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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째 불 앞에 선 남자들

짬뽕, 짬뽕밥

by 퉁퉁코딩

나는 메뉴판 없는 우리 집 식당의 주인이다.

사업자 등록은 안 받았지만 그래도 주인은 나다.

직원도, 알바도, 주방보조도 없다.

사장도 나고 셰프도 나다.

이 집의 유일한 단골손님인 아내를 위한 요리는 기본이다.

가족이 와도, 친구가 와도 누가 오든 요리는 내가 맡는다.



남편이 요리를 혼자 도맡는 가정은 흔치 않은 것 같다.

적어도 내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그렇다.


우리 할아버지 세대에는 남자아이가 부엌 근처에만 가도 "고추 떨어진다"는 경고를 받았다.

그 시절 부엌은 출입 시 남성성 손실이 발생하는 구역이었다.


조금 시간이 흘러, 부모님 세대가 되자 분위기가 약간은 달라졌다.

요리는 여전히 여자의 일이라는 인식이 강했지만, 남편이 김치볶음밥이나 파스타쯤은 해줄 수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쯤은 가족을 위해 남편이 요리를 하기도 했다.

남편도 슬슬 '필살기 요리' 하나쯤은 가지기 시작했다.


우리 세대쯤 오니 분위기는 정말 많이 달라졌다.

남편이든 아내든, 더 좋아하고 더 잘하는 사람이 요리를 하면 된다는 합리적인 생각이 퍼졌다.

심지어 둘 다 요리하기 싫어도 괜찮다.

배달앱, 밀키트 심지어 반찬 구독 서비스까지 있다.

먹는 걸 싫어하진 않으니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이런 시대에도 남편이 요리를 온전히 책임지는 집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자주 듣는 말들이 있다.

1위: "결혼하기 전에도 요리하는 거 좋아하셨어요?"

2위: "아내분, 전생에 나라를 구하신 거 아니에요? 저도 다음 생엔 요리 잘하는 남자랑 결혼할래요."

3위: "유부남의 공공의 적이시네요..."

1위는 놀람, 2위는 부러움, 3위는 분노(?)가 섞여 있다.



요리하는 걸 원래 좋아했냐는 질문을 들을 때마다, 다시금 남자가 요리를 한다는 게 흔한 일은 아니라는 걸 실감한다.

하지만 나에게 요리는 '왜 좋아하게 되었는가'보다는 '왜 안 좋아할 이유가 없었는가'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만큼 자연스러웠다.


어릴 때부터 우리 집엔 부엌에 들어가는 남자들이 있었다.

먼저, 우리 할아버지다.

자주 요리를 하시는 건 아니었지만 간단한 찌개나 라면 정도는 뚝딱 끓일 줄 아신다.

고기를 볶는 할머니 옆에서 "지금 설탕 넣어?" 하고 물어보며 양념을 툭툭 넣기도 하셨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건, 며느리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가 집에 놀러 오시면 가끔 직접 밥상을 차려주셨다는 점이다.

물론 메뉴가 라면일 때도 있었지만, 그 시절 그 세대의 남성으로선 꽤 진보적인 모습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할아버지는 요리를 즐기셨다기보다는 할 수 있는 건 한다는 마음으로 정도로 부엌에 계셨던 것 같다.


다음으로, 우리 아버지는 요리를 할 수 있다는 수준을 넘어서 즐기는 분이다.

어머니도 자주 요리하시지만, 아버지도 능숙하게, 그리고 자주 주방에 출입하신다.

가끔은 이렇게 선언하신다.

"오늘 부엌은 내 구역이다. 아무도 출입 금지!"

그런 날은 정말로 가족 누구도 부엌 근처에 얼씬도 못 한다.

식사 준비는 물론, 식후 디저트부터 설거지까지 모두 아버지 손에서 끝난다.


내가 "원래 요리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꼭 꺼내는 이야기가 있다.

이 얘기만 하면, 사람들은 내가 왜 요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는지 한 번에 이해한다.

때는 내가 중학생이던 시절이다.

아버지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아침밥을 차려놓고, 7시 전에 출근하셨다.

출근길엔 어머니와 나, 그리고 동생을 하나씩 깨우시고 조용히 현관문을 닫고 나가셨다.

우리는 졸린 눈을 비비며 식탁에 앉았다.

그 앞엔 언제나 아버지가 준비한 3인분의 아침 밥상이 놓여 있었다.

정말 놀라운 건 그 세 밥상의 메뉴가 전부 달랐다는 사실이다.


아버지는 가족 각자의 입맛을 꿰뚫고 계셨다.

나는 밥과 국이 있는 밥상을, 동생은 빵이나 시리얼을, 어머니는 속이 편한 음식을 선호했다.

그렇게 매일 아침, 아버지는 맞춤형 아침 밥상을 세팅해 놓고 출근하셨다.

입맛 분석, 메뉴 기획, 조리 실행, 퇴장까지 완벽한 프로세스였다.

요즘 시대였으면 개인화 마케팅이니 AI 추천 시스템이니 하며 스타트업 CEO라도 되셨을 분이다.


어릴 적 보던 TV 프로그램 속 요리하는 남편의 모습은 그다지 신기하지 않았다.

"와, 저런 남자가 어디 있어요?"라며 출연진들이 놀라며 감탄할 때, 솔직히 나는 좀 의아했다.

호들갑이라고 느껴질 때도 있었다.

우리 집은 더 했으니까 말이다.



아버지는 가끔 새로운 요리에도 도전하셨다.

대부분 맛있었다.

약간은 거칠고 때로는 자극적이었지만, 소박하면서도 손맛이 살아 있는 그런 맛이었다.

그런데 딱 한 번, 내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는 심지어 아버지 본인도 실패를 인정하셨던 요리가 있다.

바로 짬뽕이었다.


그날도 아버지는 부엌에서 뭔가를 뚝딱뚝딱거리기 시작하셨다.

칼질, 볶는 소리, 물 끓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아버지표 짬뽕이 당당하게 등장했다.

비주얼은 제법 근사했다.

국물 색도 그럴싸하게 빨갰고, 건더기도 제법 풍성했다.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국물을 한 숟갈 떴다.

그리고... 멈칫했다.

맛은 묘하게 복잡했다.

일단 확실한 건, 짬뽕의 맛은 아니었다.

얼큰한 맛이 나올 줄 알았는데, 그 얼큰함은 간장의 짠맛에 눌려서 사라져 있었다.

결국 그 짬뽕은 가족 모두의 젓가락이 점점 느려지다가, 끝내 다 먹지 못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날 이후로 아버지는 짬뽕만큼은 다시 시도하지 않으셨다.

짬뽕은 아버지에게도 어려운, '집에서는 만들 수 없는 요리'로 내 머릿속에 단단히 각인됐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은 지금과는 달랐다.

레시피란 건 가족끼리 전수되거나, 입소문을 파고 퍼지는 것이었다.

아마 아버지는 어디선가 어렴풋이 들은 기억을 더듬거나, 순수 창작의 힘으로 짬뽕에 도전하셨을 것이다.

요리라기보다는 발명에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대는 바뀌었다.

지금은 '짬뽕 만들기'라고 검색하면 수십, 수백 가지 레시피가 펼쳐진다.

영상도 있고, 블로그도 있고, 대체 재료까지 친절하게 알려주는 댓글도 달려 있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로 이사 온 지 1년이 조금 넘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집 근처에서 정착할 만한 짬뽕 맛집을 찾지 못했다.

얼큰하긴 한데 감칠맛이 부족하거나, 건더기는 풍성한데 국물이 맹맹하다.

뭔가 하나씩 미묘하게 부족하다.

이럴 바엔 차라리 내가 만들어보자 싶었다.

어린 시절 내 머릿속에 가장 어려운 요리로 남았던 그 짬뽕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먹는 사람의 입맛을 고려하기로 했다.

나는 짬뽕, 아내는 짬뽕밥으로 준비한다.

같은 국물이지만 다른 방식으로 커스터마이징 한다.


먼저 팬에 기름을 두르고, 돼지고기 안심을 썰어 넣어 볶는다.

간장 한 숟갈 정도를 넣어 밑간도 살짝 더해준다.

고기가 익기 시작하면, 파와 다진 마늘을 넣고 함께 볶아 기름에 향을 입힌다.

야채는 양파, 양송이버섯, 애호박, 목이버섯, 백목이버섯, 청경채를 준비했다.

야채와 고춧가루를 넣고 재료에 빨간 기운이 골고루 배어들 때까지 열심히 볶는다.

이 과정이 짬뽕 맛의 운명을 좌우한다.

조금 뻑뻑하다 싶으면 기름을 살짝 추가하면 된다.


재료들이 고르게 볶아졌다면, 물을 재료가 겨우 잠길 정도로만 넣는다.

이때 해물을 투입한다.

오징어, 홍합, 바지락, 새우를 사용했다.

국물에 바다 향이 올라온다.

소금, 굴소스, 치킨파우더, 백후추로 간과 감칠맛을 잡는다.

굳이 흑후추 대신 백후추를 쓴 이유는, 완성된 국물에 까만 후추 가루들이 둥둥 떠다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보기에 깔끔한 게 더 맛있어 보인다.


물을 조금씩 세 번에 나눠 넣으며 졸인다.

이렇게 해야 국물이 깊어진다.

서로 다른 재료들이 한데 어우러져 짬뽕다운 짬뽕이 완성되어 간다.

중화면은 미리 삶은 뒤 찬물에 여러 번 헹궈 쫄깃하게 준비해 둔다.

그 위에 국물을 부어주고 부추를 올려주면 짬뽕 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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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국물은 다른 냄비에 덜어 뜨거운 물에 30분간 불려둔 당면을 넣고 잠깐 끓인다.

계란도 풀어 조금 더 부드러운 맛으로 조절한다.

밥을 곁들이면, 짬뽕밥도 완성이다.

그림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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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을 보니, 요즘 중국집에선 좀처럼 만나기 힘든 깊은 맛이 난다.

재료를 아낌없이 넣은 덕분인지, 국물은 진하고 묵직하다.

특히 어릴 적, 시골의 오래된 중국집에서 맛보았던 채수 베이스의 짬뽕 맛이 떠오른다.

야채와 해물에서 우러난 자연스러운 감칠맛이 혀끝을 타고 부드럽게 퍼진다.


요리 중간에 청양고추를 넣어 조금 더 매콤하게 만들어볼까 고민했었다.

넣었어도 괜찮았겠지만 지금 이대로도 충분하다.

얼큰하지만 자극적이지 않은 딱 좋은 맛이다.


아내도 밥을 한 숟갈 퍼 국물에 푹 적시더니 맛있게 먹는다.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전해진다.

이건 정말 잘 만들었다


다양하게 들어간 해물을 골라 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홍합, 오징어, 새우, 바지락이 입 안에서 하나씩 제 역할을 해낸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해장되는 기분이 든다.

속이 개운해지고 든든하다.

무언가를 잘 해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뿌듯함이 한 젓가락마다 묻어나는 식사였다.



식사를 마치고 아내가 물었다.

오빠는 중국집 가면 거의 짬뽕만 먹지?


나는 대답했다.

거의 그렇지

짜장과 짬뽕이 있다면 나는 열 번 중 아홉 번은 짬뽕을 고른다.
어릴 때부터 늘 그랬다.


그리고 이제야 알 것 같다.
아버지는 나와는 반대로 열 번 중 아홉 번은 짜장을 드시는 분이다.
그런 아버지가 정확한 레시피도 없이 짬뽕을 만들었던 이유를 말이다.


아마 내가 좋아하니까.
그거 하나로 그 어려운 요리를 해보셨던 게 아닐까 싶다.

30대가 된 나는 이제야 그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리고 문득 생각한다.
언젠가 나도,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어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 밥상을 차리는 날이 올까?

그날이 오면 나는 어떤 요리를 하게 될까?

어쩌면 다시 짬뽕을 끓이게 될지도 모르겠다.

짬뽕은 이제 내게 '가장 어려운 요리'에서 '누군가를 가장 깊이 생각하게 되는 요리'가 되었다.


아내의 후기

짬뽕, 짬뽕밥
★4.7점
정말 맛있었습니다!
중화요리 식당보다 재료가 더 많이 들어간 것 같았어요 ㅋㅋㅋ
저는 짬뽕보단 짬뽕밥 파라서 신랑이 밥에 더 어울리도록 만들어줬다고 하더라고요.
감동이었습니다.
해산물도 가득, 야채도 가득해서 정말 행복했어요.
다양한 재료들이 녹아든 깊은 맛의 짬뽕 국물에 밥을 푹 적셔 먹으니, 그야말로 환상적이었습니다!


P.S.
요리에 그다지 흥미 없는 아내는 우리 아이가 태어나면 이유식만큼은 꼭 직접 만들어보고 싶다고 말한다.

과연... 정말 그렇게 할까?

모성애라는 건, 요리를 싫어하는 마음도 뛰어넘게 만드는 것일까?

만약 정말 아내가 정성 들여 이유식을 만드는 모습을 내가 보게 된다면 나는 어떤 기분일지 궁금하다.

너무 아름다운 모습이라며 감탄할지, 아니면 나한테는 아무것도 안 해줬으면서라고 아기한테 질투하는 못난 아빠가 될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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