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회복 선언문

싫은 것은 웃으며 삼키지 말 것.

by 안녕 굿데이

입은 쾌락을 탐하고, 뒷감당은 늘 위장의 몫이다.

나는 이것을 '불공정 계약'이라 부른다. 혀끝의 짜릿한 매운맛과 혈관을 타고 흐르는 설탕의 단맛은 입에게 즉각적인 행복을 약속한다. 하지만 그 대가로 내장기관의 평화를 담보로 잡는다는 사실은 애써 외면한다. 계약서의 깨알 같은 약관을 무시하듯, 우리는 붉고 자극적인 음식 앞에서 훗날의 복통을 모른 척한다.


이해할 수가 없다. 입이 그토록 원하는 것을 내장기관은 왜 거부하며 문제를 일삼는가. 억울한 건 위장뿐만이 아니다. 척추도 마찬가지다. 의사들은 '나쁜 자세'라며 질색하지만, 다리를 꼬고 옆으로 누워 TV를 보는 자세가 세상에서 제일 편한 걸 어떡하란 말인가.


내 몸은 왜 본능적으로 나에게 유익한 것보다, 당장 기분 좋은 것들에게만 반응하도록 설계된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문제는 '본질'인 내면은 홀대하고 '감각'인 겉면만 챙기는 이 차별적인 태도가 소비 습관으로까지 이어진다는 점이다.


불과 십 분 전, 나는 8,900원짜리 휘핑 가득한 커피를 망설임 없이 결제했다. 팍팍한 현실을 견디게 해 줄 '심리 치료비'이자, 남들에게 "나 이 정도는 마시며 산다"라고 보여줄 달콤한 사치였으니까. 내 기분을 위한 비용이라 생각하면 그 돈은 결코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나를 살게 하는 연료, 끼니 앞에서는 태도가 180도 바뀐다.

프리미엄 삼각김밥과 일반 삼각김밥 사이, 고작 300원의 차이 앞에서 성분표까지 노려보며 구매까지 오랜 시간 고민하는 것이다. 누가 지켜보지 않는 혼밥 앞에서는 갑자기 깐깐한 경제인이 빙의된다. “아니, 편의점 삼각김밥 한 덩이가 무슨 2천 원 돈이야? 예전엔 지하철 앞에서 김밥 한 줄에 천 원이면 샀는데 요즘 물가가 정말 미쳤지” 하며 괜한 물가 탓을 한다.


보이지 않는 내장기관을 위한 생존 에너지에 대한 투자에는 벌벌 떨면서, 당장 혀끝을 만족시키고 남들에게 보이는 위로에는 거금을 척척 쓰는 이 기이한 이중성.

이런 기만은 밤이 되면 절정에 달한다.


인스타그램 보관함에는 '의사가 뽑은 장 건강에 좋은 10가지 음식‘ 같은 건강 피드가 가득하지만, 자정 무렵 내 손가락이 누르는 건 결국 '치즈 폭탄 떡볶이' 결제 버튼이다.



입의 쾌락을 위해 건강 피드 따위는 가볍게 배신한 대가는 늘 혹독하다.


다음 날 출근길, 평범했던 지하철은 순식간에 지옥행 급행열차로 돌변한다. 식은땀을 흘리며 괄약근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일분일초. 그것은 사회적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마지막 존엄과 체면의 생사가 걸린 문제다.

어쩌면 우리 몸이 자주 아픈 건, 이렇게 제멋대로 구는 주인의 태도에 대한 소심한 파업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 장이 파업을 선언하는 타이밍엔 또 다른 이유도 섞여 있었다. 유독 사람을 타는 장기들. 껄끄러운 미팅이 잡힌 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배가 아파왔고, 선배의 비꼬음을 웃어넘겨야 했던 저녁 식사 후엔 명치가 꽉 막히곤 했으니까.

불편한 사람과의 약속은 예고된 복통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싫었다. 내가 예민해서, 마음이 약해서 아픈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왠지 패배하는 기분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의사보다 검색창을 먼저 찾았다.


마음의 문제보다 몸의 문제로 치부하는 편이 훨씬 떳떳하니까. 스마트폰 속 세상은 친절하다. 증상 몇 개를 입력하자 '글루텐 불내증'이라는 단어가 툭 튀어나왔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형광등이 켜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이거였어! 내가 예민한 게 아니었어!"

나는 엄마 말마따나 성격이 하도 유별나서 조금만 신경 쓰여도 배가 반응하는 소인배가 아니었다. 나는 그저 '글루텐에 민감한 신체를 가진 환자'였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건 비극이다. 글루텐에 민감한 몸을 타고났으면서, 탄수화물 없이는 못 사는 한국에서 태어나다니. 그러니 내 장이 예민한 건 내 탓이 아니라 환경적 필연이었던 것이다.


이 얼마나 완벽한 면죄부인가.


그날 이후 '글루텐'은 내 삶의 기준이 되었다. 심지어 내가 좋아하던 빵집 앞에서도 나는 당당했다. 예전 같으면 빵 냄새에 홀려 들어갔겠지만, 이제 나는 '깨어있는 소비자'였다.


빈손으로 빵집을 지나오며 짐짓 으쓱한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여긴 글루텐 프리 메뉴가 없지 참. 트렌드를 아직도 못 읽었네. “

내가 못 먹어서 안 사는 게 아니라, 너희가 준비되지 않아서 안 사주는 것이라는 그 우월감. 빵을 씹지 못하는 허기를 나는 그 묘한 정신 승리로 채우며 돌아섰다.


이제 남은 절차는 단 하나, 의사의 입을 통해 내 지식을 '공증'받는 일뿐이었다.


나는 단순히 아픈 배를 치료하러 가는 게 아니었다. 나의 이 유난스러움에 '의학적 정당성'이라는 도장을 쾅 찍으러 가는 길이었다.


꽤 긴 시간의 대기 끝에 마주한 의사 앞에서, 나는 핸드폰 화면에 적어둔 내용을 자신 있게 읊었다.


"선생님, 제가 찾아봤는데요. 제 증상이 '글루텐 불내증'이랑 너무 똑같더라고요. 셀리악 병인가? 아무튼 밀가루가 안 맞는 것 같은데… 저도 그 알레르기 검사 같은 거 받아야 하나요?"


진료실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의사는 모니터를 보던 눈을 떼고 천천히 나를 응시했다. 타자 치던 소리가 뚝 끊기자, 방 안에는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만 웅웅거렸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안경을 추켜올리더니, 건조하게 물었다.


"그래서, 환자분은 스스로 글루텐 문제라고 진단하신 건가요?"


"…네?"


"아니, 원인부터 처방까지 다 파악하셨으니까. 제가 해드릴 게 있나 해서요."


숨이 턱 막혔다.


화를 내는 것도, 비웃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피곤한 전문가'가 '똑똑한 척하는 비전문가'를 바라보는 그 건조한 눈빛. 그 눈빛 앞에서 내가 준비해 간 지식은 순식간에 휴지 조각이 됐다.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아, 아뇨. 그냥 혹시 몰라서…"라고 얼버무렸다.


의사는 다시 모니터로 고개를 돌리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다 그렇게들 알아오고 저한테 말씀하시죠."


그날, 위장보다 먼저 체한 건 내 자존심이었다.


민망함에 입을 다물고 나는 순한 양이 되어 처분을 기다렸다. 그리고 엑스레이와 내시경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건, 내심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끝까지 아니길 바랐던 바로 그 진단이었다.

"과민 대장증후군입니다. 신경성 즉 스트레스가 주된 원인이기도 합니다.“

차라리 글루텐이 범인이길 빌었다. 밀가루가 문제라면 빵을 끊으면 그만이다. 식단은 내 의지로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니까. 하지만 원인이 ‘마음’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도대체 무엇을 끊어야 한단 말인가. 매일의 출근? 껄끄러운 인간관계? 아니면 닥쳐올 미래?


‘신경성’이라는 그 무심한 단어는, 내 고통의 원인이 고작 ‘음식’ 따위가 아니라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는 ‘나의 삶’ 자체에 있다는 뼈아픈 선고와 다름없었다.

진료실을 나서며 나는 의사가 던진 '신경성'이라는 단어를 껌처럼 질겅질겅 씹어보았다.


처음엔 그 말이 무책임한 회피처럼 느껴져 화가 났지만, 어쩌면 의사의 말은 정답이었다. 아니, 그것은 내가 애써 눈 돌리고 싶었던 아픈 진실이었다.


'신경성'.


풀어서 말하면 '신경(마음)에 탈이 났다'는 뜻이다.

나는 그동안 내 장을 글루텐 하나 소화 못 시키는

무능한 녀석이라 여겼다. 하지만 억울했을 것이다.


녀석은 나를 괴롭히기 위해 고장 난 것이 아니었다. 하물며 제멋대로 파업을 일삼는 불성실한 노동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내 비겁한 이성이 ‘사회생활’이라는 핑계로 ‘괜찮다’ 속이며 억지로 밀어 넣은 불안과 스트레스를, 끝까지 소화시키지 않고 온몸으로 거부해 준 내 몸의 가장 정직한 파수꾼이었다.


내 머리는 눈감아주려 했지만,

내 몸의 가장 예민한 파수꾼인 장은


멸균되지 않은 타인의 악의를 "괜찮아"라며 꿀꺽 삼킬 때나, 해동되지 않은 차가운 불안을 억지로 밀어 넣을 때마다


그 속에 감춰진 독성을 기어이 감지해 내고야 말았다.

그것들이 내 영혼에 독이 되어 퍼지기 직전, 온몸을 비틀고 쥐어짜며 필사적으로 사이렌을 울려댔던 것이다.


"멈춰! 지금 들어온 건 빵이 아니야. 불안 덩어리잖아! 삼키지 마!"


뇌는 '사회생활'이라며 애써 무시하려 했지만, 뱃속은 이미 뒤틀린 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네 마음이 이렇게 꼬여 있는데, 내가 어떻게 편안하게 소화를 시켜? 제발 그놈의 신경 좀 그만 곤두세우라고!"


그토록 처절하게 울려대던 구조 신호를, 나는 고작 '지나가는 배탈'이라 폄하하며 약을 털어 넣어 입막음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틀어막으면 막을수록, 내가 애써 외면하고 억누르려 했던 그 수많은 불안과 감정들은 출구를 찾지 못해 요동치다, 결국 과민해진 대장을 통해 비명처럼 쏟아져 나오고야 말았다.


더 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장이 그렇게 요란하게 사이렌을 울리며 몸부림쳐 쏟아냈지만, 정작 마음 한구석에는 해소되지 않은 불안과 불편함, 삼키기 싫었던 그 감정들이 끈적하게 눌어붙어 있었다. 몸은 쏟아냈으나 마음은 비워지지 않는 것. 그것이 진짜 문제였다.


거리에는 화려한 조명의 약국이 넘쳐난다. 하지만 저 수많은 화학 물질 중 어디에도 내 인생의 체증을 해결해 줄 약은 없다.


나는 빈손으로 약국을 지나친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처방은 명확하다. 약을 찾거나 빵집을 원망하는 대신, 내 입과 위장 사이의 '불공정 계약'을 갱신하는 일이다.


이를테면 ‘거절’이라는 이름의 소화제 같은 것들 말이다.

타인의 기분을 맞추려 내 기분을 구겨 넣지 않는 것.


껄끄러운 상황을 모면하려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이지 않는 것.


식도 끝까지 차오른 ‘싫다’는 말을 꿀꺽 삼켜, 내 몸을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만들지 않는 것.


생각해 보면, ‘글루텐 프리’ 보다 시급한 건 ‘가식 프리’의 삶이었다. 밀가루를 끊는다고 인생이 맑아지진 않는다.


내가 진짜 끊어야 할 유해 성분은, 빵 속에 들어 있는 글루텐이 아니라, 나를 속이면서까지 남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 했던 그 끈적하고 소화되지 않는 위선이었으니까.


편의점에 들어가 생수 한 병을 샀다.


시원한 물 한 모금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며 꽉 막힌 속을 천천히 달래준다.


나는 꼬르륵거리는 배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오늘 저녁엔 뱃속 장기들에게 사과하는 마음으로 아주 천천히, 오래 씹어 먹을 수 있는 따뜻한 죽 한 그릇을 대접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