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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를 넓히는 새로운 경험

양배갈비수육, 양전골

by 퉁퉁코딩

작년 크리스마스 무렵이었다.

점심시간, 직장 동료가 딸의 어린이집에서 받은 재미있는 안내문이 있다며 스마트폰 사진을 보여주었다.

화면 속 안내문은 크리스마스 파티 공지였다.

산타가 나눠줄 선물을 잘 포장해 어린이집으로 보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 안내문은 쉽게 읽히지 않았다.

중간중간 영어와 한자가 기묘하게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수수께끼를 풀듯 읽어야 했다.

알고 보니, 글씨를 읽을 줄 아는 아이들이 이 안내문을 보고 '산타 선물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선생님이 써둔 비밀 암호였다.

어린이집의 안내문은 아이들의 동심을 지키기 위한 은밀한 비밀문서였던 것이다.



그 안내문을 보는 순간, 어린 시절 내가 기억하는 첫 크리스마스 선물이 문득 떠올랐다.

유치원에 다니던 어느 날 엄마가 집 근처 서점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리고 읽고 싶은 책 두 권을 고르라고 했다.

나는 로봇이 악당을 물리치는 책과 어린이 탐정이 사건을 해결하는 추리 만화를 골랐던 것 같다.

행복하게 책을 고르고 집으로 돌아오자 엄마는 두 권 중 먼저 읽고 싶은 책을 고르라고 했다.

내가 책을 집어 들자 엄마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 책은 엄마가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야."

그리고 남은 한 권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이건 유치원에서 산타할아버지가 줄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사실상 산타라는 존재는 없다는 선언이었다.

그 시절 엄마에게 동심을 지켜주는 낭만 까진 없었다.


엄마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책을 골라준 건, 내가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와 서점에 가면 책을 한 권씩 사주셨고 나는 그 책을 적어도 열 번은 읽었다.

특히 신화, 추리, 과학, 역사 분야의 책들을 좋아했다.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많은 책을 읽었던 때는 군대였다.

훈련소를 수료하고 자대에 배치받아 적응 기간이 끝난 뒤 약 18개월 동안, 병영도서관의 책을 80권 정도 읽었다.

휴가와 외박 외에는 도서관이 군 생활의 유일한 탈출구였던 셈이다.

그런데 어린 시절 집에서 편하게 읽은 책들은 장면과 대사가 또렷이 기억나지만, 군대에서 읽은 책들의 내용은 머릿속에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독서에서 중요한 건 읽은 권수가 아니라는 말이 있다.

아무 걱정 없이 즐겁게 읽은 책과, 철조망 안에서의 도피로 읽은 책은 집중의 밀도가 분명히 달랐던 것이다.



이런 내가 얼마 전, 책에 푹 빠져들고 시야까지 넓혀주는 새로운 경험을 했다.

책을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이상하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유형의 장소가 있었다.

바로 '독립서점'이라 불리며 카페 역할까지 겸하는 공간이다.

아내 역시 책을 좋아한다.

우리는 각자 책을 들고 카페에 가서 조용히 읽은 적이 많다.

여행을 갈 때도 짐 속에 책 한 권씩 넣어 가 호텔에서 쉬는 시간에 읽곤 한다.

한 번은 여행에 관한 에세이를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며칠에 걸쳐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읽은 적도 있다.

나는 혼자 카페를 잘 가지 않는 편이지만, 아내는 책과 카페를 모두 좋아하니 함께 가볼 만했다.

그런데도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그 공간에 단 한 번도 발을 들인 적이 없었다.

그러다 며칠 전, 특별한 이유 없이 그곳에 아내와 함께 가보게 되었다.


아주 작은 공간 안에, 책장 주인의 취향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엄선된 서가'가 있었다.

책 옆에는 주인장의 마음이 담긴 짧고 애정 어린 추천 쪽지가 붙어 있었다.

미술, 환경, 과학 서적이 주를 이루었지만, 그 외의 분야도 군데군데 숨어 있었다.

제목만으로도 나를 사로잡는 책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한 권씩 들춰보다 보니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결국 마음에 드는 책 세 권을 집어 들었다.

계산을 마치고, 아내와 각자 한 권씩 펼쳐 커피와 함께 읽기 시작했다.

종이 냄새와 커피 향이 어우러진 단순한 행복에 오롯이 빠져드는 시간이었다.


아마 이 경험으로 내 독서 생활의 시야가 조금 더 넓어질 것 같다.

대형 서점이었다면 수많은 책장 구석구석 숨어 있는 책들을 이렇게 고스란히 느껴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개인의 취향이 묻어나는 책장과, 주인장이 직접 배치한 도서의 배열에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많은 사람에게 읽히진 않을지라도, 내 취향에 꼭 맞는 '나만 알고 싶은 책'들이 있다.

그런 책을 찾기에는 독립서점만 한 곳이 없을 듯하다.

생각해 보면 어려운 일도 아닌데, 왜 이제야 그 문을 열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새로운 체험이 시야를 넓혀주는 건 요리에서도 마찬가지다.

처음 보는 요리 레시피를 발견하면 나도 모르게 만들고 싶은 욕심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하지만 재료 목록을 확인하는 순간, 그 설렘이 순식간에 사그라들 때가 있다.

구하기 힘든 외국 재료이거나, 필요한 건 고작 한 꼬집인데 최소 1kg 단위로만 파는 경우가 그렇다.

남은 재료를 어떻게 처리할 지부터 고민하게 된다.

대체 재료를 찾아보지만, 향신료라면 얘기가 다르다.

향이 조금만 달라져도 요리의 본질이 통째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내가 오랫동안 언젠가는 사보겠다며 미뤘던 재료가 있었다.

바로 팔각이다.

중국 요리에서 고기 요리에 자주 쓰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족발을 삶을 때도 사용된다.

고기의 누린내를 말끔히 잡아주면서 중국식 고기 요리 특유의 깊은 향을 완성한다.

문제는 보통 요리에 두세 개만 쓰는데 그렇게 소량으로는 팔지 않는다는 거다.

결국 사봤자 한 번 쓰고 평생 묵히겠다는 결론을 내리며 팔각이 들어간 요리는 오랜 기간 포기해 왔었다.

그러다 정확한 계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날 갑자기 팔각이 드디어 내 부엌에 입주했다.

생각보다 비싸지도 않았다.

그날 이후 나의 요리 지도도 조금씩 확장되기 시작했다.

동파육도, 쌀국수도 팔각과 함께였다.



만약 팔각을 미리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오늘의 요리도 재료 중 팔각을 발견하는 순간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팔각이라는 재료는 "집에 있는 거네" 하며 반갑게 다가온다.

아내는 몇 년 전,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을 얻은 뒤 대학 동기들과 "이제 우리도 사회인이니, 학생 때보다 조금은 고급 식당을 가보자"며 모임을 가졌다.

그때 선택한 곳이 양고기 요리 전문점이었다.

거기서 처음 양고기를 맛본 아내는 깊은 감명을 받았나 보다.

그 후로 몇 달 동안 양고기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나는 아내를 위해 양고기로 유명한 식당들을 하나둘 찾아 나섰다.

그러다 양배갈비수육으로 이름난 한 식당을 발견했다.

예약도 어렵고, 웨이팅 줄은 언제나 길게 늘어서는 곳이었다.

기대감이 하늘까지 치솟은 상태에서 양배갈비수육과 마주했다.

잘 삶아진 고기는 부드럽고 향은 은은했다.

그런데 뭔가 한 끗이 아쉬웠다.

배는 불렀지만 마음은 절반쯤 빈 채로 식당을 나왔다.

그렇게 몇 년 동안 그 아쉬움을 품고 지냈는데, 최근 우연히 바로 그 양배갈비수육 레시피를 발견했다.

재료를 살펴보니 고기만 주문하면 팔각을 포함한 나머지는 이미 집에 있었다.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바로 도전하기로 했다.



오늘은 양배갈비수육을 만든다.

먼저 고기를 물에 담가 30분 정도 핏물을 뺀다.

그다음 냄비에 고기, 양파, 대파, 마늘을 넣고 고기가 잠기도록 물을 붓는다.

소금과 통후추, 그리고 오늘의 향기 담당인 팔각을 투입한다.

이제 중 약불로 두 시간을 삶는다.

그동안 부추를 미리 썰어두고, 고기를 찍어 먹을 소스도 준비한다.

간단히 초장에 된장과 들깨가루를 섞어 완성했다.

그리고 두 번째 요리인 양전골도 준비한다.

물에 된장, 고추장, 간장, 마늘, 파, 청양고추, 고춧가루를 넣고 한 차례 끓여 기본 국물을 만들어 둔다.

2시간이 지나면 고기를 건져내 손질한다.

고기마다 작은 뼈가 붙어 있는데, 칼로 살짝만 그어도 쉽게 분리된다.

손질한 고기는 팔각 두 개를 넣은 물에 부추와 함께 15분간 찌면 완성이다.

손질하며 떼어낸 자투리 뼈와 고기는 감자와 함께 양전골 국물에 넣고 15분 정도 끓인다.

마지막으로 깻잎과 들깨가루를 넣고 1분만 더 끓이면 양전골도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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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요리는 레드와인과 함께 식탁에 올랐다.

고기는 뼈에서 힘들이지 않고 부드럽게 떨어졌다.

삶을 때도, 찔 때도 함께한 팔각 덕분에 양의 누린내는 자취조차 없었다.

남은 건 입맛을 부르는 양고기 특유의 은근한 향뿐이었다.


그 향을 온전히 느끼고 싶어 첫 점은 소금과 후추만 살짝 찍어 먹었다.

입 안에 닿는 순간, 부드러운 육질이 스르르 녹아내리며 고기의 깊은 감칠맛이 혀끝을 타고 천천히 퍼져갔다.

다음 한 점은 부추를 올리고 소스에 푹 찍었다.

약간 느끼할 수 있는 수육의 기름진 여운을, 소스가 깔끔하게 잘라냈다.

양전골 국물을 한 숟갈 떠 넣자, 칼칼함과 깻잎의 향긋함이 남아 있던 느끼함마저 말끔히 쓸어냈다.

아내는 한 입, 두 입 먹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손가락을 높이 들었다.

식당에서 먹은 것보다 훨씬 맛있어

결국, 오늘 최고의 와인 안주는 수육도, 전골도 아닌 아내의 칭찬이었다.



인생에서 시야를 넓히는 새로운 경험 중 가장 큰 것은 역시 결혼이다.

독립서점에 발을 들이거나, 팔각을 장바구니에 담는 일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인생 전체를 통째로 바꿔버리는 결심이다.

결혼은 서로 다른 취향이 한 지붕 아래서 부딪히며 시작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부딪힘은 뜻밖의 조화를 만들어낸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드디어 기대하던 순간을 맞았다.

비닐을 뜯고, 상자를 연다.

그 안에는 세 개의 카드 뭉치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보드게임을 좋아하는 나와 방탈출을 사랑하는 아내가 만나 방탈출 보드게임이라는 절묘한 접점을 찾아낸 것이다.

지금 우리는 벌써 이 시리즈의 7탄과 8탄을 플레이하고 있다.

기발한 연출과 흥미진진한 스토리는 언제나 우리의 놀이 취향을 완벽히 만족시킨다.


마치 양고기를 좋아하는 아내와 요리를 좋아하는 내가 만나 양배갈비수육이라는 요리를 해 먹은 것처럼, 서로의 취향이 만나면 예상치 못한 재미가 피어난다.

앞으로 내 삶이 또 어떤 방식으로 넓어질지, 어떤 기상천외한 사건이 우리 거실과 식탁 위를 차지할지, 그 기대감이야말로 결혼이 주는 최고의 덤이다.


결혼 생활은 늘 새롭다.

그렇게 내 삶은 조금씩 넓어지고 깊어진다.


아내의 후기

양배갈비수육
★4.5점
뼈에서 한입에 떨어지는 부드러움이 인상적인 양수육이었습니다.
입안 가득 퍼지는 양 특유의 향이 일품이었고요.
식당에서 먹었던 양수육보다 갈비 크기가 커서 입에 가득 물고 먹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느끼할 수 있었지만 소스와 부추, 그리고 양전골과 함께 곁들이니 깔끔했습니다.
부모님을 모시고 먹어도 좋을 근사한 요리였습니다.

양전골
★4.8점
수육과 찰떡궁합을 이룬 전골이었습니다.
처음 양전골이라고 했을 때는 뽀얀 국물을 떠올렸는데, 막상 보니 빨간 국물이라 천만다행이었죠.
건강한 맛의 양갈비 수육을 한입 먹고, 얼큰한 양전골을 곁들인 뒤 레드와인까지 마셔주면 취기가 살짝 오르며 양향이 입안을 가득 메워 참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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