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개와 백숙

트라우마

by ziwoopa

국민학교 시절 꼬마들이 한두 번씩은 의례 그랬듯이 나도 병아리 몇 마리를 사온적이 있었다. 그 당시 살던 집은 성북동 서울성곽(복원되기 전)을 담으로 삼은 'T'자형 개량 한옥이라서 가운데 대청을 앞뒤로 마당과 텃밭이 있었다.


풀을 뜯어먹으며 열심히 자라준 병아리들이 중닭이 된 어느 비 오는 여름날. 엄마는 닭을 잡기로 하셨다. 그 무시무시한 닭 잡는 역할은 할아버지께서 하셨다.


비는 점점 거세지고 천둥 번개가 요란해지는 가운데 할아버지는 닭을 한 마리 잡아 품에 안고 처마 밑에 자리를 잡으셨다. "성필아 저기 가서 큰 짱돌 하나 가져와라." 김장을 하면 당연히 김장독을 땅에 묻고 짱돌을 올려두는 시절이라 마당 한 켠에는 큼지막한 돌들이 굴러다녔었다.


어디서 가져오셨는지 커다란 대못을 한 손에 드시고 닭의 목을 바닥에 고정시키시고는 "성필아! 닭 꼭 잡고 있어라." 하셨다.


여기서 중요한 건 할아버지께서 번쩍번쩍 거리는 번개가 칠 때 짱돌을 들어 올리시기 전까지는 난 이게 어떤 상황인지를 모르고 있었다는 거다. 모든 것은 엄청난 일이 벌어진 이후에 알게 되었을 뿐...


국딩 꼬마가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는 가운데 대못은 닭머리에 겨냥되었고 번개 소리와 함께 짱똘은 대못을 향해 내리 꽂히고 있었다. 난 큰 충격에 빠져 한동안 말을 못 하고 어버버하고 있는데 엄마가 오셔서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아이고 아버님! 애 보는데서 그러시면...."


멍 때리고 있던 내 앞에 점심상이 나타났다. 그 이후 한 마리가 더 희생되었는지 뽀얗게 발가벗은 닭들이 말간 국물 속에 백숙이 되어 누워있었다. 그 냄새에 넋을 잃은 나는 앞에 일어났던 모든 일은 까맣게 잊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맛있게 손가락을 빨며 먹어치웠다.


아마도 이때의 기억은 군대 가기 전까지 내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렸던 듯했다. 장마가 한창인 어느 날 대공초소 근처로 떨어진 벼락을 보고서야 놀란 가슴과 함께 그때 백숙 냄새가 코에서 살아났다. 끔찍했던 기억과 함께.


이후로 번개가 칠 때면 백숙 냄새가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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