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소스 오리스테이크, 북경풍 훈제오리, 트러플 오리야끼소바
오늘은 나와 아내가 코로나에 걸린 지 딱 1,000일째 되는 날이다.
한때는 전 세계를 멈춰 세우던 코로나다.
하지만 길었던 그 거대한 파도는 지나갔다.
이제는 수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 겪었던 감기 정도로만 기억할 뿐이다.
코로나에 걸린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하지만 우리만큼은 그날을 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날이 바로 우리의 결혼식날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결혼식은 하객 수까지 제한되던 시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마스크 착용은 여전히 엄격했다.
신랑 신부만 마스크를 벗을 수 있었다.
하객들은 오직 단체 원판 사진을 찍는 짧은 순간에만 마스크를 벗을 수 있었다.
그 잠깐의 맨얼굴조차 소중하게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결혼식 2주 전부터 결연하게 다짐했다.
"끝나면 거하게 한 끼 먹자!"
닭가슴살과 샐러드로 버티며 준비해 온 한을 풀겠다는 웅장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결혼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우리는 몇 시간 동안 덕지덕지 붙어 있던 메이크업을 지우고, 샤워로 긴장을 씻어낸 뒤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눈을 떴을 때는 어느새 저녁이었다.
부부로서 첫날 우리의 만찬은 컵라면 두 개였다.
라면을 후루룩 삼키고 다시 잠든 그날을 떠올리면 지금도 피식 웃음이 난다.
우리는 결혼을 준비하면서 정식 신혼여행은 일단 미루기로 했다.
코로나가 언제,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결혼식 직후 2박 3일 일정으로 경주에 다녀오자는 소박한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거하게 한 끼 먹자던 다짐이 무너졌듯, 경주 여행도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여행 둘째 날, 아내의 컨디션이 이상했다.
기운이 없고 몸살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처음에는 힘들었던 결혼 준비의 여파라고 생각했다.
푹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지만, 셋째 날에는 오히려 더 심해졌다.
결국 겨우겨우 여행을 마무리한 뒤 급하게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여행 중에는 아내만 힘들었고 나는 멀쩡했는데, 집에 돌아오자 이번엔 내가 아프기 시작했다.
출근을 위해 일찍 잠든 새벽, 끙끙대다 결국 아내를 깨웠다.
"나 너무 아파... 약 좀... 진통제 좀..."
태어나 아파서 누군가를 깨운 건 신생아 때 엄마를 깨운 이후 처음이었다.
다음 날 아침, 간이 코로나 검사를 했다.
아내는 양성, 나는 음성.
하지만 밤새 앓은 걸 생각하면 안심할 수가 없었다.
병원에 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우리 둘 다 확진 판정을 받았다.
잠복기를 따져보니 결혼식장에서 걸린 게 분명했다.
신랑 신부만 마스크를 벗고 수많은 하객을 맞이했던 그날이다.
나는 오랜만에 만난 친척과 친구들에게 악수를 남발하며 그동안 지켜왔던 사회적 거리 두기를 단숨에 무너뜨렸으니 말 다 했다.
결국 우리는 각자 회사에 연락을 돌리고, 의도치 않게 일주일간의 자가격리에 들어갔다.
꼼짝없이 집에 붙어 있어야 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게 오히려 우리의 진짜 '신혼여행' 같기도 하다.
이름하여 우리 집 격리 신혼여행.
아내 입장에서는 내가 모든 걸 케어해 줬으니, '올 인클루시브 패키지'라 불러도 손색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증세는 심하지 않아 약을 챙겨 먹으며 푹 쉴 수 있었다.
신혼여행 대신 신혼휴양이 된 셈이다.
이렇게 코로나와 함께 시작했던 우리의 결혼생활이 오늘로 1,000일을 맞았다.
이제는 로맨틱한 데이트도, 분위기 좋은 식당도 마음껏 갈 수 있지만... 문제는 계절이다.
8월의 중순, 바깥공기는 덥고 습해 숨이 턱턱 막힌다.
데이트는 고사하고 집 앞 편의점까지 다녀오는 일조차 겁이 난다.
결국 우리는 가장 안전하고, 가장 시원한 곳에서 기념일을 보내기로 했다.
신혼 휴양을 보냈던 것처럼 바로 집에서 말이다.
사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풀코스를 먹고 돌아와도 결론은 늘 같다.
"역시 집이 최고다."
그렇다면 굳이 돌아올 필요 없이 처음부터 집에서 시작하는 게 훨씬 합리적일지도 모른다.
지난주 아내가 말했다.
나, 오리고기 먹고 싶어.
그 순간부터 나는 어떤 오리 요리를 할지 나름의 연구를 시작했다.
블로그, 유튜브 영상은 물론이고 외국 셰프들의 레시피까지 기웃거렸다.
하지만 오리 한 마리에 온갖 양념을 쏟아붓는 화려한 조리법들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결국 나는 내가 구할 수 있는 재료, 내가 가진 도구, 그리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난이도 안에서 모든 걸 다시 다듬었다.
그리하여 오늘의 세 가지 오리 요리가 탄생했다.
셰프들의 흔적을 살짝 흉내 내되, 결국은 나에게 맞게 재해석된 오리 요리들이다.
우리 집 식당에는 메뉴판이 없으니, 내 마음대로 요리해도 뭐라 할 사람은 없다.
단 한 명뿐인 단골손님, 아내를 위해 오늘은 '올 인클루시브' 아니지, '오리 인클루시브 패키지'가 준비된다.
첫 번째 요리는 오렌지소스 오리스테이크다.
오리와 오렌지는 다소 낯설게 들리지만 의외로 훌륭한 궁합을 자랑한다.
프랑스에서는 예전부터 흔히 즐겨온 조합이라고 한다.
먼저 당근 오렌지 크림을 만든다.
버터에 잘게 썬 당근을 넣고 잠깐 볶은 뒤, 100% 착즙 오렌지 주스를 부어 약 20분간 졸인다.
이때 당근이 타지 않도록 중간중간 물을 보충해줘야 한다.
핸드 블렌더로 곱게 갈아주면 더욱 좋지만 내 부엌에는 그런 근사한 도구가 없다.
그래서 큰 덩어리만 채에 걸러냈다.
마지막으로 버터를 한 번 더 넣고 섞으면 부드러운 크림이 완성된다.
다음은 오렌지 소스다.
오렌지 주스를 졸인 뒤 치킨파우더를 물에 개어 넣고, 전분과 버터를 더해 끓이며 농도를 맞춘다.
새콤한 맛을 좋아한다면 레몬즙을 살짝 넣어도 좋다.
이제 마지막으로 오리 가슴살을 굽는다.
껍질 쪽에 칼집을 내고 소금과 후추를 골고루 뿌려 밑간 한다.
버터에 마늘과 로즈마리를 넣어 향을 낸 뒤, 오리를 중약불에서 천천히 굽는다.
녹은 버터를 숟가락으로 끼얹어 고기를 감싸듯 익힌다.
마지막에는 불을 끄고 5분 정도 여운을 남기듯 로스팅하면 된다.
당근 오렌지 크림을 넓게 깔고 그 위에 잘 익은 오리 스테이크를 올린다.
마지막으로 오렌지 소스를 곁들이면 근사한 한 접시가 완성된다.
두 번째 요리는 북경풍 훈제오리다.
오리고기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북경오리다.
그러나 집에 화덕이 있을 리 없으니 그 화려한 조리법을 그대로 재현할 수는 없다.
대신 비슷한 느낌이라도 내보기 위해 준비한 메뉴가 바로 이 요리다.
먼저 훈제 오리를 에어프라이어에 넣어 약 80% 정도만 익힌다.
그 사이 팬에서는 소스를 만든다.
물에 간장, 올리고당, 팔각, 생강, 후추를 넣고 팔팔 끓여 향을 머금은 소스를 완성한다.
집 안 가득 퍼지는 팔각의 이국적인 향을 맡고 있으면, 잠시 우리 부엌이 북경 어딘가의 골목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에어프라이어에서 꺼낸 오리에 준비한 소스를 골고루 바른 뒤, 다시 넣어 2분 정도 더 익히면 바삭하면서도 진한 풍미의 훈제오리가 완성된다.
마지막으로 채 썬 파, 피망, 당근을 곁들여 접시에 담고, 알새우칩을 함께 곁들였다.
유명한 호텔 중식당에서 북경오리를 알새우칩과 함께 낸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도 괜히 흉내 내본 것이다.
마지막 요리는 트러플 오리야끼소바다.
원래 야끼소바는 일본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분식 같은 요리다.
축제나 노점 앞에서 한 손에 종이 접시를 들고 먹는 서민적인 음식이다.
분식답게 조리법은 간단하다.
재료 손질만 끝내면 실제 조리 시간은 5분 정도면 충분하다.
먼저 훈제오리를 팬에 볶다가 양파, 당근, 파, 숙주, 청경채를 넣고 함께 볶는다.
그다음 야끼소바 생면을 넣고 시판 야끼소바소스에 굴소스, 맛술, 설탕, 후추를 더해 풍미를 입힌다.
양념이 고르게 배면 접시에 담고, 마지막으로 트러플 오일을 살짝 뿌린다.
바로 그 한 방울이 길거리 분식을 호텔 다이닝과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특별한 요리로 바꿔놓는다.
아내와의 결혼 1000일을 기념하며, 우리는 요리를 맛보기 시작했다.
아내가 오리고기를 먹고 싶다고 했을 때 이런 요리들을 상상했을 리는 없다.
아마 훈제오리를 구워 머스타드 소스를 찍어 먹는 정도를 떠올렸을 것이다.
나는 열심히 했으니 칭찬 좀 해달라는 표정으로, 정성껏 공부하고 변주한 요리들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완성해 선보인 건 프랑스, 중국, 일본 느낌의 삼국 오리 요리였다.
먼저 오리스테이크를 썰어 오렌지소스를 찍고, 당근 크림을 듬뿍 얹어 먹어본다.
대체 어떤 맛이 날까 궁금했는데, 한입 먹자마자 알 수 있었다.
상큼한 오렌지의 산미와 단맛이 오리의 기름진 풍미를 싹 씻어내며 향을 끌어올려 주었다.
프랑스 사람들이 왜 오리와 오렌지를 함께 먹는지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다음은 아내가 궁금한 것이 많았던 북경풍 훈제오리 차례다.
상을 차리던 중, 아내는 소스를 만든 팬에 남은 팔각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게 뭐냐고 물었다.
요리에 큰 관심이 없는 아내는 팔각을 실제로 처음 본 모양이었다.
귀엽다며 이리저리 굴려보고, 신기하게 생겼다며 한참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아내가 가장 궁금해한 건 따로 있었다.
바로 알새우칩이다.
전날부터 알새우칩은 어디에 쓰려고 산 거냐며 물었다.
완성된 요리를 보고도 "플레이팅용으로 산 거야? 이게 무슨 플레이팅이야?"라며 계속 궁금해했다.
그러다 함께 먹는 거라는 설명을 듣고, 오리와 채 썬 채소에 곁들여 먹어보더니 눈이 다시 동그래졌다.
식감이 재미있다며 연신 알새우칩을 추가해 먹는 모습이 귀여웠다.
마지막은 트러플 오리 야끼소바였다.
사실 이건 어디서 본 적도 없는, 온전히 나만의 창작 요리였다.
예전에 짜장라면에 트러플 오일을 뿌려 먹는 것이 유행했던 걸 떠올리며 힌트를 얻은 메뉴였다.
예상 밖의 대성공이었다.
트러플 오일을 뿌리지 않았다면 그냥 평범했을 맛이, 완전히 다른 세계로 업그레이드되었다.
덕분에 젓가락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함께 요리를 맛보다가 문득 서로를 바라봤다.
벌써 1000일이야?
시간 진짜 빠르다.
앞으로도 계속 행복하자.
짧은 대화였지만 웃음 속에는 지난날의 추억과 앞으로의 다짐이 함께 묻어 있었다.
식탁은 평소와 같지만, 이렇게 세 가지 요리를 앞에 두고 즐겁게 수다를 떨며 함께 맛보고 있다는 사실은 큰 선물처럼 느껴졌다.
좋은 식당에 갔다면 분명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고, 메뉴를 고심하며 사진도 몇 장 찍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집에서, 그것도 가장 편안한 잠옷 차림으로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러면 어떤가.
말쑥한 차림 대신 목 늘어난 티셔츠, 단정한 옷 대신 헐렁한 원피스 잠옷.
그런데도 이 모습이 훨씬 더 우리답다.
어쩌면 이런 차림이야말로 1,000일을 함께 보낸 부부의 진짜 의상일지도 모른다.
연애 초반의 커플이라면 두근거리는 설렘에 목소리 톤까지 반 올려 대화했겠지만, 이제는 다르다.
설렘 대신 찾아온 건 함께 있을 때의 편안함, 안정감, 포근함이다.
서로에게 굳이 포장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 그 자체가 얼마나 큰 행복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입을 옷은 잠시 유행이 지나면 옷장 구석에 묻힌다.
하지만 집에서 입는 잠옷은 해질 때까지, 아니 해지고도 계속 입는다.
우리의 결혼 생활도 그 잠옷처럼 늘어져 간다.
편안하게, 오래도록.
아내의 후기
오렌지소스 오리스테이크
★4.8점
제 인생 처음으로 먹어보는 오리스테이크였습니다.
오리 고기를 직접 나이프로 잘라먹는 것은 색다른 느낌이더라고요.
특히 당근 크림이 정말 맛있어서 고급 레스토랑에 온 것 같았습니다.
이 당근 크림은 두고두고 생각날 것 같아요.
외국에서 오렌지와 오리를 많이 곁들여 먹는다고 하던데, 왜 그러는지 알겠더라고요.
상큼하니 너무 좋았습니다.
북경풍 오리훈제
★4.5점
오리 훈제에 알새우칩을 곁들여 먹으면 이렇게 식감이 좋아지는 줄 몰랐네요~
부드럽고 따뜻한 오리 훈제에 새우칩의 바삭한 식감과 소스가 어우러져 손이 계속 갔습니다ㅎㅎ
야채들도 곁들여 먹기 좋았어요.
트러플 오리 야끼소바
★4.5점
야끼소바를 만들면서 '뭘 좀 첨가하면 더 좋을까?' 하다가 넣은 트러플 오일이 신의 한 수였습니다!
강한 소스 맛을 부드럽게 잡아주면서, 그 위로 은은한 트러플 향이 더해져 정말 맛있었어요.
총평
오리 훈제 정도만 알던 저에게 오리 요리의 새 지평을 열어주신 신랑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사랑한다는 말씀 전합니다ㅎㅎ
P.S.
오늘 요리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마치 우리의 1000일을 질투라도 하듯, 부엌의 월패드가 갑자기 고장 나 형광등과 콘센트가 계속 꺼졌다.
형광등은 자꾸 꺼지고, 에어프라이어는 전원이 나가 버리고, 나는 점점 예민해졌다.
그때 아내가 나섰다.
에어프라이어는 세탁실로 옮겨 돌려주고, 스탠드 두 개를 부엌에 설치해 주었다.
덕분에 갑자기 카페 같은 무드 조명에서 요리할 수 있었다.
인덕션 쪽 콘센트라도 멀쩡했던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예민해져 가는 나를 순식간에 달래고, 부족한 환경을 뚝딱 메워준 아내를 보며 생각했다.
1,000일 안에는 이렇게 서로를 채워주고 지탱해 주는 순간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는 것을.
이제 세 자릿수의 결혼생활은 끝났다.
네 자릿수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