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히 전문가가 아니다

닭칼국수

by 퉁퉁코딩

K팝스타부터 흑백요리사까지, 대한민국의 경연 프로그램 제작 계획이 발표될 때면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심사위원으로 향한다.

누가 그 자리에 앉느냐에 따라 프로그램의 품격이 달라진다.

그들이 던진 한마디는 방송이 끝나기도 전에 온라인을 떠도는 밈이 된다.


같은 장면을 보고도 전혀 다른 말을 하는 그들은 전문가다.

한 분야에서 오래 살아남은 사람들은 확실히 다르다.

일반인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단번에 핵심을 짚어낸다.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이래서 전문가구나 싶어 속이 시원하게 뚫린다.

바로 이 쾌감이 경연 프로그램을 보는 재미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내 인생에도 누군가의 말 몇 마디 덕분에 혼자 고민하던 방향이 단번에 바로잡혔던 순간이 있었다.

그 최초의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 보니 어느새 난 초등학생이었다.

매년 4월 과학의 달이 되면 학교에서는 각종 경연대회가 시작되었다.

항공과학, 전자과학, 기계과학, 물로켓, 과학 독후감까지.

운이 좋으면 교내 대표로 선발되어 시대회와 도대회를 거쳐 전국대회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 나는 기계과학을 골랐다.

어릴 때부터 블록 놀이를 좋아해서였을까.

뭔가를 조립해 만들어내는 일을 유독 재밌어 했다.

기계과학에 참가하려면 '과학상자'라는 것을 사야 했다.

그 상자 안에는 볼트와 너트, 쇠판, 체인, 모터 같은 것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제한 시간 안에 이 부품들을 이용해 실제로 움직이는 작품을 만들어야 했다.

작품이 완성되면 설명서를 작성하고 심사위원 앞에서 직접 작동시키며 왜 이런 작품을 만들었는지까지 설명해야 했다.


과학상자에는 1호부터 6호까지 단계가 있었다.

번호가 올라갈수록 부품의 종류는 늘어나고 가격과 무게도 함께 올라갔다.

특히 6호쯤 되면 상자라기보다는 큰 공구함에 가까웠다.

초등학생이 들고 다니기에는 상당히 버거운 무게였다.


처음 참가했던 4학년 때는 4호를 들고 나갔다.

그걸로 교내 예선을 통과했고 어쩌다 보니 시대회까지 나갔던 기억이 난다.

5학년이 되자 한 해의 경험만큼이나 욕심도 함께 자랐다.

부모님은 내 기세에 밀려 과학상자 6호를 사주셨고 나는 그것을 끙끙대며 들고 다녔다.

교내 대회와 시대회는 무난히 통과했다.

도대회에 진출하자 점점 전국대회를 꿈꾸게 되었다.

기계과학의 경우 전국대회 수상작들이 모두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었다.

그것들과 비교하니 시대회에서 내가 만들었던 작품에서 수준을 상당히 끌어올려야 했다.


이 당시 나를 데리고 대회장에 가야 했고 방과 후에는 남아 연습까지 도와야 했던 지도교사 선생님이 계셨다.

6학년 한 반의 담임을 맡고 계셨던 젊은 여교사 선생님이셨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여러 교내 업무 중 하나를 젊다는 이유로 떠맡게 되신 건 아닐까 싶다.

그땐 몰랐지만 어른이 되고 나니 그런 상황이 유난히 선명하게 그려진다.


선생님은 귀찮았을지도 모를 그 상황에서도 아주 성실하게 나를 지도해 주셨다.

기계과학에 대해 많이 알고 계시지는 않았지만 정말 최선을 다해 함께해 주셨다.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만들면 좋을지 고민했고 작품 설명서의 한 줄 한 줄까지 꼼꼼하게 봐주셨다.

시대회까지는 그 방식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도대회를 앞두자 이제는 다른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선생님도 느끼셨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은 특단의 결정을 내리셨다.

기계과학 쪽으로는 제야의 고수 같은 분이 어딘가에 계시다는 소문을 들으신 것이다.

선생님은 나와 내 작품을 차에 태우고 길을 나섰다.

도착한 곳은 충북 충주시의 한 시골 초등학교였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그 학교의 이름은 야동초등학교였다.

그곳에서 만난 분은 50대쯤 되어 보이는 남자 선생님이었다.

내 작품을 한 번 쓱 보시더니 거침없이 평가를 시작하셨다.

"여기에는 와셔를 하나씩 꼭 끼워야 하고 이 체인은 너무 빡빡하니 두 칸 정도 여유를 주는 게 좋아요. 이 움직임은 조금 더 단순하게 가는 게 낫겠네요."

설명은 길지 않았고 말도 복잡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는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그동안 내가 붙잡고 있던 문제들이 순식간에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1시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그날 받은 조언은 그 어떤 연습 시간보다도 값졌다.

그분이 바로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최초의 전문가였다.

그 도움 덕분에 1위로 대회를 통과했고 도대표가 될 수 있었다.


전국대회는 과학의 도시라 불리던 대전에서 열렸다.

담당 선생님뿐만 아니라 다른 젊은 선생님 두 분까지 무려 세 분이나 나를 응원하러 와주셨다.

초등학생 하나를 위한 응원단치고는 꽤 거창한 편이었다.

그해 나는 기계과학 분야에서 은상을 수상했다.

수상자가 호명되는 순간 선생님 세 분은 대상이나 금상 발표 때보다 더 크게 환호성을 보내 주셨다.

본인들이 직접 상을 받아도 이렇게까지는 환호하지 않았을 것같은 너무나 큰 소리 였다.

대상과 금상은 물론 같이 은상을 받은 수상자들 모두 6학년이었다.

당시 5학년이었던 나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공식 기록에는 은상이었지만 내 마음속 기록장에는 '5학년 중 1등'이라고 큼지막하게 적어두었다.

전문가의 말 몇마디는 나만 전국대회 수상자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몇 해뒤 나를 지도해 주셨던 선생님은 어느새 진짜 전문가가 되어 도대회 심사위원으로 서 계셨다.



그 시절에는 전문가를 만나려면 먼저 전문가가 있다는 소문부터 찾아야 했다.

어디에 계신지 물어보고 정말 그분이 맞는지 확인하고, 운이 좋으면 잠깐의 시간을 얻는 식이었다.

검증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보니 가짜 전문가도 적지 않았다.

전문가의 말은 노력과 인연이 겹쳐야만 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다르다.

유튜브와 SNS 덕분에 세상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스마트폰 안에 들어와 있다.

요리는 특히 그렇다.

동네 맛집 사장님의 손맛은 물론 미슐랭 셰프의 감각까지 정보가 너무 많아 오히려 혼란스러울 정도다.

그러다 우연히 외국 고급 호텔에서 일했다는 한 셰프의 영상을 보게 되었다.

메뉴는 닭칼국수.

집에서 쉽게 만들수 있도록 간편한 요리법을 소개해 주었다.

아내에게 슬쩍 보여주니 군침이 도는 듯 했다.

우리는 점심 메뉴를 닭칼국수로 정했다.


먼저 냄비를 올리고 약불에서 닭다리살을 천천히 굽는다.

지글거리며 바닥에 고이는 기름이 이 요리의 맛의 핵심이다.

겉이 노릇해지면 닭고기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썰고 물과 코인 육수를 넣어 끓인다.

여기에 당근, 호박, 양파, 대파를 썰어 넣는다.

간은 홍게간장, 참치액, 소금, 후추로 했다.

마지막으로 칼국수면을 넣고 익을 때까지 끓이면 완성이다.


국물을 조금 남겨두고 밥과 대파, 계란을 넣어 다시 끓인다.

불을 끄고 참기름과 깨를 뿌리면 최고의 디저트인 죽까지 만들어진다.



사실 요리를 하면서 조금 더 진한 맛을 위해 치킨 파우더를 넣을까 말까 고민했다.

하지만 전문가의 레시피를 믿어보기로 했다.

국물을 한 숟갈 떠먹는 순간 그 고민이 얼마나 쓸데없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닭에서 나온 기름과 살의 맛, 채소에서 빠져나온 단맛이 차례로 올라왔다.

충분히 깊은 맛이었고 계속 다음 숟갈을 부르는 맛이었다.


닭고기는 부드러웠고 씹을수록 감칠맛이 입안에 남았다.

어느 정도 배가 불러 죽을 먹을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자 아내는 뭘 고민하느냐며 약해진 내 마음을, 아니 내 위장을 단단히 다잡아 주었다.

죽은 또 한 번 맛이 바뀌었다.

계란이 들어가자 한층 부드러워졌고 참기름은 향긋하게 고소했다.

속이 먼저 따뜻해졌다.

배가 부른데도 숟가락을 멈출 수 없었다.

그렇게 마지막 한 입까지 먹고 나니 마치 보양식을 한 그릇 비운 것처럼 속이 뜨끈뜨끈했다.



식사를 마치고 배를 두드리며 <단어가 품은 세계>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다 예전에는 시멘트를 서양 석회라 하여 '양회'라고 불렀다는 부분을 만났다.

예전이라니 얼마나 예전일까.

할아버지 세대쯤일까 아니면 생각보다 가까운 이야기일까.


그냥 넘길 수도 있었지만 시멘트에 관한 이야기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시멘트 업계에서 30년 넘게 일했고 지금은 한 기업의 임원으로 있는 내 인생에서 가장 가까운 전문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문가는 졸고 있었는지 잠들려다 깬 목소리로 조금 늦게 전화를 받았다.

"아빠! 아빠한테 물어보는 게 제일 정확할 것 같아서 전화했어. 책을 읽다가 보니까 예전에는 시멘트를 양회라고 불렀다던데 그게 얼마나 예전에 쓰던 말이야?"

대답은 즉시 돌아왔다.

"맞아. 시멘트 양회라고 해. 그거 지금도 쓰는 말이야. 최초의 시멘트 이름이 포틀랜드 시멘트야. 영국에 있는 포틀랜드. 서양에서 들어온 거라 양회라고 불러."

"지금도 쓰는 말이구나. 역시 아빠한테 물어보는 게 제일 정확할 줄 알았어. 설날에 내려갈게. 곧 봐요."

"알았어."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잠결에 받았을 텐데도 최초의 시멘트 이름까지 막힘없이 꺼내는 걸 보니 아버지는 역시 전문가였다.


통화는 거기까지였다.
짧았고 군더더기 없는 대화였다.

그런데 그게 대화의 끝은 아니었다.

잠시 후 아버지에게서 메시지가 오기 시작했다.
양회라는 단어의 어원부터 국내 시멘트 산업의 역사, 초창기 공장들의 이름까지 차근차근 도착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 정도까지 알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원래 사람이라는 게 자기 전문 분야를 물어보면 괜히 말이 길어지고 신이 나는 법 아니던가.

나는 검색창도 열지 않았고 AI에게 묻지도 않았다.
그 대신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 선택이 마음에 들어 길게 이어진 메시지 끝에 엄지척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


아내의 후기

닭칼국수
★5.0점
정말 너무 맛있어서 리필해 먹고 죽까지 야무지게 다 먹었습니다.
국물도, 들어간 야채도, 닭다리살도 면도 죽도 하나 빠짐없이 전부 최고였어요.
아직 칼국수면이 남아 있는데 한번 더 해달라고 할꺼예요.
또 먹을 생각에 벌써 설렙니다ㅎㅎ


P.S.

담당 선생님과의 친분으로 내 기계과학 전국대회에 따라와 주셨던 선생님 중 한 분은 대회를 준비하던 때에도 종종 구경하러 오시곤 했다.

그때 내 작품은 용의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그 선생님은 만날 때마다 혓바닥을 달아야 한다며 장난 섞인 농담을 던지셨다.

은상 발표에 누구보다 크게 환호를 보내고 나선 혓바닥만 달았으면 금상이었다며 끝내 아쉬움을 남기셨다.

우리 가족은 지금까지도 그때를 떠올리며 그 선생님을 용혓바닥 선생님이라 부른다.

그날 나를 응원하러 와주셨던 세 분의 선생님 모두 지금은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고 계실지 문득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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