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채밥, 통후추 소고기볶음, 계란김국
대학 시절 내가 가장 많은 밥을 먹은 곳을 꼽으라면 단연 두 곳이다.
기숙사 바로 뒤에 있던 기숙사 식당, 그리고 학교 중앙에 자리한 학생식당.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았던 가난한 대학생에게 맛집 탐방이란 사치는 없었다.
내가 들었던 숟가락은 언제나 이 두 식당 중 하나의 것이었다.
입학 초반에는 기숙사 식당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가까웠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 비비고 일어나 수업 전 허겁지겁 내려가 먹기 좋았다.
공강 시간엔 침대에 드러누웠다가 배가 고프면 슬리퍼를 질질 끌며 내려가면 그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발길은 학생식당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가격도 비슷했고 맛도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신기하게도 발걸음을 옮기게 만든 어떤 계기가 있었다.
나의 대학 시절 밥상 풍경을 조금 더 풍족하게 만들어준 사건이다.
오후 네 시.
점심이라 하기엔 늦었고, 저녁이라 하기엔 이른 애매한 시간이었다.
수업을 마친 나는 강의실 바로 옆에 있는 학생식당으로 향했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 식당은 한산했고, 덕분에 식권을 뽑기 위해 줄을 설 필요도 없었다.
메뉴를 고르고 계산을 마치면 작은 종이에 메뉴 이름과 번호가 찍혀 나온다.
자리에 앉아 벽면 전광판을 바라보다가, 내 번호가 뜨면 잽싸게 달려가 음식을 받아오는 방식이었다.
자리를 잡고 기다리다 내 번호가 보여 한식코너로 갔다.
그런데 음식을 내어주시던 아주머니 한 분이 국자를 든 채 나를 유난히 뚫어지게 바라보셨다.
식권도 제대로 냈고, 내가 주문한 음식이 맞는 것도 확인했다.
순간적으로 '혹시 얼굴에 뭐가 묻었나?'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는 최대한 태연한 척 "감사합니다" 하고 음식을 받아왔다.
하지만 자리에 앉아 밥을 먹는 내내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몇 번 더 학생식당을 찾고 나서야 아주머니가 나를 그렇게 뚫어지게 바라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내 얼굴에 무언가 묻어 있던 것이 맞았다.
묻어 있던 건 국물도, 밥풀도 아니었다.
내 얼굴에 깊게 배어 있던 건 바로 아버지의 유전자였다.
어느 날, 아주머니는 내가 주문한 메뉴를 건네주시며 뜬금없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넌 내 첫사랑이랑 참 많이 닮았다
순간, 조금은 멋쩍었다.
아주머니에게 들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던 대사였으니 말이다.
놀랍다기보다는, 그저 뜻밖이라 재미있었다.
아주머니는 이내 내 밥상에 밑반찬을 수북하게 얹어주시며 많이 먹으라고 챙겨주셨다.
그러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또 물으셨다.
혹시... 아버지를 많이 닮았니?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네, 어릴 땐 특히 더 닮았었어요.
아버지가 중학생 일 때 사진을 보고
할머니께 언제 찍은 내 사진이냐고
물어볼 정도였으니까요.
아주머니는 내 말을 듣고 한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더 묻고 싶은 눈치였지만 끝내 말을 잇지 않으셨다.
그 표정에는 웃음과 아쉬움, 그리고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마다 아주머니의 서사 속 한 장면이 된 기분이었다.
그 뒤로 학생식당에 갈 때마다 아주머니는 나를 더 반갑게 맞아주셨다.
밥을 받으며 오가는 짧은 대화도 점점 늘어갔다.
어느새 내 발걸음은 기숙사 식당보다 학생식당을 더 자주 향했고, 그중에서도 한식코너가 단골이 되었다.
심지어 다른 코너에서 밥을 받아도 일부러 찾아가 인사를 드리곤 했다.
그 사이 아주머니는 나를 한식코너의 유명인사로 만들어버리셨다.
다른 동료 아주머니들에게도 "얘, 내 첫사랑 닮았잖아. 반찬 많이 줘"라며 소문을 내신 덕분이었다.
진짜로 다른 아주머니들까지 내가 메뉴를 받아 자리에 가려 하면 꼭 뭐라도 하나 더 챙겨주곤 했다.
하루는 중식코너엔 잡채밥이, 한식코너엔 소고기볶음이 나온 날이었다.
두 가지 메뉴 중 나는 잡채밥을 골랐다.
그러자 한식코너 아주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으셨다.
"소고기볶음도 맛있는데, 왜 이건 안 먹어?"
나는 괜히 변명하듯 웃으며 대답했다.
"둘 다 너무 맛있어 보여서 고민했는데요, 오늘은 잡채밥으로 정했어요."
그리고는 자리로 돌아와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잠시 후, 아주머니가 직접 소고기볶음을 조금 덜어 내 자리까지 가져오셨다.
"이것도 같이 먹어."
갑자기 내 밥상이 단숨에 2코스 정식으로 승격됐다.
함께 있던 친구들은 앞으로 학식은 무조건 나랑 같이 와야겠다며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
할머니 댁에나 가야 받아보던 식탁 위 귀빈 대접을, 나는 학생식당에서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은 학생식당의 추억을 떠올리며, 그날 먹었던 메뉴를 직접 만들어 보기로 했다.
첫 번째 요리는 중식풍 잡채밥이다.
먼저 팬에 고추기름을 두른다.
채 썬 돼지고기를 넣어 볶다가 간장 한 숟갈을 살짝 둘러 밑간을 한다.
간장에 볶아지며 고기가 익어가는 냄새만으로도 벌써 반은 성공한 기분이 든다.
이제 채 썬 양파, 호박, 당근, 청피망, 홍피망을 넣어 함께 볶는다.
조금 뻑뻑한 느낌이 들어 식용유를 살짝 더해준다.
여기에 고춧가루, 굴소스, 소금, 백후추를 넣어 간을 맞춘다.
미리 불려둔 당면은 끓는 물에 살짝 데친 뒤 찬물에 헹궈 준비한다.
고기와 채소가 적당히 익었을 때 당면을 넣고 잠깐만 볶아준다.
마지막으로 불을 끄고 참기름 몇 방울을 떨어뜨려 윤기와 향을 더해 마무리한다.
완성된 잡채를 뜨끈한 밥과 함께 그릇에 올리면 잡채밥이 완성된다.
두 번째 요리는 후추 향이 기분 좋게 퍼지는 통후추 소고기볶음이다.
먼저 소고기 안심을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굴소스, 백후추, 기름을 넣어 살짝 재워둔다.
그다음 소스를 준비한다.
물, 케첩, 설탕, 식초, 굴소스, 마늘, 전분을 섞고 흑후추를 듬뿍 갈아 넣는다.
여기에 통후추 몇 알을 그대로 넣어 씹는 순간 터지는 후추의 매력을 더한다.
소스를 은근히 끓여 농도를 잡으면, 향만으로도 벌써 입안에 침이 고인다.
기름을 두른 팬에 고기를 넣고 볶는다.
빨간 빛깔이 사라지면, 고기와 비슷한 크기로 썬 양파, 버섯, 청피망, 홍피망을 넣는다.
야채는 아삭한 식감을 잃지 않도록 오래 볶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준비해둔 소스를 부어 고기와 채소가 한데 어우러지게 볶아주면 완성이다.
함께 곁들일 국은 계란김국이다.
먼저 육수를 내고, 여기에 간장, 소금, 후추로 국물 맛을 잡는다.
조미김을 넣을 것이므로 간은 약간 싱거운 듯하게 맞추는 것이 좋다.
달걀을 풀어 국물 위에 고슬고슬 흘려 넣는다.
계란이 익어 몽글몽글 떠오르면 김을 넣어 마무리한다.
간단하면서도 든든한 계란김국이 완성된다.
아내와 내가 모두 좋아하는 중식 요리 중, 잡채밥은 절대 빠질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집 저 집 잡채밥을 꽤나 먹어봤다.
당연히 비교 대상도 많다.
그러니 나는 아내의 표정을 평소보다 더 유심히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반응이 좋다.
호로록호로록 면을 빨아들이는 모습이 이렇게나 경쾌할 수가 없다.
기름을 꽤 많이 쓴 것 같았는데도 그릇에는 기름이 거의 묻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중국집은 대체 기름을 얼마나 쓰는 걸까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야기를 나눴다.
소고기볶음은 살짝 찹스테이크 같은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후추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씹을 때마다 알싸한 향이 톡톡 터져 나와 색다른 별미였다.
나는 밥상을 사이에 두고 학생식당 아주머니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우리는 같은 대학 같은 과를 졸업한 캠퍼스 커플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아내가 입학하기 전의 일이다.
아내는 그 시절 내 곁에 있지 않았지만, 이야기를 듣고는 마치 함께 경험한 듯 재미있게 들어주었다.
비록 우리가 함께하지 못했던 일들이라도 이렇게 한 끼 식탁 위에서 다시 살아난다.
학생식당 아주머니가 챙겨주던 반찬처럼 우리의 대화가 밥상을 더 푸짐하게 만든다.
평소와 다름없이 대학생활을 보내던 어느 날, 학생식당과의 예고된 이별이 다가왔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숙명 바로 군대였다.
입대를 석 달 앞두고 기말고사를 준비하던 때였다.
늘 그렇듯 학생식당을 찾았고, 아주머니께 슬쩍 말씀드렸다.
"저, 세 달 뒤에 군대 가요."
아주머니는 못내 아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며칠 뒤, 다시 학생식당을 찾았을 때였다.
아주머니는 한참 머뭇거리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혹시... 아버지 이름이 ○○이니?
나는 너무 놀라고 말았다.
'아버지랑 무슨 관계시지?'하며 여러가지 상상이 스쳤다.
왜냐하면, 정말로 우리 아버지 이름이 아주머니 입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아주머니는 예전에 내가 아버지를 닮았다고 했을 때부터 확인하고 싶으셨는지도 모른다.
혹시 내가 첫사랑의 아들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맞아요.
제 아버지 이름이 맞아요.
그러자 아주머니는 크게 당황하셨다.
마치 아침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어쩔 줄 몰라 하시더니, 곧이어 몇 가지를 더 물으셨다.
태어난 연도와 나이를 맞춰보니 어긋나는 부분들이 있었다.
결국 이름은 같았지만, 나이도 성도 고향도 달랐다.
그제야 아주머니는 안도와 아쉬움이 뒤섞인 묘한 표정을 지으셨다.
허무할 법도 한데, 오히려 더 신기했다.
그 후에도 나는 학생식당 아주머니와 짧지만 따뜻한 인연을 이어가다 결국 군대에 가게 되었다.
복학해 학교로 돌아와 다시 학생식당을 찾았을 때는 아주머니는 그곳에 계시지 않았다.
가끔은 지금도 문득 궁금해진다.
어디선가 여전히 누군가에게 많이 먹으라며 반찬을 넉넉히 퍼주고 계시진 않을까.
그 모습을 상상하다 보면, 대학 시절의 학생식당 풍경이 다시 눈앞에 펼쳐진다.
그 시절, 나에게 학생식당은 누군가의 청춘 그리고 낯설지만 따뜻했던 인연이 함께 담긴 곳이었다.
아내의 후기
잡채밥
★4.5점
제가 중화요리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인 잡채밥을 신랑이 직접 해줘서 정말 감격스러웠습니다!
기름이 꽤 많이 들어갔다고 했지만 오히려 건강한 맛으로 느껴졌어요 ㅋㅋㅋ
당면도 부드럽고 소스가 잘 스며들어 술술 들어갔습니다.
너무 맛있게 잘 먹었어요!
통후추 소고기볶음
★4.0점
처음 먹어본 맛의 음식이었어요.
신랑 덕분에 새로운 맛있는 요리를 경험했습니다.
채소와 소고기에서 후추 향이 강하게 나서 이색적인 풍미를 느끼고 싶을 때 또 생각날 것 같아요.
맛있는 한 접시였습니다!
계란김국
★3.5점
평소 먹던 계란국보다 간을 덜하고 조미김을 넣어줬다고 해요.
다른 요리들이 자극적이어서 그런지, 더 건강한 맛이 느껴졌습니다.
자칫 느끼할 수 있는 요리들이 물리지 않게 균형을 잡아준 중요한 역할을 해준 국이었습니다!
P.S.
고등학교 시절엔 오이를 못 먹는 나를 위해 따로 반찬을 챙겨주시던 급식소 아주머니들이 계셨다.
대학교에선 주문하지도 않은 메뉴을 많이 먹어라며 더 얹어주던 학생식당 아주머니가 있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학창 시절 늘 식탁 위에서 뜻밖의 호사를 누려왔다.
먹을 복만큼은 확실히 있었다.
아무래도 밥 얻어먹는 운은 결혼 전에 이미 다 써버린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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