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조와 실미도
40여 년 전의 기억을 되살리기에는 인간의 능력이 한없이 부족함을 알기에 이 글을 쓰면서 부모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덕분에 대화를 통해 기억을 강제소환하기도 하고, 평소에 못했던 마음속 이야기도 나눌 수 있음에 감사함을 느낀다.
지금은 고시촌과 학원이 들어찬 노량진역 건너편 길을 따라 올라간 끝 동네. 어려운 형편의 사람들이 처마를 맞대고 살을 부대끼며 살고 있었으리라 짐작을 해본다. 어머니는 어린 나를 업고 그 당시 살던 노량진 근처 길을 나가셨다. 까탈스러운 입맛에 밥도 안 먹고 울기만 하는 나를 달래려 밤이든 낮이든 집을 나서셨다고 한다. 그렇게 나를 업고 서성일 때면 주변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어머! 쟤 아이노꾸* 아냐" "튀기** 맞네!" 하는 말들을 했단다. 거무튀튀한 얼굴에 입술도 두툼하고 달팽이 마냥 꼬인 머리카락을 하고 있으니 혼혈아이로 오해받기 딱 좋았다. 남양홍 38대손 토종 한국인을 몰라보는 사람들에게 항변을 하기에는 난 너무 어렸다.
1971년 8월 23일로 추정되는 그날도 나를 업고 노량진 전철역 앞으로 나가신 어머니 눈에 별 계급장을 단 군인들이 어디론가 달려가거나 군인들이 떼를 지어 이동하는 걸 보셨단다. 자식들이 장성한 후에 그 날을 회상하시는 어머니의 기억은 군인들과 간첩을 보셨다면서 <김신조 사건>이었다고 하셨다. 어머니의 기억이 터무니없음은 나이가 들어 제대로 된 <김신조 사건>의 전말을 알고 나서는 좀 황당했었다. 그 사건은 1968년에 벌어진 일이었으니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었고, 사건이 벌어진 장소와 경로 등은 노량진과는 너무도 멀었다.
그 이후 <실미도 사건>을 알게 되면서 모든 의문이 풀렸다.
우선 노량진에 살던 시기와 <실미도 사건>이 벌어졌던 시기가 일치한다. 어머니가 기억하는 군인들의 이동, 총소리 등등을 종합해 보면 실미도에서 북파 훈련을 받던 대원들이 섬을 탈출해 인천을 거쳐 탈취한 버스를 타고 육군과 총격전을 벌이며 오후 2시 15분경 도착한 곳이 대방동 유한양행 앞이었다. 거리로 500미터 남짓이었으니 굉장히 가까운 거리였다. 기록에 보면 총격전을 벌이다 수류탄 자폭까지 했다면 굉장히 시끄러웠을 텐데도 별다른 기억이 없으시다니 사실 이 기억이 전부 사실인지는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1991년에 입대해서 근무했던 26사단에는 회암리 유격장이 있다. 첫 유격을 받던 날 유격대장이 말해줬던 유격장의 유래 또한 <김신조 사건>과 인연이 있다. 1968년 추운 겨울 얼어붙은 임진강을 건너 경비가 허술한 곳(미군과 한국군의 중간 지역)을 뚫고 바로 이 부대가 위치한 양주 지역의 산을 타고 세검정까지 침투를 했다는 거다. 이 사건으로 유격이 생겨 최초의 유격장이 되었고, 군 근무 기간까지 늘어 제대를 앞둔 말년 병장들의 원성을 샀다는 얘기도 있었다. 바로 그 순간에 떠올린 기억이 바로 어머니의 노량진역 앞 군인 목격 사건이었다. 결국에는 틀린 기억이었지만 군 생활 내내 부대 뒤 칠봉산을 볼 때면 김신조와 어머니와 노량진이 세트로 떠 올랐다.
60년대 말과 70년대 초반에 벌어진 이런 사건들(울진 무장공비 사건 포함)이 벌어지면서 박정희 정권은 더욱더 철저하고 집요하게 반공을 국시로 국민들을 세뇌 하기 시작한다. 앞으로 내가 커 가면서 받게 될 모든 반공/멸공 교육의 시발점이 된 사건이었다. 파란만장한 낀 세대들은 이런 상황에서 태어나 자라기 시작했다.
똘이장군 이야기가 나오려면 아직 멀었는데 글 초장부터 걱정이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