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러플 파스타, 트러플 미역샐러드, 트러플 우삼겹피자, 트러플 해물수프
요즘 내가 설레는 순간 중 하나는 아주 사소하다.
바로 빨래가 끝난 것들을 마주하는 순간이다.
외출하기 전 건조대에서 바삭하게 마른 티셔츠를 입을 때의 상쾌함.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가장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을 때의 포근함.
소파에 기대어 막 빨아낸 쿠션을 끌어안을 때의 묘한 아늑함.
그리고 새로 빨아낸 이불과 베개에 몸을 던져 맞이하는 밤의 충만함.
이 모든 순간이 요즘의 나에겐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다.
그 이유는 바로 섬유유연제 향이다.
사실 나는 섬유유연제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대학 시절 기숙사 세탁실에서는 세탁세제만 챙겨 갔고, 섬유유연제 없이 돌려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느 순간부터는 남들이 다 쓰니까 나도 쓰는 정도가 되었다.
항상 다 떨어지면 그때그때 가장 저렴한 제품을 샀고, 내 기준에서 섬유유연제는 그저 이거나 저거나 다 거기서 거기였다.
그런데 몇 달 전, 아내가 불쑥 말했다.
"우리 향 좋은 섬유유연제 한번 써볼래?"
나는 속으로 '향이 다 비슷한 거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만, 일단 알겠다고 했다.
그 말 한마디가 내 인생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내 빨래 생활은 완전히 바꿔놓았다.
마트에서 단 한 번도 유심히 본 적 없던 섬유유연제 코너를 둘러본 날 나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선반 가득 알록달록한 제품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이름도 모르는 꽃과 과일, 심지어 보석 이름을 딴 향까지 있었다.
그제야 나는 섬유유연제의 세계를 너무 얕잡아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내와 나는 시향 전문가라도 된 듯 여러 제품의 뚜껑을 열고 향을 맡아보았다.
라일락, 코튼, 블루밍 로즈, 시트러스, 머스크...
나는 두세 개쯤 마음에 드는 향을 찾았지만, 아내의 표정은 여전히 탐탁지 않았다.
결국 그날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러던 2주 전, 집에 있던 섬유유연제가 마침내 동이 났다.
나는 유튜브에 '섬유유연제 추천'을 검색해 몇몇 영상을 본 뒤, 신중하게 하나를 골랐다.
달콤하면서도 시원한 블랙 오키드 향의 이탈리아 브랜드 제품이었다.
새로 산 섬유유연제로 처음 돌린 빨래를 함께 개던 순간, 아내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평소 사던 제품들보다 세 배정도 비쌌지만 아내의 그 표정 하나만으로도 가격은 충분히 회수됐다.
게다가 이 향은 단발성이 아니었다.
세탁 직후의 향은 물론이고 며칠이 지나도 옷감 속에 깊이 남아 있었다.
옷장에서 꺼낸 티셔츠 하나, 방금 개어둔 수건 한 장이 작은 기쁨을 건네왔다.
빨래에 몇 방울 더해진 섬유유연제의 향이 평범한 일상이 한층 고급스러운 순간으로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삶의 질을 바꾸는 건 어쩌면 이런 작은 향 하나일지 모른다.
요리 역시 마찬가지다.
평범한 재료에 향 하나만 얹어도, 집에서 만든 가정식이 고급 식당의 요리로 변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트러플이다.
물론 내가 오늘 쓰려는 건 1g에 몇 만 원씩 하는 생 트러플은 아니다.
집밥을 차리는데 그런 호사를 누리긴 쉽지 않다.
대신 친한 후배에게 선물 받은 트러플 페이스트, 트러플 오일, 그리고 트러플 솔트가 내 주방 서랍에 든든히 자리 잡고 있다.
생트러플은 아직 실제로 본 적도 없지만, 대신 이 녀석들이 늘 나를 반겨준다.
처음 선물을 받았을 땐 사실 조금 난감했다.
이걸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다.
향이 워낙 강렬하다 보니, 괜히 잘못 사용했다가 요리 전체를 망쳐버릴까 두려웠다.
그런데 몇 번 써보니 간단한 재료였다.
트러플은 생각보다 까탈스럽지 않았다.
스테이크나 파스타 같은 정통 서양 요리는 물론, 평범한 한식 메뉴에도 의외로 잘 어울렸다.
요리에 살짝만 뿌려주어도 분위기는 금세 달라졌다.
계란프라이 위에 트러플 솔트를 솔솔 뿌리면 호텔 조식이 되고, 삼겹살에 트러플 오일 몇 방울만 더해주면 레스토랑 요리가 된다.
덕분에 쓸 때마다 은근히 자신감이 붙어 갔다.
그래서 오늘은 요리의 격을 한 단계 끌어올리기 위해 트러플 향을 불러왔다.
생각보다 트러플을 활용한 다양한 가정식 레시피는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냥 내 마음대로 해보기로 했다.
트러플 요리 중 가장 대중적인 건 아마 트러플 파스타일 것이다.
먼저 버터에 다진 양파와 애호박을 넣고 볶았다.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한 뒤, 야채가 다 익으면 불을 끄고 트러플 페이스트를 넣어 섞었다.
트러플 향은 열에 약하기 때문이다.
면은 소스와 잘 엉겨 붙도록 나선형으로 생긴 후실리를 골랐다.
사실은 집에 남아 있던 게 후실리뿐이었지만, 요리할 때는 언제나 '의도한 선택'처럼 말하는 게 중요하다.
면을 소스와 잘 버무려 그릇에 담고, 트러플 오일을 가볍게 둘렀다.
그리고 파마산 치즈와 파슬리 가루를 솔솔 뿌려 마무리했다.
두 번째 요리는 아주 간단하다.
바로 트러플 미역샐러드다.
미역을 물에 담가 불리고, 양파는 얇게 썰어 물에 넣어 매운맛을 뺐다.
드레싱은 간장, 올리브오일, 트러플 오일, 트러플 솔트, 그리고 후추를 섞어 준비했다.
물기를 털어낸 미역과 양파에 드레싱을 부어 가볍게 섞으면 끝이다.
별것 아닌데도 괜히 고급스러운 척도 할 수 있는 메뉴다.
세 번째는 트러플 우삼겹피자다.
피자 도우 반죽까지 할 자신은 없으니, 도우는 과감히 생략했다.
먼저 팬에 우삼겹을 구워 소금과 후추로 가볍게 간을 한다.
그 위에 토마토소스와 모짜렐라 치즈를 듬뿍 얹고, 풋고추를 얇게 썰어 올린다.
크러쉬드 페퍼도 톡톡 뿌려준 뒤, 뚜껑을 덮고 약불에서 치즈가 녹아내릴 때까지 기다린다.
토핑은 특별할 것 없이 단출했지만, 그 자체로 충분했다.
마지막으로 트러플 오일과 트러플 솔트를 가볍게 뿌려 완성했다.
함께 먹을 국물요리로는 트러플 해물수프를 준비했다.
한국인 밥상에는 늘 국물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먼저 올리브오일에 다진 양파를 볶고, 마늘을 다지기 귀찮아 마늘가루로 대신해 향을 더했다.
여기에 물을 붓고 각종 해물을 넣은 뒤, 새우가루와 치킨파우더까지 더했다.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하고 충분히 끓이니 국물이 제법 진해졌다.
여기서 체다치즈를 찢어 넣어 녹이니 국물이 살짝 걸쭉해졌다.
마지막으로 간은 트러플 솔트로 맞추고, 트러플 오일과 파슬리 가루를 솔솔 뿌려 완성했다.
트러플 향을 좋아하는 아내는 음식을 상에 올릴 때부터 이미 신나 있었다.
아직 수저도 들기 전인데, 향만으로도 벌써 만점 요리처럼 보였던 것이다.
마주 앉아 하나씩 맛을 보기 시작했다.
물론 모든 요리에 트러플을 사용했으니 향은 비슷했지만, 입안에 퍼지는 매력은 제각각 달랐다.
파스타는 부드럽지만 세련된 풍미가 있었고, 묘한 무게감까지 있었다.
우삼겹 피자는 고소함과 향긋함이 어우러졌는데, 마지막에 얹은 풋고추의 매콤함이 느끼함을 잡아주어 깔끔했다.
해물 수프는 깊고 묵직한 감칠맛이 있었고, 샐러드는 가볍고 산뜻하게 입안을 마무리했다.
아내는 평소 요리 과정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이건 어떻게 만든 거야?"
한입 먹을 때마다 질문이 쏟아졌다.
트러플 향의 힘이란 참 대단하다.
요리에 무심한 아내마저 호기심 가득한 미식 평론가로 만들어버리다니.
나는 재료와 과정을 하나씩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오늘 주문한 재료 하나도 없어. 그냥 냉장고에 있던 것들로 만든 거야. 냉파(냉장고 파먹기) 식단이야."
그러자 아내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아니, 무슨 냉파가 이렇게 고급져?"
생각해 보면 오늘 사용한 재료나 조리법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
냉동실에 있던 고기와 해물, 냉장칸의 야채들, 늘 보던 평범한 재료들뿐이었다.
그런데도 식탁 위에선 마치 외식 코스요리를 즐기는 듯한 착각이 일어났다.
결국 차이를 만든 건 마지막에 더해진 향 하나였을 뿐이다.
식사를 마치고 양치를 하려고 화장실에 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상쾌하고 기분 좋은 향이 코끝을 스쳤다.
자세히 보니 구석에 있던 빈 디퓨저가 어느새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내의 손길이 분명했다.
순간 괜히 호텔 화장실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거실, 아내의 방, 침실까지 우리 집 곳곳의 디퓨저는 모두 아내의 관리 영역이다.
향의 세계에 있어서는 늘 아내가 총지배인이다.
생각해 보니 연애 초반에도 그랬다.
아내는 나에게 잘 어울릴 것 같다며 향수를 선물해 준 적이 있었다.
결혼 후에는 향 좋은 샴푸와 바디워시가 욕실 선반에 늘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식탁 위 음식의 향은 내가 책임진다고 자부할 수 있겠지만, 그 외 집 안의 모든 향은 아내의 영역이었다.
우리가 준비한 작은 향들이 켜켜이 쌓이며, 우리의 삶은 조금씩 더 고급스러워져 간다.
아내의 후기
트러플 파스타
★4.8점
평소 오일 파스타를 좋아하는데, 트러플 파스타 역시 정말 맛있었습니다.
꾸덕한 질감을 잘 살렸고, 야채도 풍성하게 들어가 풍미가 한층 깊었습니다.
트러플 미역샐러드
★5.0점
트러플 오일 파티로 자칫 느끼할 수도 있던 요리들을 깔끔하고 담백하게 잡아주었습니다.
트러플 향이 은은하게 배어 있는 미역무침이 정말 매력적이었고, 자꾸 생각나 또 먹고 싶네요!
트러플 우삼겹피자
★5.0점
제가 특히 좋아하는 우삼겹을 이번에는 트러플 오일과 함께 곁들였는데, 이건 정말 압권이었습니다.
우삼겹의 고소함과 트러플 향의 조합은 그야말로 도파민 대폭발!
먹는 내내 너무너무 행복했던 메뉴였습니다.
트러플 해물수프
★4.8점
수프의 농도를 체다치즈로 잡았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게다가 우연히 트러플 오일이 하트 모양으로 떨어져 귀여움까지 더해져, 맛과 재미를 동시에 잡은 요리였습니다.
총평
별도의 레시피를 보고 따라한 것이 아니라, 집에 있는 재료들을 가지고 AI와 대화하며 새로운 레시피를 만들어냈다는 점이 정말 놀라웠습니다.
P.S.
트러플 오일과 솔트, 페이스트를 쓰다 보니, 자꾸만 진짜 생트러플을 써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깊고 진한 흙내음, 코끝을 파고드는 강렬한 향이 확실히 압도적이라고 한다.
솔직히 말해, 내 입맛이 그 고귀한 향을 받아낼 준비가 되어 있는지도 의문이다.
과연 내가 그 풍미를 온전히 즐길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게다가 가격을 보면, 식재료 하나에 그 돈을 써도 되는 걸까 싶어 저절로 겸손해진다.
하지만 사실 내가 이렇게 가격을 잘 알고 있는 건 이미 판매처를 알아봤기 때문이다.
게다가 만들어보고 싶은 요리도 은밀히 정해둔 상태다.
한편으로는 걱정도 된다.
혹시 한 번 맛보고 나면 지금 집에 있는 트러플 오일이나 솔트가 순식간에 별것 아닌 것으로 느껴지지 않을까.
그래서 결론은 이렇다.
우선은 집에 있는 것들을 아낌없이 다 써보고, 그다음에야 생트러플을 들일지 고민해 보자는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