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짓 이야기

오버하지 말자!

by ziwoopa

91년부터 93년까지 군 생활하면서 행정병으로는 17개월 정도 근무했습니다. 그 당시 중대까지는 전동타자기가 보급이 안되어있었고 (당연히 PC는 없습니다.) 손으로 문서를 작성하거나 마라톤 타자기를 쓰던 시절입니다. 때는 연대장이 바뀌어 각 중대별로 업무보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군인들 이럴 때는 미칩니다. 쓸고 닦고 꾸미고...


행정반은 업무보고 문서 만드는 일로 바쁩니다. 타자기로는 감당이 안되어 밑에 후임은 30센티 자와 모나미 볼펜으로 표를 그리고 저는 열심히 글을 써 내려갔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 조심조심. 쓰다가 실수하면 후임은 죽어납니다. 중대장이 초안으로 웬 표를 그리 많이도 그려놨는지. 모나미 펜 똥이 묻으면 나한테 꿀밤 한 대 맞고 다시 그리기를 반복. 밤새워 마무리하고 한숨 돌리고 있는데 자꾸 표지가 맘에 걸립니다.


뭔가 허전하고 아쉬운 거죠. 명색이 건축과 출신인데...


갑자기 번뜩하고 지난번 휴가 때 집에서 가져온 레터링과 톤지가 생각나서 표지를 다시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레터링이란 글자 한 자 한 자가 판박이 형태로 되어있는 문구입니다. 필름지에 글자가 프린트되어 있어 껌종이 판박이처럼 종이에 새길 수 있답니다. 굵은체로 제목 만들고 중대 마크는 현란한 짜깁기 솜씨를 부려 그려 넣고 마무리. 뭔가 알 수 없는 뿌듯함에 아침에 출근하신 인사계님께 보여드렸습니다.


오! 인사계님 눈 돌아가십니다.


문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이성을 잃은 인사계님은 모든 문서를 이걸로 작성하라고 하십니다.


"내가 미쳤지.. 왜 쓸데없는 짓을 해가지고..."


모든 문서를 다 할 수 없다는 걸 이해시켜드린 후에 목차까지만 하는 걸로 타협을 봤습니다. 나름 칭찬도 받고 좋았지만 슬슬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인사계님이 또다시 사고를 치십니다. 행정반 문이 활짝 열리면서 1중대, 3중대, 화기중대, 본부중대 인사계님들이 업무보고 서류를 들고 활짝 열린 문으로 진격해 들어옵니다.


'아이쿠!'


또다시 실랑이가 벌어집니다. 남은 글자가 몇 개 없다. 시간상 할 수가 없다. 블라블라 블라~


눈치가 빠른 분들은 자음과 모음을 짜깁기 해서라도 해내라 하시고 막무가내십니다. 요즘 건축과 학생들은 PC로 작업해서 출력하면 그만이지만 그때만 해도 문 사이즈만 한 도판에 일일이 손으로 그리고 판박이 박고 해서 작품을 제출했었습니다. 온 우주가 도와도 불가능한 일이었죠. 간신히 연대장 도착 30분 전에 표지들만 싹 바꿔 마무리하고 전 뻗어버렸습니다. 연대장님 가신 후에 인사계님이 한 마디 하셨습니다.


"수고했다!. 그런데 보고서는 쳐다도 안보더라!"



그날로 집에서 가져왔던 레터링과 톤지를 소각해버렸습니다. 미친 짓은 반복하면 안 되니까요! END.


ps. 제대할 때 기념으로 전동타자기 하나 기증하고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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