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회복 선언문

호감은 내가 채워야 할 빈칸이 아니다.

by 안녕 굿데이

회사에 처음 입사했을 때, 나는 하나의 생존 전략을 갖고 있었다.


'모두에게 친절하게 대하자. 웃으며 인사하자. 예의를 지키자. 그러면 적어도 미움받지는 않을 것이다.'


첫 출근날부터 나는 부지런히 웃었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사람마다 인사했고, 엘리베이터 문을 잡아줬고, 누가 뭘 물으면 세상 친절하게 답했다. 꽤 괜찮은 전략 같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게 상냥했다.


그 한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는.


어느 날, 프로젝트 때문에 처음 함께 일하게 된 선배를 만났다. 나는 평소처럼 밝은 미소를 장착하고 준비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돌아온 건 차가운 정적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타자 치는 소리뿐이었다. 타닥, 타닥, 탁.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내 인사를 공중분해 시켰다.

나는 당황해서 다시 한번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제야 그는 귀찮다는 듯 짧게 대꾸했다.


"응."


그게 끝이었다.


나는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처음엔 '원래 무뚝뚝한 사람인가 보다' 하고 넘기려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 선배는 다른 사람들하고는 잘만 웃었다. 탕비실에서 농담도 주고받고, 회의가 끝나면 "고생했어요" 하며 후배 어깨도 두드려줬다.


오직 나한테만 그랬다. 나한테만 달랐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투명 인간 취급을 했고, 업무상 필요한 말도 메신저로만 툭툭 던졌다.


내가 뭘 잘못했나?


입사 첫 주부터 기억을 샅샅이 뒤졌다. 없었다. 우리는 제대로 마주친 적도 없었다.

결론은 하나였다. 그 선배는 나를 싫어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확실했다.


그날부터 이 문제는 내 머릿속을 점령했다. 복도에서 그를 마주치기만 해도 명치가 묵직해졌다. 나는 평소보다 더 열심히 일했고, 더 과하게 친절하게 굴었다.


아이러니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 때문에 나는 점점 더 피곤해지고 있었다.


화가 나다가도, 결국엔 자책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혹시 내가 모르는 실수를 한 건 아닐까?'


이 질문이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금요일 퇴근길.


지옥철에 몸을 실었다. 사람들 틈에 껴서 손잡이를 잡고 창밖의 어둠을 보는데 깊은 한숨이 나왔다. 주말이 지나면 또 그 차가운 공기를 견뎌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바로 그때였다.


앞에 서 있던 사람의 전화벨이 울렸다. 업무 전화인 듯했다. 그 사람의 얼굴은 야근에 절어 잿빛이었다. 눈가엔 피로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고, 입꼬리는 중력에 굴복한 듯 처져 있었다. 영혼이라곤 1그램도 없어 보이는 표정.


그런데 전화를 받는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네, 부장님! 안녕하세요!"


목소리가 180도 달라졌다. 세상에서 가장 밝고 에너지 넘치는 신입사원의 톤. 눈과 입은 여전히 무표정인데, 성대만 따로 떼어내어 연기를 시키는 것 같았다.

"아, 괜찮아요! 전혀 문제없습니다. 네, 네,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나는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얼굴은 죽어있는데 목소리는 살아서 펄떡거렸다. 완벽한 분리였다.


통화가 끝나자마자 그는 "하아..." 하고 깊은숨을 내뱉더니, 다시 무표정한 석고상으로 돌아갔다. 마치 방전된 로봇처럼 스위치가 꺼졌다.


'우와, 사회생활 만렙이다.'


감탄하던 찰나, 문득 서늘한 깨달음이 스쳤다.

저 사람은 지금 연기한 거다. 피곤한데 밝은 척, 힘든데 괜찮은 척. 왜? 상대방이 불편하지 않게. 관계가 어색해지지 않게. 그러니까,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지하철이 덜컹거렸다.

나는 깨달았다. 나도 지금 저러고 있구나. 나도 그 선배 앞에서 필사적으로 연기하고 있구나. 더 밝게, 더 친절하게, 더 완벽하게.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하지 않게. 아니, 정확히는…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한다는 사실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게.


그런데 문득 근본적인 질문이 떠올랐다.


나는 정말 뭘 원하는 거지?

저 선배가 나를 좋아하면 좋겠다는 건가? 친하게 지내고 싶은 건가? 아니면 그냥 잘 보이고 싶은 건가?

지하철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답은 너무나 명확했다.


아니었다.

나는 그 선배에게 잘 보이고 싶지도, 친해지고 싶지도 않았다. 내 인생에 1%의 영향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까지 전전긍긍했을까?


지하철이 다시 어둠 속으로 출발했다.


나는 알았다. 나는 그 사람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괴로웠던 거였다. 누군가 나를 싫어한다는 사실 자체를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애초에.


누군가는 나를 싫어할 수 있다. 이유 없이도. 내가 잘못하지 않아도. 그냥 나와 주파수가 안 맞아서.


그리고 그건, 내 문제가 아니다.


집에 도착했을 때, 발걸음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마음속에 걸려 있던 무거운 돌덩이가 툭, 하고 떨어져 나간 기분이었다.

다음 주 월요일.


회사에서 그 선배를 다시 만났다. 여전히 차가운 눈빛, 짧은 대답. 나는 평소처럼 인사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괜히 내 잘못을 찾지 않았다. 더 잘해야겠다고 다짐하지도 않았다. 그냥 '아, 저 사람은 나를 안 좋아하는구나.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였다.


그 선배가 나를 어떻게 대하든, 내 마음의 평수는 좁아지지 않았다. 그는 이제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사무실 풍경의 일부가 되었다. 책상이나 파티션처럼, 그냥 거기 있는 존재.


내가 달라진 게 아니다. 내 마음을 두는 위치가 달라진 거였다.

며칠 뒤, 동료가 물었다.


"요즘 표정이 좋아졌네. 무슨 좋은 일 있어?"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응, 좋은 일 있어.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그냥 인정했어."


어릴 적 나는 배웠다. 친구들에게 호감 사는 아이가 좋은 아이라고. 그래서 나는 열심히 친절을 연습했다.


하지만 교과서는 알려주지 않았다. 내가 친절해도 무례한 사람이 있다는 걸. 내가 예의를 지켜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그럴 때 나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나는 혼자 부딪히며 배워야 했다. 친절과 예의만으로는 나를 지킬 수 없다는 걸. 때로는 '미움받을 용기'보다 '무관심할 용기'가 더 필요하다는 걸.


예전의 나는 모든 사람의 호감을 얻으려고 애썼다. 그건 호감이 아니라 무게였다. 나를 짓누르는 납덩이같은 무게.


지금의 나는 안다.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할 필요는 없다. 타인의 호감은 내가 채워야 할 빈칸이 아니다. 오면 감사하고, 안 와도 그만인 것.


호감은 쌓는 것이 아니라 내려놓는 것이다.


나는 그제야 호감의 무게로부터 자유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