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장면
대학 시절 내가 속한 경영대와 인문대가 함께 쓰던 건물이 있었다.
그곳이 내가 가장 자주 드나들던 공간이었다.
1층 중앙에는 늘 학생들로 붐비던 다섯 개 남짓한 테이블이 있었고, 한쪽 구석에는 매점과 카페가, 또 다른 구석에는 열람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열람실은 크기가 넉넉하지 않았다.
언제나 자리가 부족했고, 자연스레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눈치싸움이 벌어졌다.
더구나 내가 신입생이던 시절에는 좌석 관리 시스템조차 없었다.
누군가는 가방 하나 던져놓고, 누군가는 노트북만 덩그러니 올려둔 채 종적을 감췄다.
덕분에 실제로 앉아 공부하는 학생보다, 짐만 얌전히 앉아 있는 자리가 더 많았다.
학생들의 불만은 점점 커져갔고, 시험기간만 되면 그 불만은 두세 배로 부풀어 올랐다.
1년이 지나 2학년이 되던 해, '열람실 좌석 프로그램 구축'을 공약으로 내건 경영대 회장단이 선출되었다.
그런데 막상 공약을 이행하려 하니 문제가 간단치 않았나 보다.
외부 업체에 맡기자니 비용이 만만치 않았고, 이후 유지보수도 골칫거리였다고 한다.
고민 끝에 회장단의 시선은 갑자기 나에게로 향했다.
나는 당시 경영대 내 프로그래밍 소학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게다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코딩을 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회장이 직접 부탁을 해온 것이다.
요즘은 전공과 상관없이 코딩을 조금은 할 줄 아는 학생들이 많다.
그런데 내가 신입생이던 무렵만 해도 경영대에서 프로그래밍을 하는 학생은 보기 드물었다.
나는 조금은 특이한 학생이었다.
사례비는 크지 않았지만, 프로그래밍으로 처음 돈을 벌어본다는 기대감과 단순해 보이는 요구사항 덕분에 흔쾌히 수락했다.
좌석 예약의 기본 원칙은 간단했다.
각 좌석은 최대 두 시간까지만 사용할 수 있고, 연장은 단 한 번만 허용됐다.
짐만 올려두고 자리를 차지하는 관행을 없애기 위해, 예약 시간이 지나면 그 짐을 치우는 일은 학생회가 맡기로 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기능에서 문제가 터졌다.
예약할 때 이름과 학번을 입력하도록 해야 했는데, 그러려면 학교 데이터베이스와 연동이 필요했다.
학생회가 학교 측에 협조를 요청했지만 개인정보 문제로 거절당했다.
결국 학생회는 이름과 학번을 입력만 받되, 그 정보가 실제로 유효한지는 확인하지 않는, 사실상 학생들의 양심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초기 버전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시험기간, 드디어 내 손에서 나온 좌석 관리 프로그램이 열람실 입구에 설치되었다.
일주일 정도를 거처 완성한 첫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 순간이니 뿌듯함도 컸다.
그런데 설치된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내가 열람실 프로그램을 만든 것을 아는 친구에게 메시지가 도착했다.
야, 열람실에 짜장면이 앉아 있던데?
순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내가 개발한 시스템이 배달 주문까지 받는 기능 같은 건 없었다.
열람실 앞으로 달려가보니, 이미 현장은 난리가 나 있었다.
이름과 학번을 아무렇게나 입력할 수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학생들이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열람실 한 책상이 중국집으로 변신했다.
짜장면 옆에는 짬뽕, 탕수육, 군만두까지 줄줄이 자리를 예약해 놓았다.
볶음밥까지 있었으면 중화요리 6인 세트가 완성될 판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좌석들을 둘러보니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였다.
한 책상에는 연예인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강동원 옆에 이나영, 그 옆에는 김태희와 고수까지.
마치 영화 세트장이 열람실 안에 꾸려진 듯한 풍경이었다.
그 옆 책상은 또 달랐다.
이번에는 현실을 넘어 애니메이션 속으로 들어간 듯, 둘리와 또치, 도우너, 희동이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조금 더 안쪽으로 가자 이번에는 스타크래프트 테란 군대가 집결해 있었다.
마린, 벌처, 골리앗, 발키리까지 나란히 자리하며 열람실 전체가 전략 시뮬레이션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중국집과 영화 세트, 만화 속 장면과 게임 세계가 동시에 공존하는, 그야말로 판타지 공간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열람실은 또 한 번 새로운 무대가 되었다.
역대 대통령들이 한자리에 모여 묘한 무게감을 풍겼다.
그 옆 책상에는 국가대표 축구팀이 단체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열람실은 청와대와 월드컵 경기장을 동시에 수용하는 기적을 펼쳐 보이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열람실 앞을 지날 때마다 "도대체 이거 누가 만든 거냐"는 불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괜히 고개를 푹 숙여졌다.
마치 내가 짜장면과 김태희, 마린과 대통령들까지 한자리에 초대해 놓은 장본인이라도 된 듯, 애꿎게 죄인이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데이터베이스와 연동할 수 없었던 사정을 아는 이는 없었으니, 비난의 화살은 오롯이 프로그램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학생회는 부랴부랴 "실명으로 예약해 주세요"라는 안내문을 붙이고, 양심을 지켜 달라고 연일 홍보했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화가 생겼고, 머지않아 본인 이름으로 자리를 예약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나는 아직도 그날, 문제의 시작을 알렸던 친구의 메시지 속 짜장면을 잊을 수 없다.
그래서 오늘의 요리는 그 소동의 주인공이었던 짜장면이다.
먼저 감자와 오징어, 새우를 한입 크기로 썰어 끓는 물에 살짝 데친다.
그 사이 고기를 볶다가 간장으로 밑간을 해준다.
고기에 핏기가 사라질 즈음 양파를 넣고 함께 볶는다.
양파가 투명해지면 약간의 물을 붓고, 볶아둔 춘장을 풀어 넣은 뒤 설탕과 굴소스로 맛을 잡는다.
이어 애호박과 데친 감자, 해물을 차례로 넣어 볶다가 전분물을 부어 농도를 맞추면 짜장소스가 완성된다.
마지막으로 삶은 중화면을 그릇에 담고 소스를 듬뿍 끼얹으면, 비로소 짜장면 한 그릇이 완성된다.
짜장면을 휘휘 비벼 한 입 먹어본다.
이 정도면 웬만한 식당 짜장면과 견줘도 밀리지 않는다.
오히려 건더기는 훨씬 풍부하다.
숟가락으로 퍼 올리면 고기, 감자, 해물이 푸짐하게 걸려 올라왔다.
의외로 중간중간 씹히는 오징어의 풍미가 별미였다.
아내의 젓가락질도 바빠졌다.
후루룩 후루룩 경쾌한 소리가 이어졌고, 곧 오랜만에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건 정말 맛있을 때만 드러나는 '진실의 미간'이었다.
나는 속으로 오늘 요리는 만점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식사가 끝나갈 무렵 아내에게 평점을 물어봤다.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만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뭐가 부족했어?
고기가 좀 더 들어갔으면 좋았을 텐데
사실 이 소스에는 고기를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정량의 두 배를 넣었다.
그런데도 부족하다니.
나는 조금 억울했다.
아내는 나와 같은 과의 후배다.
하지만 내가 만든 열람실 프로그램을 써본 적은 없다.
아내가 입학했을 때는 이미 내가 만든 프로그램이 사용 중지된 뒤였기 때문이다.
내가 만든 프로그램은 1년 남짓 쓰이다 다른 버전으로 교체됐고, 이후로도 여러 차례 손질과 개편을 거쳤다.
그럼에도 아내는 내가 만든 프로그램이 설치된 날의 소동 이야기를 유난히 좋아한다.
연예인과 캐릭터, 대통령과 축구선수까지 한자리에 앉아 있던 그 황당한 풍경은 상상만 해도 너무 웃기다고 말한다.
나는 사실 그때 상황이 조금 억울했다.
어쩔 수 없는 조건 속에서 만든 프로그램이었는데, 사정을 모르는 학생들은 불평을 쏟아냈으니 말이다.
변명조차 할 수 없었던 그 순간은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다.
열람실 소동을 알렸던 메시지 속 짜장면도, 고기를 두 배나 넣었는데도 부족하다고 평가받은 오늘의 짜장면도...
짜장면은 내게 늘 억울한 음식이다.
아내의 후기
짜장면
★4.9점
식당 음식 같은데도 집밥 느낌이 나는, 감칠맛 나면서도 자극적이지 않아 건강한 맛이었습니다.
야채와 고기가 듬뿍 들어간 집밥표 짜장면, 정말 너무 맛있었어요!
다만 신랑이 고기를 정량의 두 배 넣었다고 했지만, 제 입맛에는 조금 더 들어갔으면 해서 0.1점 감점했습니다.
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