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면, 사태들기름무침, 돼지고기전
어느새 또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
여름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다.
휴가, 여행, 바다, 맥주, 바비큐, 슬리퍼, 선글라스.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단어들이다.
하지만 내게 여름은 그런 계절이 아니다.
나에게 있어 여름은 '버텨야 할 계절'로 분류된다.
일단 나는 땀을 정말 많이 흘린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사우나를 구현할 수 있는 수준이다.
군생활은 경남 창원에서 했다.
창원은 원래도 더운 도시인데, 군대는 그 더위를 한계까지 끌어올린다.
한여름 최고 기온은 40도를 넘나들었다.
남자 12명이 내무반 한 칸에 모여 있으면 체감 온도는 68도였다.
숨 쉴 때마다 김이 나오는 것 같다.
게다가 어느 해 여름, 전력 공급에 문제가 생겼다며 에어컨 사용이 금지됐다.
절망적인 일이었지만 눈물을 흘릴 수는 없었다.
애초에 몸속 수분이란 수분은 이미 다 땀으로 빠져나간 뒤였다.
저녁 점호 시간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흘렀다.
꽤나 자주 당직 간부들은 나를 보며 어디가 아픈지 물었다.
땀이란 게 단지 불쾌함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내 체력까지 슬금슬금 데려간다.
여름엔 출근만 해도 하루 에너지의 절반이 소진된다.
회사 책상 위 작은 탁상용 선풍기는, 여름철 내 생명 유지 장치다.
체력이 떨어지면 잘 먹기라도 해야 한다.
하지만 여름은 나에게 음식 문제까지 안겨준다.
이 계절에 유독 자주 등장하는 어떤 식재료 때문이다.
수분이 많고 값도 저렴해서, 여름 음식의 단골 재료로 사랑받는다.
특히 시원한 음식들에는 빠짐없이 얼굴을 들이민다.
바로, 오이다.
그런데 나는 오이 알레르기가 있다.
오이가 들어간 음식은 당연히 피해야 하고, 실수로 먹게 되면 몸이 곧장 반응한다.
다행히도 실수 자체가 없다.
나는 오이 냄새에 아주 민감하기 때문이다.
눈으로 보기 전에, 입에 들어가기 전에, 그 특유의 풋내가 코끝을 스치기만 하면 온몸의 신경이 곤두선다.
그러니 나에게 오이는 스트레스 덩어리 그 자체다.
한 번은 부서 회식으로 중식당에 간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집은 유난히도 오이를 애용하는 식당이었다.
거의 모든 요리에 오이를 넣는다.
오이의 무궁무진한 응용 가능성을 체험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 집은 크림새우에도 오이를 넣었다.
나와는 태생부터 맞지 않는 식당이었다.
나는 그 회식에서 오이 감별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해 동료들을 놀라게 했다.
열 가지쯤 시킨 메뉴 중에, 오이가 들어간 요리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맞혀냈다.
먹어본 것도, 눈으로 본 것도 아니다.
요리가 내 등 뒤로 들어올 때마다 냄새만 맡고 말했다.
"아, 이번 건 오이가 들어갔네요."
함께 있던 직원들은 하나같이 신기해했다.
그래도 지금은 오이가 식탁 위에 있어도 냄새만 조금 거슬릴 뿐, 식사는 가능하다.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에는 오이가 급식에 등장하는 날엔 아예 급식실 문턱조차 넘지 못했다.
그런데 오이를 못 먹는 덕분에, 뜻밖의 특혜를 누린 시절도 있다.
나는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고등학교를 다녔다.
가장 가까운 버스 정류장까지는 걸어서 30분 걸리는 시골이었다.
매점은 당연히 없었다.
그러니 하루 세 끼는 반드시 급식으로 해결해야 했다.
전교생이 100명 남짓이라 급식소 아주머니들과도 얼굴을 트고 지내는 사이였다.
아주머니들은 몇몇 학생들의 이름도 알고 계셨고, 누구랑 누가 사귀는지도 정보망에 등록돼 있었다.
입학 초기 나는 오이가 들어간 반찬이 나올 때마다 반찬을 떠주시는 아주머니께 정중히 말했다.
"이건... 주지 마세요."
두 달쯤 반복하자, 한 아주머니가 물으셨다.
"이거 맛있는데 왜 안 먹어?"
나는 가볍게 답했다.
"저 오이를 못 먹어요."
그리고 얼마 뒤, 탕수육이 나왔다.
탕수육 소스에는 슬쩍슬쩍 오이가 들어간다.
나는 늘 하던 대로 말했다.
"이건... 안 받을게요."
그 순간, 아주머니 한 분이 다급하게 외쳤다.
잠깐잠깐!!
오이총각 거 따로 만들어놨어!!
그날부터 나는 급식실에서 '오이총각'이라 불리게 되었다.
오이가 들어가는 반찬이 나오는 날이면, 나는 따로 만들어진 스페셜 오이 프리 반찬을 받았다.
그리고 그 반찬은 대개 양도 넉넉했다.
아주머니들께서는 "친구들이랑 나눠 먹으라"며 한가득 퍼주셨다.
그래서 오이가 들어간 특식이 나오는 날이면, 급식실에선 친구들 간의 눈치 싸움이 벌어졌다.
누가 오이총각 옆자리에 앉을 것인가!
나는 의도치 않게 오이 프리 고기와 튀김 덕분에 급식실 인기인이 되었다.
아니 정확히는 급식판 위의 음식이 나보다 더 인싸였다.
이렇다 보니, 우리 집 식탁에서는 애초에 오이를 볼 일이 없다.
그런 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로 요리가 시작된다.
하지만 외식까지 완벽하게 통제할 수는 없는 법이다.
아무리 오이를 빼달라고 거듭 요청해도, 실수하는 식당은 꼭 있다.
특히 냉면집.
오이를 고명으로 올려놨다가, 막판에 급히 걷어내고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미 늦었다.
그 특유의 향이 냉면에 이미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단지 고명을 걷어냈다고 해서 아무 일도 없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오이가 필수로 들어가는 음식은 웬만해선 시키지 않는다.
오이를 못 먹는다는 건 여러모로 불편하지만, 특히 여름이 되면 음식의 자유가 현저히 줄어든다.
덥고 지치고 힘든데, 심지어 시원한 음식조차 마음대로 못 먹는 것이다.
그야말로 이중고다.
하지만 나는 탕수육도 좋아하고, 짜장면도 좋아하고, 물회도 사랑하고, 쫄면에 열광한다.
그리고 여름엔 무엇보다 냉면을 미친 듯이 먹고 싶은 날이 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그래서 내가 직접 냉면을 만들기로 했다.
먼저 소고기 사태를 준비한다.
20분에 한 번씩 물을 갈아주며, 한 시간 동안 핏물을 뺀다.
그다음, 핏물을 뺀 고기를 끓는 물에 2분간 데친다.
그러면 놀라울 정도의 거품과 불순물이 올라온다.
그 물은 버리고, 고기도 한 번 깨끗이 씻는다.
그리고 새 물에 넣어 다시 삶기 시작한다.
이번엔 약간의 거품만 올라오는데, 그것만 걷어내고 중 약불에서 2시간 동안 푹 삶는다.
중간중간 물이 줄어들면 보충도 해줘야 한다.
다 삶은 육수는 소금으로 살짝 간을 한 뒤, 소고기 다시다와 미원을 소량 넣어 감칠맛을 끌어올린다.
고기는 건져 따로 두고, 육수는 완전히 식힌 뒤 냉장고에 넣어 차갑게 만든다.
이때를 틈타 동치미는 냉동실로 보내 좀 더 차갑게 만들어둔다.
3시간 정도면 적당하다.
시간이 지나 육수를 꺼내 보면, 표면에 하얗게 굳은 기름이 조금 떠 있다.
그걸 살살 걷어내 주고, 동치미와 1대 1 비율로 섞는다.
이렇게 맑고 깨끗한 냉면용 육수가 완성된다.
짭조름하고, 새콤하고 시원하다.
고추장, 간장, 고춧가루, 설탕, 올리고당, 다진 마늘, 참깨, 들기름을 적당히 섞어 양념장도 준비한다.
면은 시판용 냉면을 사용했다.
냉면 사리까지 직접 뽑을 정도의 능력은 나에게 없다.
면을 삶은 뒤, 얼음물에 여러 번 헹궈 전분기를 깨끗이 씻어낸다.
그리고 차갑게 식혀둔 육수를 부어준다.
동치미 속 무와 배추를 고명으로 얹고, 얇게 썬 고기와 삶은 계란을 살포시 올린다.
양념장은 취향껏 추가하면 된다.
이제 마침내 메뉴판 없는 식당표 우리 집 냉면을 맛볼 수 있다.
고명으로 사용하고 남은 고기는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소금, 들기름, 쪽파를 넣고 조물조물 무친다.
고소한 향이 올라오며, 사태들기름무침이 모양을 갖춘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 없다.
냉면에 어울리는 또 다른 친구가 있으니, 바로 전이다.
먼저 다진 돼지고기에 소금과 후추로 밑간을 한다.
마늘, 간장, 설탕, 계란까지 넣고 고루 섞어준다.
농도는 전분으로 잡는다.
달군 팬에 약불로 천천히 속까지 잘 익혀내면 돼지고기전도 완성이다.
준비한 음식을 모두 차려내고, 아내와 함께 맛보기 시작한다.
사실 냉면은 '사 먹는 음식'이다.
집에서 해 먹는다고 해도, 보통은 밀키트 형식으로 된 걸 조리해 먹는다.
직접 육수를 낸다는 건 상상만 해도 번거로운 일이다.
하지만 그만큼의 수고를 들일 만한 가치가 있다.
조미료도 안 쓴 건 아니지만, 딱 이 정도면 봐줄 만하다 싶은 수준만 넣었다.
건강하면서도, 깔끔하며 꽉 찬 맛이다.
직접 만든 양념장도 맛집 못지않다.
적당히 매콤하고, 은근히 감칠맛 돈다.
자꾸만 국물에 추가하려 손이 간다.
한입, 두 입 먹을수록 속이 시원해진다.
하루의 피로가 싹 풀리는 기분이다.
아내 역시 감탄하며 먹는다.
육수까지 홀짝홀짝 다 마시며 맛의 칭찬을 날려준다.
특히 돼지고기전에 홀딱 반했다.
상을 차릴 때부터 전의 냄새가 피어오르자 아내의 눈빛이 이상하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한 입 먹고는 "이거 자주 해줄 수 있어?"라고 물었다.
말투는 가볍지만, 눈은 진지했다.
나는 오랜만에 아내의 진실의 미간을 목격했다.
아무래도 2화의 치킨처럼, 주기적으로 아내에게 공급해줘야 하는 요리가 하나 더 늘어난 것 같다.
어릴 적, 가족과 외식을 하면 할머니는 언제나 나를 끔찍이도 챙기셨다.
오이가 들어가는 음식이라면 꼭 빼달라고 식당 종업원분께 아주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얘, 이거 먹으면 큰일 나요!"
그때는 살짝 민망했지만, 지금은 그 모든 순간이 고맙다.
그 감사함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오늘 사용한 동치미도, 할머니가 직접 담가 보내주신 것이다.
결혼을 얼마 앞둔 어느 날, 할머니께서 아내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집에선 오이 못 먹겠네?"
그러자 아내는 아주 쿨하게, 한 치 망설임도 없이 웃으며 말했다.
"안 먹으면 되죠!"
그 순간,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결혼하기로 잘 결정했다!'
지금은 아내가 식당에서 나를 챙겨준다.
식당에 가면 메뉴판을 펼치자마자 나보다 먼저 재료를 훑어본다.
그리곤 직원에게 또박또박 요청한다.
"이거 혹시 오이 들어가나요? 꼭 빼주세요. 진짜 꼭이요."
가끔은 내가 깜빡할 때도 있다.
하지만 아내는 절대 놓치지 않는다.
늘 꼼꼼하고, 빠짐없이 챙긴다.
그리고 요청을 마친 뒤엔 '나 잘했지?' 하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본다.
그 표정은 꼭 받아쓰기 백 점 맞고, 엄마 칭찬 기다리는 초등학생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표정이 너무나 귀엽다.
가끔은 그 표정이 보고 싶어서, 일부러 오이가 들어갈 만한 음식점에 가보고 싶어질 정도다.
아내의 후기
냉면
★4.5점
건강하고 시원한 육수 한 모금에 퇴근의 피로함이 싹 가셨습니다~
신랑표 특제 양념 소스를 가득 넣어 먹었는데 일품이었습니다.
여름 가기 전에 또 먹고 싶은 너무 맛있는 냉면이었습니다 ^^
사태들기름무침
★3.5점
들기름의 고소함으로 무쳐낸 고기!
냉면과 곁들여 먹기 좋았습니다~
돼지고기전
★5.0점
만점!
쫀득한 전분 튀김옷에 다진 돼지고기의 조화가 예술이었습니다.
식탁에 갔을 때 너무 맛있는 냄새가 나서 놀랬는데 맛은 더욱 놀라움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식사하며 자주 해달라고 졸랐네요ㅎㅎ
P.S.
나는 오이를 참, 견디기 힘들다.
심지어 숫자 '52'만 봐도 마음이 살짝 불편해질 정도다.
아내와 함께 초콜릿 전문점에서 수제 초콜릿을 맛보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내 브런치 프로필의 구독자 수가 딱 52명이었다.
그걸 보고는 아내가 말했다.
"이건 내가 없애줄게."
그리고는 주저 없이, 기꺼이 53번째 구독자가 되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