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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먹는다는 것

오리주물럭, 계란국

by 퉁퉁코딩

잠이 오지 않는 새벽이었다.

나는 평소 잘 마시지도 않는 커피를 세 잔이나 들이켰고, 아내는 무려 네 시간 동안 낮잠을 자버렸다.

그 바람에 새벽 두 시가 넘어서까지 우리 집 거실은 대낮처럼 환했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있었다.

딱히 볼 것도 없는 TV를 멍하니 바라보며 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산책 갈래?

새벽 두 시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말이었다.

그런데 아내는 놀랍도록 또렷한 눈으로 대답했다.

좋지

그렇게 우리는 슬리퍼에 발을 껴 넣고, 집 근처 공원으로 야간 산책을 나섰다.

거리는 조용했고 사람이라곤 없었다.

그런데 공원에 들어서자 뜻밖에도 또 다른 부부 한 쌍이 산책을 하고 있었다.

우리보다 조금 연배가 있어 보였다.

아마 그들도 우리를 보며 '저 젊은 부부는 왜 이 시간에...'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괜히 서로 민망하지 않도록 암묵적으로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서로의 새벽을 존중하는 의미였다.



10분 정도면 한 바퀴를 돌 수 있는 크지 않은 공원이었다.

작은 놀이터도 있어 낮에 오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이다.

하지만 조용한 새벽의 공원은 또 다른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밤벌레 우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한 바퀴를 금세 돌고, 두 번째 바퀴를 반쯤 걸었을 무렵, 공원 건너편에 불이 켜진 24시간 무인 라면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전에 지나가며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언젠가 아내가 저곳에서 라면을 한 번 먹어보고 싶다고 말했었다.

기계가 끓인 라면이 어떤 맛일지 호기심만 간직한 채로 지나쳤던 곳이었다.


지금은 새벽 두 시 반이다.

약간 출출하고, 딱히 할 일도 없고, 기분도 묘하게 들떠 있는 상태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가보겠어'라는 생각에 우리는 곧장 라면 가게로 향했다.

내부는 무척 단출했지만, 라면 한 그릇 먹기엔 더할 나위 없었다.

다양한 라면이 진열돼 있었고 옆엔 각종 무료 토핑도 놓여 있었다.

냉장고엔 물, 음료수, 계란, 그리고 약간의 냉동식품들까지 들어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십여 년 전 그 느낌이 몰려왔다.

불침번을 막 마치고, 당직사관에게 라면 취식 허락을 받은 뒤 식당으로 향하던 바로 그 느낌말이다.

어느새 나는 PX 감성까지 떠올리며 냉장고에서 냉동 치킨을 꺼내고 있었다.

각자 라면을 골라 취향대로 토핑을 올린 뒤, 라면 기계에 올렸다.

그리고는 마치 신병을 PX에 데려가 냉동식품 익히는 법을 알려주듯 아내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 잘 봐. 봉지는 아주 살짝만 뜯고, 먼저 2분 돌려. 그다음 꺼내서 흔들어. 이게 중요해. 그리고 반대로 넣어서 다시 2분. 그래야 골고루 익는다."

군 시절, 무수히 많은 실전 경험을 통해 익힌 냉동식품 마스터 클래스였다.

나는 은근히 뿌듯했지만 아내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냥 알아서 잘 익히라는 듯했다.

눈은 라면 기계에만 향해 있었고 계란을 넣을 타이밍만 노리고 있었다.

역시, 아내와 군대 감성을 나누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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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라면이 다 익었다.

한 젓가락 크게 떠서 후후 불고 맛을 보았다.

이상하다.

각종 토핑에 계란까지 넣었고, 물도 정량대로 맞췄다.

김치도 챙겼고, 냉동치킨까지 곁들였다.

조리법도 기계에 적힌 대로 정확히 따랐다.


그런데 그 맛이 아니다.

예전 군대에서 봉지째 뜨거운 물에 담가 익힌 건지 불린 건지 모르게 먹던 뽀글이보다도 못하다.

냉동치킨도 마찬가지다.

내가 정말 이걸 맛있다고 생각했었나 싶을 정도다.

불침번은 냉동치킨이 섰는지, 퍽퍽하고 힘도 없다.

어쩐지 오늘 닭이 가장 의욕이 없다.


그 시절엔 이 새벽에 라면을 두 개, 심지어 세 개도 거뜬히 먹었다.

지금은 하나만 먹어도 배가 부르다.

배가 찼다기보단, 그냥 그 시절처럼 허기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아쉬운 마음에 아내에게 말했다.

"그때 그 맛이 안 나."

하지만 아내는 활짝 웃었다.

"난 너무 좋은데? 이 시간에 산책하는 것도, 둘이서 라면 먹는 것도 다 재밌어. 산책하자고 말해줘서 고마워."


그 말을 듣는데, 속이 좀 뜨끈해졌다.

라면으로는 채울 수 없는 뜨끈함이다.

그땐 가진 것도 없었고, 미래도 불투명했다.

잠조차 마음대로 잘 수 없었다.

자다 말고 일어나 불침번, 겨우 몇 시간 다시 자고 눈뜨면 아침 구보다.

일주일에 한두 번 가는 PX가 유일한 낙이던 시절이었다.

그때 먹던 라면은, 배만 채운 게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한 사람과 함께 걷고, 함께 웃고, 함께 배부르다.

허기 이상을 채우던 그 시절의 라면이 돌아온다 해도, 지금의 이 감정을 대신하긴 어려울 것이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문득 군대에서 맛있게 먹었던 메뉴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소위 '짬이 좀 찼다' 싶은 병장쯤 되면, 아침은 과감히 포기하고 수면을 선택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병장들조차 눈을 비비고 일어나 밥줄을 서게 만드는 아침 식단이 있었다.

그 메뉴는 소시지 야채볶음, 미역국, 김, 김치다.

누가 봐도 평범한 구성이지만 이상하게 그 조합은 무적이었다.

밥을 두 번 퍼먹게 되는 구성이었다.


점심으로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던 메뉴도 있었다.

바로 꼬리곰탕과 오징어젓갈이다.

꼬리곰탕이 나오는 날이면 고기 한 점이라도 더 먹기 위해 점심시간 시작과 동시에 병사들이 전속력으로 식당으로 돌진했다.

그날만큼은 누구도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


그리고 빠지면 섭섭한 최고의 메뉴가 있다.

말년 병장도 식판을 부여잡고 국물까지 싹싹 비벼 먹게 만든다.

바로 오리주물럭이다.

제육볶음이 남자들이 좋아하는 메뉴로 가장 유명하지만, 군대에선 의외로 오리주물럭이 더 인기였다.

오리주물럭 양념에 밥을 비비면 꿀떡꿀떡 잘도 넘어간다.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운 뒤엔 배식구 근처를 어슬렁거리게 된다.

남은 고기는 없는지, 고기가 없다면 양념만이라도 더 받을 수는 없는지 눈치를 살핀다.

갑자기 그 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늘은 오리주물럭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나는 취사병 출신은 아니기에 정확한 군대 레시피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최대한 기억을 되살려 그 시절의 맛을 재현해 보기로 했다.

먼저 오리 로스에 된장, 고추장, 고춧가루, 간장, 후추, 설탕, 생강, 마늘을 넣고 조물조물 무쳐준다.

그다음 웍에 기름을 살짝만 두르고, 채 썬 양파를 볶는다.

양파가 투명해지면 양념한 오리를 투입한다.

볶다 보면 국물이 제법 생긴다.

걱정할 필요 없다.

이 국물이야말로 오리주물럭의 핵심이다.

그 순간, 우리 집 주방은 잠시 취사장이 된다.

내 손놀림에는 이미 다 빠져버린 군기가 다시 돌기 시작한다.

오리가 익어갈 무렵, 채 썬 파와 깻잎, 청양고추를 넣는다.

부추도 추가하고 들깻가루로 마무리한다.

생각보다 금방 요리는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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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들일 국은 계란국으로 결정했다.

오리주물럭의 양념맛을 해치지 않는, 맑은 국물이 필요했다.

물에 간장, 소금, 후추, 미원을 넣고 끓인 뒤, 잘 푼 계란을 천천히 부어준다.

이때 중요한 건 젓지 않는 것이다.

젓는 순간, 계란국이 아닌 계란 부스러기 수프와 마주하게 된다.

계란이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할 때, 잘게 썬 파와 부추를 넣고 마무리한다.

화려하진 않지만, 존재감은 분명하다.

이렇게 해서 오늘의 프리미엄 군대 메뉴 오리주물럭 정식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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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을 차리고 식사를 시작한다.

묘하게 흥분된다.

맛을 보려는 찰나, 아내가 젓가락으로 오리고기를 집어 든다.

"잠깐만!"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외친다.

"이건 그렇게 먹는 거 아니야. 이건 말이지, 숟가락으로 양념이랑 같이 푹 퍼서 밥에 비벼 먹는 거야."

이건 국룰, 아니 군룰이다.

나는 즉석에서 시범을 보여준다.

고기 한 점에 양념 국물을 푹 퍼서, 국방색의 혼을 담아 밥 위에 올리고 쓱싹쓱싹 비벼 맛을 본다.


나는 속으로 감격한다.

약간 더 매콤했어도 좋았겠지만, 군대에서 먹던 바로 그 맛이 난다.

아내도 따라 해 본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인다.

군필자와 비군필자의 입맛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그땐 사실 양념 맛만 느끼고 먹었던 것 같다.

이제는 쫄깃쫄깃한 오리의 식감도 느껴지고, 깻잎 향도 그윽하게 다가온다.

오리를 세 점이든 네 점이든 한 번에 퍼 먹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식판도, 배식 담당도 없다.

시원한 맥주까지 꺼내 들었다.

군대에선 상상도 못 했던 호사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아내가 식사 중간, 밥이 남을 것 같다며 내 밥그릇에 슬쩍 두 수저를 덜어 넣는다.

그리고는 밥그릇을 비운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새로 밥을 조금 더 담아 온다.

"뭐야, 나한테 먹던 밥 주고 새 밥 먹는 거야?"

내가 웃으며 묻자, 아내는 민망한 듯 웃으며 말한다.

"맛있네."

그 시절의 감성은 함께 나눌 수 없어도, 그 시절의 입맛은 충분히 나눌 수 있었던 식사였다.



제대하던 날, 전역식에서 후임들에게 한 말이 있다.

"이놈의 부대는 정이 안 가는데, 너네한테는 정이 좀 가는 것 같다."

왜 그랬을까?

돌이켜보면, 아마도 오랜 시간 함께 밥을 먹던 사이여서 아닐까 싶다.

눈치 보며 반찬을 집어 먹고, 고기 한 점에 행복해하던 그 소소한 반복들이 어느새 정이 되었을 것이다.


아내와 알고 지낸 지도 벌써, 군대를 다섯 번은 전역하고도 남을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함께한 식사는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더 많을 정도로 많다.

그리고 앞으로도,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더 많은 식사를 함께하게 될 것이다.


같이 먹는 밥이라는 게 참 신기하다.

아무 말 없이도 마음을 전하고, 같은 반찬을 집으며 웃음을 나누게 만든다.

그 시절의 짬밥이 생각나는 건 단순히 맛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같은 식판을 들고 함께 먹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더 기억에 남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 집밥이 특별한 이유도, 함께 먹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입맛을 나누고, 하루를 나누고, 정을 쌓아간다.

그건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다.


아내의 후기

오리주물럭
★4.7점
신랑이 군대에서 정말 맛있게 먹었다던 오리주물럭!
깻잎 향이 특히 별미였습니다.
풍부한 양념 국물에 밥을 비벼 부드럽고 쫄깃한 오리고기와 함께 먹으면 밥 2 공기 뚝딱입니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계란국
★4.5점
평소에도 자주 먹는 계란국이지만, 오늘은 유독 맛있게 느껴졌습니다.
뭔가 더 깔끔하달까요?
오리주물럭과의 조합이 좋아서 더 맛있게 느껴진 것 같기도 해요.
궁합이 아주 좋은 국이었습니다!


P.S.

새벽 산책은 생각보다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

모기와의 전쟁에 가까웠다.

벤치에 앉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모기에 뜯기지 않기 위해 우리는 계속 걸을 수밖에 없었다.

라면 가게라고 사정이 다르진 않았다.
매장 안에는 모기와 날파리가 생각보다 많았다.
결국 라면을 먹던 도중, 날파리 한 마리가 내 라면 국물에 순직하고 말았다.

모기에게 뜯기고, 날파리에 뺏긴 라면 한 입이 아쉽긴 했지만 이상하게 기분은 참 좋았다.

그리고 아내의 기억 속 그날은 분명히 로맨틱한 새벽 산책으로 저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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