돔베고기, 고기국수
모든 일에 의미를 붙이고 모든 감정에 이유를 요구하는 순간, 인간의 스트레스는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연인 사이의 다툼에서는 예열없이 끓어오르기도 한다.
상대방을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는 말이 있다면 아마 이런 질문들일 것이다.
"뭘 잘못했는데?"
"넌 내가 왜 화난 줄 알고 미안하다고 하는 거야?"
차가운 얼굴로 던져지는 이 질문은 지금 감정의 원인을 정확히 규명하고, 마음에 꼭 맞는 답안을 제한 시간 안에 제출하라는 요구다.
원인을 찾는 것만으로도 이미 머리는 복잡해진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 이유가 조금이라도 빗나가는 순간, 다툼은 재판으로 대화는 심문으로 변질된다는 것이다.
이유를 찾아내야 한다는 일은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가장 어렵고도 잔인한 논술시험일지도 모른다.
나는 현재 프로덕트 매니저, 줄여서 PM이라 불리는 일을 하고 있다.
회사의 비즈니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을 기획하고 여러 유관 부서를 설득해 그 기획을 현실로 옮기는 역할이다.
회사에서 "그래서 이걸 왜 해야 하죠?"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듣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 일에서 가장 많은 시간이 할애되는 부분은 아마도 설득일 것이다.
경영진에게는 왜 이 방향이어야 하는지를 설명해 확신을 드려야 하고, 그 내용을 다시 실무진에게 풀어내 그들이 실제로 움직이도록 납득시켜야 한다.
그러다 보니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이야기를, 상대만 바꿔가며 버전별로 설명하는 사람이 된다.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말이 있다.
PM의 기획에는 모든 부분에 반드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
이유 없이 사람을 설득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 이유는 그럴듯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근거가 분명해야 하고 논리는 매끄러워야 한다.
데이터든 사용자 피드백이든, 경쟁사 분석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이유를 찾아야 한다.
최후의 순간에는 감성에라도 호소해야 한다.
어쨌든 끝없이 이유를 찾아내야 하는 것이 이 직업의 숙명이다.
가끔 기획을 두고 꼬치꼬치 캐묻는 질문이 이어질 때면 속으로는 이런 말이 목까지 차오른다.
"그냥 좀 합시다!"
하지만 절대 입 밖으로 낼 수 없다.
그렇게 답하는 순간 능력 없는 PM으로 낙인찍혀 그 이후로는 그 누구도 설득할 수 없게 된다.
입사 면접에서 "우리 회사에 왜 지원했어요?"라는 질문.
공모전에서 "왜 이 주제를 선택하시게 되었나요?"라는 질문.
공공기관에서 서류를 떼러 갔을 때 '신청 사유'를 적어 달라는 칸.
모두 아무 설명 없이 '그냥'이라고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안타깝게도 그냥이라는 이유가 통용되는 일은 이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
설령 통용된다 해도 그 대답을 만족해 주는 사람은 더더욱 드물다.
그래도 가끔은 그냥이라는 대답이 아주 좋은 쪽으로 흘러가는 순간이 있다.
상대방을 충분히 만족시키고 어쩌면 부러움 섞인 눈빛까지 받게 되는 그런 순간이다.
연인이 되어 지인들에게 서로를 소개하는 자리나, 결혼을 결심해 청첩장을 건네는 자리에서는 어김없이 단골 질문이 등장한다.
"어디가 좋아서 연애를(혹은 결혼을) 결심하게 된 거예요?"
질문에 이렇게 답하면 분위기가 묘하게 부드러워진다.
"특별한 이유 한 가지가 있는 건 아니에요. 그냥... 그냥 다 좋아요."
지인들은 대개 고개를 끄덕이며 낭만적이라는 표정을 짓는다.
그 순간만큼은 '그냥'이 가장 성의 있고 가장 만족스러운 대답이 된다.
괜히 억지로 이유를 하나 골라 "웃는 모습이 예뻐서요" 같은 답을 했다가는 곧바로 역공을 맞기 십상이다.
"그럼 웃는 모습이 별로였으면 안 만났을 거예요?"
갑자기 대답하기 어려워 얼굴이 화끈해진다.
그래서 이 질문 앞에서는 '그냥'으로 넘기는 쪽이 훨씬 현명하다.
괜히 이유를 붙이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지켜내는 방법이기도 하다.
오전 아홉 시 책을 읽다 스마트폰을 확인하니 외출한 아내에게서 메시지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오빠, 우리 점심 뭐 먹어?"
나는 잠깐 생각한 후 답했다.
"돔베고기랑 고기국수. 만드는 데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니까 언제 집에 도착하는지만 알려줘."
"한 시쯤 도착할 것 같아."
책을 마저 읽곤 시간 맞춰 요리를 시작했다.
새벽배송으로 도착한 오겹살을 꺼냈다.
된장 한 숟갈, 통후추 몇 알, 대파와 양파, 생강을 넣고 고기를 한 시간쯤 삶아두었다.
잘 삶아진 고기는 식초와 소금을 푼 찬물에 잠깐 헹군 뒤 10분 정도 그대로 둔다.
그사이 고기를 삶았던 물에 남은 건더기들을 말끔히 건져내고 간장과 마늘, 채 썬 당근과 대파, 양파를 넣어 다시 끓인다.
계란도 하나 풀어준다.
콩나물은 살짝만 삶아 간장과 참기름, 통깨로 가볍게 무쳐둔다.
면을 삶고, 채즙이 우러난 국물을 붓고, 콩나물을 올린 뒤 고기를 몇 점 얹으면 고기국수가 완성된다.
남은 고기는 먹기 좋게 썰어 나무 도마 위에 그대로 올리면 돔베고기도 준비된다.
시간에 맞춰 도착한 아내와 점심 식사를 시작했다.
국물부터 한 숟갈 뜨고 고기를 몇 점 집어 먹던 아내는 즐거워하며 말했다.
"국물도 좋고, 고기도 진짜 부드럽다. 근데 돔베라는 부위는 처음 들어보네. 너무 맛있다"
나는 별다른 감정의 요동 없이 고기를 집어먹으며 설명했다.
"이거 오겹살이야. 돔베는 부위가 아니라 도마를 뜻하는 제주도 사투리야. 제주도에서는 수육을 이렇게 나무 도마에 올려 내는데 그래서 돔베고기라고 불러."
아내는 잠깐 멈칫하더니 웃으며 말했다.
"아, 그래? 괜히 민망하네. 히히."
"뭐 어때. 제주도 사람도 아니고, 모를 수도 있지."
그렇게 한참을 먹다가 아내는 갑자기 질문을 하나 던졌다.
"근데 이건 왜 만든 거야?"
나는 반사적으로 배를 누르면 멘트가 나오는 인형처럼 아무 생각 없이 답했다.
"그냥."
"그렇구나."
그게 전부였다.
아내는 그 대답에 서운해하지도 않았고 싱겁다는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냥이라는 말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었다.
굳이 그때의 내 마음을 설명해 보자면 정말로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억지로 이유를 하나 붙여 말한다고 해도 감동도 없고 재미도 없을 게 뻔했다.
그래서 그 질문은 설명 대신 그냥 넘어가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아내는 이런 내 마음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얼마 전 동생과 아내가 함께 있던 자리에서 아내가 던진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한 적이 있다.
"그건 몰라도 돼. 넘어가자."
동생은 마치 자신의 남자친구에게서 그런 대답을 들은 것처럼 감정을 이입하며, 차가운 반응을 보였다.
오빠 너무한 거 아니냐며 새언니는 오빠가 저렇게 대충 대답하면 화 안 나냐고 물었다.
아내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
전혀 화나지 않는다고.
오빠가 몰라도 된다고 할 때는 정말로 몰라도 되는 이야기라서 그렇다고.
나도 옆에서 슬쩍 거들었다.
방금 그 질문에 답을 한다고 해서 딱히 즐거울 것도 없고 크게 관심 가질 만한 이야기도 아니고, 어쩌면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일 수도 있다고.
하지만 동생은 아직 우리 부부의 이 효율적인 대화 중단 방식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는 눈치였다.
나는 이렇게 질문에 대해 "그냥", "몰라도 돼"라고 말해도 그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아내가 좋았다.
이유를 찾아내야 하는 고뇌를 굳이 나에게 얹지 않는다.
우리가 나눌 수 있는 즐거운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데, 머리를 쥐어짜 가며 해야 할 대화를 굳이 지속할 필요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속으로 혼자 꽤나 뿌듯해하고 있던 순간, 아내가 덧붙이듯 말했다.
"근데 아가씨 오빠가 군대 얘기랑 축구 얘기는 제가 별로 관심도 없는데 한번 시작하면 끝도 없이 해요."
그 순간, 나의 뿌듯함은 아주 빠르게 뜨끔함으로 바뀌었다.
아내의 후기
★5.0점
삶는 고기에는 도가 텄는지 고기가 정말 부드럽고 맛있었어요!
원조 제주 고기국수는 국물이 맑은 편이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샤브샤브류를 정말 좋아하는데 그런 느낌의 국수라서 더 맛있게 먹었어요.
고기의 부드러운 식감이랑 콩나물의 아삭한 식감이 같이 어우러지는 것도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