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유주얼 서스펙트: 제주 정형외과 미스터리
쾅!
둔탁한 소리와 함께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문지방에 새끼발가락을, 그것도 아주 정확한 각도로 찧은 것이다. “억” 소리도 나오지 않는 고통.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이고 짜릿한 아픔이 발끝에서 뇌수까지 직통으로 꽂혔다. 나는 거실 바닥을 뒹굴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 뒤로 나의 제주 생활은 지옥으로 변했다. 발가락은 퉁퉁 부어올라 소시지처럼 변했고, 붉다 못해 검푸른 멍이 올라왔다. 걷는 것은 고사하고 화장실 한 번 가는 데도 한세월이었다. 엉거주춤 벽을 짚고 절뚝이는 꼴이라니.
‘이건 분명 부러졌다. 아니, 가루가 됐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아플 리가 없었다. 나는 확신했다. 내 발가락 뼈는 지금 회생 불가능한 상태일 거라고.
하지만 당장 병원에 달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누군가는 미련하다고 혀를 찰지 모르지만, 육지, 그것도 슬리퍼만 끌고 나가면 병원이 널려 있는 일명 ‘슬세권’에 사는 사람들은 모른다. 제주 중산간 시골 마을에서 ‘병원행’이 얼마나 거창한 프로젝트인지.
내가 살던 곳은 제주시내에서 차로 40분은 족히 걸리는 한적한 시골이었다. 동네 유일한 내과조차 성한 다리로 한참을 걸어야 했으니, 퉁퉁 부은 발로는 감히 엄두도 못 낼 국토종주나 다름없었다.
결국 제대로 된 정형외과에서 엑스레이를 찍으려면 시내로 나가야 하는데, 뚜벅이인 나에게 그건 일종의 ‘대모험’이었다.
버스를 타자니 덜컹거리는 과속 방지턱을 넘을 때마다 내 발가락이 비명을 지를 게 뻔했고, 무엇보다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 안에서 누군가 실수로 내 발을 밟기라도 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하지만 택시를 부르자니 왕복 요금이 족히 4만 원은 깨질 거리였다. 낙원을 찾아 제주도로 내려온 가난한 도피자에게 그 돈은 일주일 치 식비이자, 며칠 밤의 안식과 맞바꿔야 할 거금이었다.
‘설마 부러졌겠어? 그냥 좀 심하게 찧은 거겠지. 하루 이틀 지나면 낫겠지.’
그렇게 ‘가성비’와 ‘자연 치유’에 대한 헛된 믿음을 붙잡고 하루하루 버티다 보니 어느새 보름이 흘러버린 것이다.
하지만 붓기는 빠질 기미가 없었고, 밤마다 욱신거리는 통증은 내 안일한 희망을 비웃는 듯했다.
생각보다 길어진 2주라는 시간이 지나자 덜컥 겁이 났다. ‘이러다 영영 낫지 않는 건 아닐까? 평생 이렇게 절뚝이며 살아야 하는 건가?’ 도저히 이렇게는 평생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공포가 택시비 4만 원의 부담을 이겼다. 나는 큰맘 먹고 제주시내로 나가는 ‘원정 진료’를 결심했다. 택시비 미터기가 말처럼 뛰어올랐지만,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중환자였으니까.
택시에서 내려 병원 앞에 섰을 때, 나는 경악했다. “아니, 세상에. 정형외과 입구에 계단이라니?” 엘리베이터 없는 2층. 이건 환자에 대한 기만이었다. 다리가 부러진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나는 세상의 배려 없음을 한탄하며, 난간을 생명줄처럼 잡고 한 계단 한 계단 힘겹게 올랐다. 식은땀이 흘렀다. 내 뒷모습은 영락없는 비운의 주인공이었다.
비장한 마음으로 엑스레이를 찍고 진료실에 들어갔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는 모니터 속 내 발가락 뼈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나는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처럼 침을 꼴깍 삼켰다.
“수술해야 하나요? 깁스는 얼마나…”
내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의사가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환자분, 엑스레이상 골절 소견은 전혀 없습니다.” “…네?” “뼈는 아주 깨끗해요. 혹시 엑스레이에 안 잡히는 실금, 그러니까 미세골절이 있다 쳐도요.”
의사는 깍지를 끼며 세상 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다치신 지 2주 되셨다고 했죠? 그 정도면 미세골절이라도 이미 뼈가 붙고 자연 치유가 거의 끝났을 시기입니다. 의학적으로는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며 덧붙였다. “물론 본인은 많이 아프시겠죠. 부었으니까요. 근데 뭐, 뼈는 멀쩡합니다. 약 처방전 드릴 테니까 보자... 7일? 아니, 3일 치만 일단 가져가시죠.”
진료실을 나오는데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욱신거려 발을 딛기도 힘들었던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것이다. ‘골절이 아니다.’, ‘약을 3일 치만 먹어도 될 정도다.’ 의사의 그 건조하고 심드렁한 처방이 내 뇌의 스위치를 꺼버린 걸까. 나는 대기실에서 시험 삼아 발을 쿵쿵 굴러보았다. 안 아팠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픔을 ‘무시’할 수 있게 되었다. 방금 전까지 계단 앞에서 식은땀을 흘리던 나는 어디로 간 걸까.
나는 병원 문을 열고 나왔다. 올 때는 난간을 생명줄처럼 부여잡고 기어 올라왔던 그 계단을, 갈 때는 난간 따위 거들떠보지도 않고 보란 듯이 성큼성큼 걸어 내려왔다.
마치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의 마지막 장면처럼. 절뚝이던 발걸음이 거짓말처럼 펴지는 그 반전. 나는 제주의 한복판에서 나만의 카이저 소제를 연기하고 있었다.
그길로 나는 집으로 바로 가지 않았다. 기분이 너무 상쾌해서, 아니 억울해서라도 이대로는 못 들어갔다. 나는 근처 동문시장으로 향했다. 시장통은 치열하게 호객하는 상인들과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그 소란스러운 생명력이 묘하게 반가웠다.
나는 떡볶이 집에 서서 빨간 떡볶이를 입안 가득 욱여넣었다. 매운 양념이 혀를 찌르자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하, 맵다.” 입안이 얼얼해지니 발가락의 욱신거림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지난 보름간은 아픔이 무서워 입맛조차 없었는데, ‘괜찮다’는 말을 듣자마자 식욕이 이토록 사납게 되살아나다니.
빨간 떡을 씹어 삼키며 생각했다. 아픈 건 아픈 거고, 배고픈 건 배고픈 거다. 내 몸은 골절(이라고 착각한)의 공포 속에서도 여전히 이렇게 맹렬하게 ‘삶’을 원하고 있었다.
양손 가득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헛웃음이 났다. 내가 보름 동안 앓았던 건 발가락이 아니라 ‘겁’이었구나. 뼈가 부러졌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이렇게는 평생 못 산다’는 절망이 고통을 몇 배로 부풀리고 있었던 것이다.
의사가 내게 준 건 진통제가 아니라 ‘고통의 유효기간’이었다. “2주면 낫는다”는 그 한마디는 내 아픔에 명확한 ‘끝’을 선물했다.
그날 이후, 나는 삶의 문지방에 찧여 마음이 퉁퉁 부어오를 때마다 그날 난간을 부여잡고 올려다봤던 그 까마득한 계단을 떠올린다.
살다 보면 믿었던 사람에게 거절당했을 때, 준비했던 프로젝트가 엎어졌을 때, 혹은 이유 모를 불안이 밤새 괴롭힐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우리는 당장이라도 인생의 뼈대가 부러진 것 같고, 이 고통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공포에 휩싸인다. 지옥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도저히 이렇게는 평생 못 산다’는 생각, 이 문제가 끝없이 계속될 거라는 믿음, 바로 그곳이 지옥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답은 명확해진다. ‘끝이 있는 고통’은 견딜 수 있다. 아니, 언제고 끝날 것이란 걸 안다면 우리는 기꺼이 감내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무턱대고 절망하는 대신, 내 마음속 의사를 소환해 스스로에게 진단을 내린다. “많이 아프지? 근데 엑스레이 찍어보니까 인생 뼈대는 멀쩡해. 부러진 거 아니야. 그냥 좀 세게 부딪힌 타박상이야. 이 또한 지나간다. 길어야 한 달이다.” 신기하게도 고통에 마침표를 찍어주면, 막막했던 아픔은 ‘견딜 만한 통증’으로 바뀐다.
그 후로도 나는 종종 우스갯소리처럼 말하곤 한다. 제주도에는 앉은뱅이도 일으켜 세우는 전설의 명의가 계시다고. "아니 글쎄, 2주 동안 꼼짝없이 절뚝이던 나를 단 한 번의 진료로 성큼성큼 걷게 만들었다니까?" 사람들은 "와, 용하다"며 감탄하지만, 사실 그 명의의 비법이 ‘팩트 폭격’과 ‘심드렁함’이었다는 건 나만의 비밀이다.
그래서 요즘도 어딘가 아프긴 한데 이게 진짜 심각한 건지, 아니면 내 겁이 만들어낸 엄살인지 헷갈릴 때면 혼자 중얼거린다.
"아, 제주도 명의한테 가봐야 하는데."
그러면 신기하게도 부풀어 올랐던 엄살의 거품이 푹 꺼지고, 통증은 딱 견딜 만한 만큼으로 줄어든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거창한 치료가 아니라, 내 아픔을 객관적으로 봐줄 단호한 한마디와 스스로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는 뻔뻔한 용기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씩씩하게, 혹은 처절하게 절뚝거리며 걷다 보면, 언젠가 이 터널의 끝에서 나는 분명 다시 뛰고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