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삼각김밥과 미슐랭 3스타

김치볶음밥, 계란국

by 퉁퉁코딩

오후 두 시, 강남역 한복판.

각자의 오전 일정을 마치고 아내와 만났다.

그 시간이라면 "점심은 뭐 먹었어?"가 자연스러울 텐데, 우리 입에서는 "점심은 먹었어?"라는 말이 나왔다.

둘 다 아무것도 먹지 않은, 극강의 공복 상태였다.

아주 절박하게 배가 고팠다.

그렇다면 당연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식사였다.

급한 일정도 없어 식사할 시간은 충분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밥 먹자"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발걸음을 돌려 방탈출 카페로 향했다.

귀엽게 꾸며진 인테리어, 장난스러운 소품들, 어딘가 오글거리는 스토리라인의 테마.

다행히 허기조차 잊을 만큼 아기자기한 분위기에 빠져 한 시간 동안 머리를 굴리며 문제를 풀었다.

결국 무사히 탈출에는 성공했지만, 두뇌에서 소모한 에너지만큼 우리의 배는 훨씬 더 깊은 굴속에 갇힌 듯 울부짖기 시작했다.

"안 되겠다. 우리 편의점 가서 삼각김밥이라도 먹자."

"그래."

우리 부부의 늦은 점심 메뉴는 소박하게 결정됐다.


우리는 편의점에서 무표정하게 김치볶음밥 맛 삼각김밥 두 개를 집었다.

계산을 마치고 전자레인지에 삼각김밥을 돌리는 1분이 그토록 길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데이트 중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떼운 적이 있었던가.

그런데 이상하게, 그 순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나는 삼각김밥을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옆에서는 하필 포장 상태가 좋지 않은 걸 골라 아직 뜯지도 못한 채 허둥대는 아내가 보였다.

괜히 웃음이 났다.

"우리 너무 웃기지 않아? 저녁엔 미슐랭 식당가는데, 점심은 편의점이야."

아내는 포장을 다 뜯고 김밥을 한입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생이 그런 거지 뭐."



그날은 우리 인생 최초로 미슐랭 스타 식당을 예약한 날이었다.

게다가 그게 그냥 스타가 아니라, 2025년 기준 한국에서 단 하나뿐인 미슐랭 3스타였다.

완전한 충동에서 시작된 계획이다.

3일 전, 집 근처 식당 평점을 확인하려 예약 앱을 둘러보다가, 우연히 그 미슐랭 3스타 식당에 빈자리가 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항상 예약이 꽉 차 있어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고 들었던 곳인데 누군가 예약을 취소한 모양이었다.

나는 아내에게 그 사실을 바로 알리지 않고 슬쩍 물었다.

"우리나라에 미슐랭 3스타 식당이 딱 하나 있어. 근데 거기가 1인당 40만 원이래. 그 정도 가치가 있을까?"

아내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았다.

"충분히 가치 있을 것 같은데?"

그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미소를 지으며 '확정'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예약 화면을 아내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3일 뒤에 가보자."

"뭐!! 뭐라고??"



그렇게 우리의 첫 미슐랭 3스타 여정이 시작됐다.

예약 시간은 저녁 여섯 시.

들뜬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우리는 아침부터 금식 수행에 돌입했다.

배를 비워둬야 진짜 맛을 느낄 수 있다는 촌스러운 믿음 하나로 말이다.

유난을 떨던 우리는 결국, 잘 닦이지도 않은 편의점 식탁에서 삼각김밥으로 허기를 달래고 있었다.


3스타를 온전히 즐기기 위해 나름의 최선을 다한 결과가 이렇게 단출할 수가 없다.

삼각김밥으로 위장을 워밍업한 우리는 오락실에서 틀린그림 찾기를 하고, 소품샵을 돌며 인형을 구경했다.

사실 우리는 원래부터 그런 고급 식사와는 거리가 먼 부부였다.

오마카세니, 파인다이닝이니 하는 말들은 유튜브 영상에서나 보던 세계였다.

특별한 날이라고 해도 분위기 있는 식당보다 내 요리의 맛을 먼저 찾는 편이었다.

"스테이크 먹으러 갈까?"보다는 "스테이크 구울까?"가 더 익숙한 부부였다.

그래서 이번 미슐랭 3스타는 단순한 식사를 넘어 맛의 예술관으로 들어서는 우리 부부의 문화 체험이었다.

삼각김밥의 여운을 입가에 남긴 채, 우리는 시간에 맞춰 '한국 최고 요리'를 만나러 갔다.



직원이 정중히 문을 열어주자 공기마저 달랐다.

창밖으로 장독대들이 보이는 큰 유리창 옆 자리로 안내받았다.

코스 요리가 진행될수록 노을이 지며 하늘빛이 변해갔다.

우리는 그 변화까지 함께 즐길 수 있는 ‘하늘색 코스’를 덤으로 받은 셈이었다.


요리의 순서는 정해져 있었지만 우리 부부의 음주 페어링 여행은 서로 다른 대륙을 향했다.

아내는 와인 페어링으로 유럽의 포도밭, 나는 전통주 페어링으로 양조장의 누룩 창고로 떠났다.

요리가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

접시와의 조화까지 계산된 듯한 한입 크기의 정갈한 음식들이 차례로 등장했다.

나는 인생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젓가락을 들었다.

하나하나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느낀 맛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균형'이었다.

모든 요리에서 맛과 식감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았다.

각자 자리를 지키되, 서로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육회 요리는 육회에 없는 바삭함을 주기 위해 타르트를 곁들였는데 그 바삭함조차 절묘했다.

식감의 대비를 위한 설계라고 아내에게 아는 척 했지만 사실은 그냥 내 추측이었다.

쉐프의 의도까지 파악하기엔 내 식견이 식탐보다 조금 부족했다.

양념은 매실고추장이었는데, 매콤함이 입안을 세게 때리는 대신 살짝 포옹하듯 퍼졌다.

신선한 육회의 맛을 한 점도 해치지 않았다.

거기에 장어와 계란 파우더까지 얹혀 있었는데 그 이후의 해석은 미식평론가가 아닌 나에겐 무리였다.

특별히 튀는 맛이 없으니 '고소하다', '짭짤하다', '부드럽다', '쫄깃하다' 같은 단어들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냥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저 맛있었다.


세 시간은 정말 빠르게 흘러갔다.

입안에서 계절이 바뀌는 듯한 순간들이었다.

식재료들의 맛을 훌쩍 뛰어넘는 제철의 힘을 온전히 느낀 시간이었다.

옥수수의 우아함, 찹쌀의 카리스마, 간장과 참기름의 정갈한 태도까지 배웠다.

내가 알던 맛의 세계가 살짝 재정의된 느낌이었다.

그림2.jpg



두세 달치 식비를 한 끼에 쏟아부었지만, 배부름의 지속 시간은 결코 금액과 비례하지 않았다.

다음날 점심이 되자 우리의 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정직하게 울기 시작했다.

미슐랭 3스타를 경험한 위장이라면 조금은 양심이 있어야 할 텐데 그런 건 전혀 없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미션!!

미슐랭 3스타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아내의 입맛을 만족시켜야 했다.

가혹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허세는 남아 있었다.

"내가 어제 먹은 것 중 하나 해줄게."

아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오빠가 할 수 있는 게 있다고???"

"기다려봐."


나는 괜히 자신감 넘치는 척하며 주방으로 향했다.

그 어떤 파인다이닝에서도 구할 수 없는 비밀 재료를 꺼냈다.

바로 할머니표 김치다.

숙성 200일 차, 향만으로도 사람을 깨우는 절정의 상태였다.

지금이 딱 볶아먹거나 찌개로 끓여먹기 좋은, 그 미묘한 산도의 황금기.

어떤 미슐랭 셰프라도 구할 수 없는 식재료였다.


오늘의 메뉴는 김치볶음밥이다.

먼저 스팸을 캔째로 수저로 긁어가며 팬에 올린다.

도마와 칼을 쓰지 않아 설거지를 최소화할 수 있다.

기름이 살짝 돌기 시작하면 스팸을 부셔가며 굽는다.

노릇노릇해질 때까지 굽다 보면 가위를 들어 김치를 잘게 자른다.

굴소스와 고추장도 반 숟갈씩 넣는다.

마지막으로 밥을 넣고 휘리릭 볶는다.

불을 끄고 참기름을 살짝 두른 뒤, 한 번만 더 고르게 섞어주면 완성이다.

그 순간 주방에 퍼지는 고소한 향은 어제의 미슐랭 코스보다 더 현실적이고 더 따뜻하다.

그림3.jpg


함께 곁들일 국은 계란국.

코인육수, 치킨파우더, 후추, 그리고 파를 넣고 팔팔 끓이다가 마지막에 잘 푼 계란을 살살 넣는다.

몇 번이고 반복해 온, 내가 빨간 요리를 할 때마다 끓이는 단골 국물이다.

KakaoTalk_20250927_101856664_01.jpg



KakaoTalk_20250927_101856664_02.jpg


상을 차려놓자 아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제 메뉴 중에 김치볶음밥이 있었어?"

"있었지. 편의점에서."

"아 뭐야~"

"왜? 실망했어?"

"아니야. 난 이것도 좋아. 히히."


미슐랭 셰프 대신 메뉴판 없는 우리 집 식당의 셰프로 바뀐 오늘의 점심.

아내가 숟가락을 들어 계란국을 한입 떠먹었다.

나도 김치볶음밥을 크게 한 숟갈 퍼 넣었다.

그 순간, 혀끝에서 익숙한 전율이 올라왔다.

기름지고, 짜고, 매콤했다.

미슐랭 3스타에선 절대 느낄 수 없는 현실의 맛이었다.

그곳에서 균형을 느꼈다면, 여기서는 '혼돈속의 조화'을 느꼈다.

조금 자극적이었지만, 입안 가득 퍼지는 익숙함이 이상하게 편안했다.

어제의 셰프들이 쏟아부은 열정과 정성을 내 김치볶음밥과 비교하는 건 실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차이가 꼭 열등함을 의미하진 않는다.

왜냐하면 오늘의 김치볶음밥은 누가 봐도 완벽한 우리 집의 맛이었으니까.


특히 오늘따라 계란국이 유난히 잘됐다.

맑고 따뜻한 국물 한 숟갈이 입안의 매운맛을 부드럽게 감싸며 조화를 이뤘다.

나는 한 그릇을 순식간에 비우고, 두 번째 그릇을 국자로 펐다.

미슐랭에선 결코 누릴 수 없는 특권인 '리필'이란 것이다.


식사후 어제의 은은한 클래식 대신, 싱크대에서 찰랑거리는 물소리를 들으며 뒷정리까지 마쳤다.

살짝 쌀쌀해진 저녁 공기를 즐기러 집앞 공원으로 향했다.

입안엔 아직 김치볶음밥의 여운이 남아 있었지만 걸으며 나눈 대화의 주제는 어제의 미슐랭 3스타였다.

하루가 지났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그때 그 맛을 복기 중이었다.

뭐가 제일 좋았는지, 뭐가 살짝 아쉬웠는지 진지하면서도 흥이 섞인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러다 문득, 현실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말이야... 우리 미슐랭 먹어보겠다고 점심은 삼각김밥으로 때우고, 다 먹곤 택시비 아까워서 지하철로 한 시간 넘게 걸려 집에 온 거 이게 맞는 걸까?"

아내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왜? 난 대중교통으로 집에 올 수 있는 우리가 더 좋은걸?"

그 말에 나도 따라 웃었다.

그래, 어쩌면 미슐랭보다 더 귀한 건 비싼 저녁을 먹고도 여전히 같은 방향 지하철을 함께 타는 우리 일지도 모른다.


잠시 후 아내가 덧붙였다.

"근데 이번엔 너무 무리했으니까, 올해 결혼기념일은 특별히 챙기지 않아도 좋아."

"그럼 크리스마스는?"

"음... 그것도 마찬가지야."

정말 건너뛰겠다는, 진심 어린 아내의 눈빛은 분명했다.


나도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확신이 들었다.

그때가 되면 나는 또 장을 보고, 팬을 달궈 무언가를 굽고, 냄비 위에서는 어김없이 무언가가 보글보글 끓고 있을 거라는 걸.

파인(좋은) 다이닝(식사)이란 게 별거랴.

우리끼리 웃으며 맛있게 먹는 그 한 끼가 그게 바로 진짜 파인한 다이닝 아니겠는가.


아내의 후기

김치볶음밥과 계란국
★5.0점
신랑표 김치볶음밥과 계란국은 이제 하나의 경지에 오른 듯합니다.
자주 먹는 익숙한 조합인데 오늘은 유난히 더 맛있게 느껴졌어요.
짭조름한 김치볶음밥과 부드러운 계란국의 조화!!
그야말로 최고의 단짝입니다.
평소 신랑이 식사를 차려주는 일상에 다시 한 번 감사함을 느끼게 된 한 끼였어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