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츠마부시(나고야식 장어덮밥)
내가 아는 요리의 고수가 있다.
1년에 두세 번쯤 그분의 집을 찾는다.
그럴 때마다 식탁은 8첩 반상쯤은 애교인, 예약제 한식당 수준으로 차려진다.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손맛.
그리고 밥상 전체가 하나의 전시작품처럼 완벽한 플레이팅.
숟가락을 들기도 전에 절로 감사 인사가 나올 만큼의 정성과 품격이 느껴진다.
그분에게는 이상하게도, 그 완벽한 요리 내공을 단 한 스푼도 물려받지 않은 둘째 딸이 있다.
참으로 오묘한 유전자의 신비다.
어느 날, 그 딸이 한 남자에게 청혼을 했다.
그리고 결혼식장에서 요리의 고수와 수많은 하객들 앞에서 두 사람은 당당히 세 가지 혼인 서약을 낭독했다.
그중 신랑이 선언한 첫 번째 서약은 이랬다.
"음식은 하는 것보다 먹는 걸 더 좋아하는 신부를 위해, 요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그 후로도 혼인 서약 1번은 철저히 이행 중이다.
신랑은 주방에서 열심히 프라이팬을 흔들고, 신부는 오늘도 "진짜 맛있다!"라며 감탄사를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아주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나는 그 요리의 고수를 장모님이라 부른다.
처가에 갈 때마다 6인용 식탁은 늘 작다.
사람이 많아서는 아니다.
메인 요리가 세 가지쯤은 기본이고, 밑반찬까지 합치면 젓가락이 어디로 향해야 할지 잠시 길을 잃는다.
지도가 필요할지도 모르지만 사실 없어도 상관없다.
어디로 향하든 성공뿐이니 길을 잃어도 즐겁다.
며칠 전에도 그랬다.
전복, 새우, 맛살이 노릇노릇하게 부쳐진 전이 반짝이는 기름막 위에서 향긋한 내음을 퍼뜨리고, 갈비찜은 윤기 흐르는 소스로 고기를 꼭 안고 있었다.
된장찌개엔 소고기가 듬뿍 들어가 국물이 맑고도 깊었다.
숟가락으로 한입 뜨는 순간, 입안 가득 행복의 미열이 퍼졌다.
하지만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었다.
바로 장어구이였다.
직접 초벌까지 하신 장모님의 장어가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가자 피어오르는 연기마저 향기로웠다.
살은 통통했고, 껍질은 바삭했다.
그날따라 유난히 기름이 더 반짝이던 장어 한 점을 입에 넣는 순간 기력이 회복되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
아마도 장어에는 소스뿐 아니라 장모님의 마음이 함께 발라져 있었을 것이다.
장모님 음식을 먹을 때마다 인간의 위장은 생각보다 훨씬 탄력적인 기관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식사를 마치면 나의 최애 후식이 기다린다.
장모님이 요리의 고수라면, 장인어른은 커피의 고수다.
그 자리에서 직접 원두를 갈아 내려주시는데, 그 깊이가 일반 카페와는 분명히 다르다.
입안에 머무는 쌉싸래한 향과 부드러운 온도가 어찌나 조화로운지, 배가 아무리 불러도 이 커피만은 포기할 수 없다.
직장에서는 점심을 먹고 동료들과 카페에 가는 게 일상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동료들은 나에게 무엇을 마실지 묻지 않는다.
나는 카페의 음료를 그다지 즐기지 않아, 주문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자발적으로 먼저 커피를 찾는 유일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완벽한 한상에 완벽한 커피까지 더 바랄 게 없는 조화다.
그런 호사를 누리는 미완의 사위로서 감사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준비해 주신 한 끼 식사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장모님께서는 거기서 멈추지 않으셨다.
직접 튀긴 김부각과 장어뼈, 남은 전과 장어까지 한 보따리 정성으로 싸주셨다.
그날 나는 손보다 마음이 더 묵직해진 상태로 집을 나섰다.
그런데 그 보따리 속엔 음식만 들어 있지 않았다.
6개월 전, 나고야 여행에서 내가 장담해 버린 한 '약속의 씨앗'도 함께 들어 있었다.
그때 아내가 가장 맛있게 먹었던 건 나고야식 장어덮밥, 히츠마부시였다.
그 식당에서 나는 괜한 자신감이 솟았다.
"언젠가는 나도 만들어줄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장어 손질에 굽는 것까지, 그 복잡한 과정을 생각하며 도전은 늘 다음 기회로 미뤄졌다.
하지만 이제 장모님이 싸주신 초벌 된 장어가 생겼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내는 신이 나 있었다.
"이제 드디어 히츠마부시 해주는 거지?"
이제 더는 미룰 근거도, 숨을 구석도 없다.
약속을 이행할 시간이다.
오늘의 임무는, 나고야의 히츠마부시를 재현하는 것이다.
히츠마부시의 장어는 보통 숯불에 구워 불향을 입힌다.
하지만 우리 집에서 숯불을 피웠다간 불향보다 소방차가 먼저 도착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나는 작은 편법을 택했다.
냄비에 종이호일을 깔고 그 위에 녹차가루를 흩뿌린다.
찜기를 올리고 장어를 얹은 뒤, 뚜껑을 닫고 중불로 약 10분 가열한다.
녹차가루가 타며 내뿜는 은은한 연기가 마치 훈연하듯 장어에 스며든다.
그다음엔 간장, 맛술, 청주, 설탕을 섞어 만든 소스를 팬에 붓고 장어를 졸이듯 구워낸다.
소스가 보글보글 끓으며 캐러멜처럼 농도가 깊어지는 순간이 있다.
그때 장어를 뒤집으면 껍질이 반짝이며 완벽한 윤기를 입는다.
히츠마부시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육수다.
식당에 따라 장어뼈 육수나 찻물을 사용하지만 나는 대신 다시마와 코인육수를 끓여 약불로 줄인 뒤 가쓰오부시를 넣고 천천히 감칠맛을 우려냈다.
먹기 좋은 크기로 장어를 썰어 밥 위에 올리고, 김과 깻잎, 송송 썬 쪽파, 와사비, 그리고 약간의 절임 반찬을 곁들이면 비로소 메뉴판 없는 우리 집 식당의 히츠마부시가 완성된다.
사실 히츠마부시의 '히츠'는 동그란 나무 그릇을 뜻한다.
물론 이 한 끼를 위해 장어보다 비싼 5만 원이 넘는 그릇을 직구할 수는 없으니, 깔끔하게 생략하기로 했다.
이 정도면 한국 가정에서도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한, 실현 가능한 히츠마부시라고 자평해 본다.
상을 차리고 아내와 마주 앉았다.
작은 밥그릇에 히츠마부시를 4분의 1쯤 덜어낸다.
히츠마부시에는 특별한 4단계가 있기 때문이다.
1단계는 아무것도 넣지 않고 장어덮밥 그대로 먹는다.
훈연의 향이 의외로 잘 입혀졌다.
과정을 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숯불에 구웠다고 해도 믿을 만하다.
아내도 신기하다는 듯 냄새를 킁킁 맡아본다.
짭조름하고 기름진 장어의 맛이 입안 가득 퍼진다.
2단계로 다시 4분의 1을 덜고 와사비, 김, 채소를 올려 비벼 먹는다.
1단계에서 느끼해진 입맛이 상쾌하게 리셋된다.
입안에서 와사비의 알싸함이 스쳐 지나갈 때 아내의 얼굴엔 자연스러운 미소가 번진다.
이번엔 준비해 둔 국물을 부어 먹는 3단계다.
장어덮밥에 뜨거운 국물을 붓는 순간 장어 간장향이 국물 전체로 퍼져 주방이 향기로워진다.
일본에서는 이 방식을 '오차즈케'라 부른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굴비를 녹찻물에 말아먹는 밥과 비슷하다.
한 숟갈마다 묘하게 안락한 향이 올라온다.
요리를 하며 쌓인 피로가 스르르 녹아내린다.
마지막은 정해진 방식이 없다.
자신이 가장 맛있게 느낀 방법으로 먹으면 된다.
나는 국물을 붓고 와사비를 넣어 모든 걸 한데 섞었다.
히츠마부시는 맛을 넘어, 먹는 방식마다 새로운 즐거움까지 주는 요리다.
식사를 마친 아내는 장모님께 주신 장어 잘 먹었다며 사진을 보냈다.
곧바로 웃음이 오가는 메시지가 이어졌다.
장모님의 음식만 먹으며 자라온 아내가
이제는 내 요리를 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장모님과 나의 요리는 맛도, 스타일도, 범위도 전혀 다르다.
그래도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그 둘 다 아내를 웃게 만든다는 점일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다른 사람이 해준 밥이 제일 맛있다."
그런데 그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라면,
그건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하나의 축복 아닐까.
아내에게 밥을 해주는 사람이 장모님에서 나로 바뀐 지 어느덧 몇 해가 흘렀다.
결혼 전에도, 지금도 아내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을 매일 먹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그 밥을 만들어주는 특권을 이어받았다.
결국 요리란, 누군가의 하루를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드는 일 아닐까 싶다.
나는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결혼식장에서 선언했던 혼인 서약 1번을 지키려 한다.
아내가 맛있게 먹는 얼굴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행복.
그건 내가 가진, 가장 일상적인 기적이다.
아내의 후기
히츠마부시
★5.0점
제가 일본에서 정말 맛있게 먹었던 히츠마부시를 신랑이 직접 요리해 주다니!!
감동 또 감동이었습니다.
약간 기름질 수 있는 장어를 와사비로 잡아주니 느끼하지 않고, 숯불 향이 입혀진 간장 소스가 오차즈케 육수에 녹아들 때는 그야말로 최고 또 최고였습니다!
마음은 다 먹고 싶었지만 밥 양이 꽤 많아 몇 숟갈 남겼어요ㅎㅎ
친정어머니가 싸주신 장어를 신랑이 최고의 요리로 승화시켜 준 정말 만점짜리 한 끼였습니다!
P.S.
사실 나고야 식당에서 먹었던 히츠마부시 사진을 올릴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그릇의 모양부터 장어구이의 색감까지, 모든 게 내 요리를 압도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아내가 옆에서 말했다.
"내 신랑 요리가 뭐가 어때서! 메뉴판 없는 식당의 단골손님인 나에겐 여기가 최고의 식당이라구!!"
그 말에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용기 내어, 나고야에서의 장어덮밥 사진도 함께 올려본다.
P.P.S.
[연재를 마치며]
어느덧 연재가 30화를 맞이했습니다.
내가 만든 요리에 아내의 평점을 받아보자는 소소한 발상으로 시작된 연재였습니다.
처음엔 과연 30화를 채울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한 끼 두 끼 해 먹다 보니 어느새 이 순간이 찾아왔네요.
그동안 흘러가 잊힐 수도 있었던 밥상에 저와 아내의 이야기를 곁들여 기록할 수 있었던, 참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다음 주부터는<메뉴판 없음 재료는사랑 단골은한명 2>로 찾아뵙겠습니다.
식사는 계속되니까요.
제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