미술관이 거기 있어서 들어갔다. 무슨 전시를 하는지도 모르고 마주한 작품들은, 사전 정보라는 필터가 없어서인지 날 것 그대로, 더 강렬하고 신선하게 내 망막에 꽂혔다.
무방비 상태로 맞이한 예술이 이렇게나 즐거울 줄이야.
정말 신이 났던 말 그대로 하루가 꽉 찬 나들이었다.
이 우연의 미학은 훗날 순천 여행에서 정점을 찍었다. 도착이 늦어져 맛집들이 문을 닫는 바람에, 숙소 근처 아무 식당이나 너털너털 들어가 시킨 육개장 한 그릇. 메뉴 고를 기력도 없어 대충 시킨 그 붉은 국물이, 내 인생 최고의 육개장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알고 보니 거긴 동네 사람들에게는 이미 사랑받는 말 그대로 찐 현지인 맛집이었다. SNS도 블로그 리뷰도 없이 오직 즉흥이 만들어낸 무계획이 찾아낸 보물.
그때 느낀 전율은 계획대로 맛집을 찾아갔을 때의 안도감과는 다른 승리감이었다.
이쯤 되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통제형 인간인 나에게 무계획이 주는 의외의 해방감을.
계획된 일은 100점을 기대하고 시작하니 잘해야 본전이고, 조금만 틀어져도 점수가 깎인다. 하지만 계획하지 않은 일은 0에서 시작한다. 그러니 우연히 마주친 돌담길도, 더위를 식혀준 이름 모를 카페도, 뜬금없는 육개장도 전부 보너스 점수가 된다.
무엇보다 마음이 편하다.
“이건 내 계획에 없던 일이니까.”
“계획이 좀 어그러져도 괜찮아!”
늘 나를 옥죄던 완벽주의에서 벗어나, 스스로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다정한 말이었다.
좀 헤매도 괜찮다. 원래 없던 일정이었으니, 망쳐도 본전이고 좋으면 대박인 셈이다. 완벽주의자인 내가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는 유일한 시간. 그것이 바로 즉흥이었다.
그래서 나는 요즘 가끔, 내 빡빡한 스케줄러에 전략적 빈칸을 남겨둔다.
그 빈칸은 더 이상 내 통제를 벗어난 미지의 영역이거나 변덕스러움이 만든 버려둠이나 귀찮음의 영역이 아니다.
순라길의 돌담과 인생 육개장 같은 일들이 다시 찾아왔으면 하고 비워둔 자리이다.
물론 나는 여전히 계획표 없이는 불안한 INTJ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계획이 삶의 기본값이라면, 즉흥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선물처럼 뜻밖의 행복을 준다는 것을.
마치 매일 달리는 트랙을 벗어나 엉뚱한 골목으로 뛰어들었을 때, 그곳에 진짜 멋진 경치가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준비됐어?“
“아니!! 그래서 더 재밌을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