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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디올, 나는 티파니

스테이크 오 푸아브르

by 퉁퉁코딩

더운 여름을 지나 아침 공기가 살짝 시원해지며, 괜스레 무언가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작년 가을이었다.

그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진지하게 인터넷을 뒤지고 있었다.

목적은 단 하나, 아내의 심장을 정확히 타격할 다이어리 한 권을 찾는 것.


아내는 일기 쓰기를 좋아한다.

하루의 기쁨을 적고, 갑자기 훅 떠오른 다짐을 써 내려간다.

카페에서 우연히 본 마스킹테이프 문구를 운명의 메시지라고 믿고 기록해두기도 한다.

다투고 난 뒤 나에 대한 불만을 적어두기도 하고, 어떤 날은 본인이 잘못한 부분을 돌아보며 반성의 한 줄을 남기기도 한다.

그러니 아내에게 다이어리는 사는 맛을 차곡차곡 담아두는 작은 보물상자였다.

그 보물상자를 고르는 데 가장 중요한 기준은 종이 재질도 줄간격도 아니다.

바로 디자인이다.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야 더 자주 꺼내보게 되고, 그만큼 하루의 기분도 더 자주 기록할 수 있으니까.

힘겨운 하루라도 예쁜 다이어리를 펼치는 순간 마음이 스르르 풀리니까.

나는 파스텔 색과 타일 무늬, 미니멀리즘과 앤틱 감성 사이를 오가며 수십, 수백 개의 다이어리를 검토했다.


그러다, 빛나는 무언가가 화면 한가운데서 "여기야" 하고 손을 흔들듯 나타났다.

너무나 화려한 다이어리였다.

새하얀 배경 위로 산호와 해초가 폭죽처럼 퍼져 있었다.

그 사이를 금빛 포일이 박힌 조개와 불가사리, 작은 물고기들이 반짝이며 오갔다.

양옆 붉은빛 해마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허리는 사람, 꼬리는 물고기인 인어 둘이 아래쪽에서 서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중앙에는 리본 모양의 띠가 산호를 감싸며 프랑스어 문장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색감과 비늘 표현이 지나치게 정교해, 마치 표지 한 장에 작은 바다를 통째로 봉인해 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이게 정말 다이어리가 맞나 싶은 과한 아름다움이었지만, 왠지 아내가 좋아할 화려함이라는 확신이 묘하게 들었다.


그런데 디자인보다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가격이었다.

살펴보던 다른 다이어리들에 비해 0이 하나 더 붙어 있었다.

뭔가 잘못 본 줄 알았다.

그리고 그제야 브랜드 로고가 눈에 들어왔다.

크리스챤 디올.

명품 브랜드에서 다이어리까지 만든다는 사실을 그날 처음 알았다.


순간 내 마음속에서는 작은 회의가 열렸다.

이걸 아내에게 보여줘야 하나, 아니면 인터넷의 심연 속으로 조용히 던져 버려야 하나.

내가 아내의 취향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그런 무심한 남편이길 바라는 소박하고 순진한 마음으로 사진을 아내에게 건넸다.

하지만 아내의 반응은 그 다이어리의 디자인보다도 더 화끈했다.

눈은 반짝이고 목소리는 한층 밝아졌다.

"와, 이게 뭐야! 이런 디자인의 다이어리를 도대체 어디서 찾았어?"

아내 역시 가격을 보고 잠시 고민하는 듯했지만, 그 고민은 정말 아주 잠시였다.

아내는 결국 클릭했다.

구매 완료.

그 후로 아내는 그 다이어리에 행복한 순간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표지를 펼치는 순간 얼굴이 환해졌다.

가끔은 비합리적인 사치가 인생의 행복을 '대놓고' 책임져줄 때도 있나 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의 아내 얼굴을 보면 그 사치가 그다지 비합리적으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아내는 그 행복을 혼자만 누리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작년 결혼기념일, 내 앞에 놓인 선물 상자를 열어보는 순간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안에는 영롱한 푸른빛을 품은, 티파니 다이어리가 들어 있었다.

여러 브랜드가 저마다 고유의 색을 내세우지만, 티파니 블루는 유난히 사람 마음을 먼저 설레게 한다.

심지어 나 같은 아저씨의 마음에도 묘하게 스며들었다.

게다가 티파니 블루보다 더 반짝이는 메시지까지 함께였다.

하나뿐인 내사랑
OO이는 내사랑을 존경합니다
선물을 드릴 수 있어 행복합니다
하시는 일 모두 잘 될 거예요
진심으로 마음으로
곁에서 응원합니다
사랑합니다


나는 졸지에 회사에서 겉모습은 투박하지만, 티파니 다이어리를 들고 다니는 호사스러운 과장님이 되었다.

거기다 이건 가죽 제품이었다.

아내의 디올 다이어리보다 가격이 거의 두 배 가까이 더 나갔다.

왠지 한 장 한 장을 아껴 써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회의록이나 업무 메모 같은 현실적인 것들은 회사에서 나눠준 촌스러운 갈색 다이어리에 맡겼다.

티파니 다이어리에는 오직 '내가 조금 더 잘 살기 위한 계획들'만 기록했다.

푸른빛만큼이나 내 하루를 조금 더 밝게 비춰주길 바라면서.


그렇게 우리는 아내는 디올, 나는 티파니를 들고 각자의 행복한 순간을 사치스럽게 기록하는 부부가 되었다.

누군가는 비합리적인 소비라며 코웃음을 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 사치는 서로의 마음을 더 선명하게 들여다보게 해주는 작고 사랑스러운 이벤트 같은 것이었다.



1년이 흘러 어느새 아내의 다이어리는 마지막 페이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3주년 결혼기념일이 찾아왔다.

작년에 명품 다이어리로 사치를 부렸듯 올해도 조금은 다른 의미의 사치를 부려보기로 했다.

3주년을 기념할 요리는 스테이크 오 푸아브르, 우리말로 하면 '후추 스테이크'다.

후추를 아주 넉넉하게 사용하는 요리다.

후추는 대항해시대의 주인공이었다.

한 상자의 값이 거의 내 입사 초봉과 맞먹었다.

한 알만 있어도 세금이나 집세를 해결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재산 상속 목록에 이름을 올릴 정도였다.

그런 후추를 듬뿍 뿌려 굽는 스테이크라니, 어찌 보면 이름부터 이미 '사치 선언문' 같은 음식이다.


원래 후추가 귀했던 이유 중 하나는 당시 고기 누린내를 잡기 위해 꼭 필요했기 때문이라 한다.

하지만 지금 시대에 누린내 나는 고기를 찾는 건 오히려 더 어려운 일이 되었다.

게다가 이 요리는 소스를 듬뿍 더하는 방식이라 굳이 최상급 고기를 고집할 이유가 없다.

그냥 적당히 고기여도 충분히 훌륭하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적당한 날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결혼기념일이라는 말이 나의 이성을 아주 부드럽게 무장해제시켰다.

수입 소고기로도 충분히 근사하게 만들 수 있는 요리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육점에서 가장 높은 등급의 한우 채끝살을 주문하고 말았다.


고기에 소금을 톡톡 뿌리고 기름을 문지른 뒤, 으깬 통후추를 사정없이 앞뒤로 묻힌다.

대항해시대였다면 이 행동은 거의 재산을 탕진하는 수준이었을지도 모른다.

달궈진 팬에 올리자마자 치익 하는 소리가 난다.

앞뒤로 2분 30초씩, 평소보다 한층 더 신경을 곤두세워 구워낸다.

고기를 꺼내 레스팅 하며 내부 온도를 올리고, 육즙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한다.

그 사이 소스를 만들어야 한다.

고기를 굽던 팬에는 기름과 후추 향이 그대로 배어 있다.

그 위에 다진 파와 마늘을 넣고 볶아 향을 끌어올린다.

향이 충분히 올라오면 시금치를 넣어 숨이 죽을 때까지 볶아준다.

여기에 버터, 우유, 치즈를 넣고 은은하게 끓이며 농도를 잡는다.

마지막으로 소금으로 간을 맞추면 소스가 완성된다.

접시에 소스를 넉넉히 깔고, 잘 익은 스테이크를 썰어 조심스레 올리면 3주년을 위한 사치스러운 한 접시가 완성된다.



스테이크에 와인을 곁들이고, 편안한 잠옷 차림으로 소박한 3주년 파티가 시작되었다.

식탁 위에는 촛불 하나 없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어느 멋진 레스토랑보다 분위기가 좋았다.

와인잔을 가볍게 부딪치고 향을 맡은 뒤, 고기를 한입 베어 물었다.

입 안에서 고기가 살살 녹자 나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고기가 좋아서 그런가? 너무 맛있네?"

그러자 아내가 주저 없이 답했다.

"고기도 좋지만, 오빠가 잘 구워서 맛있는 거지. 너무 부드럽고 맛있어. 어떻게 이렇게 잘 구웠어?"

그 말투에는 과한 감탄도, 기념일 분위기를 억지로 끌어올리려는 힘도 없었다.

그저 조용하고 담담한 진심이 스르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식탁에서는 '나랑 결혼해 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평생 행복하게 해 줄게' 같은 직접적인 낭만의 문장은 단 한 줄도 오가지 않았다.

하지만 스테이크의 맛을 고기 탓이 아니라 내 요리 실력 덕분이라고 말해주는 아내의 따뜻한 배려가 어떤 사랑 고백보다 더 깊이 마음을 건드렸다.



굳이 이렇게까지 돈을 써야 하나 싶은 명품 다이어리도, 굳이 한우 채끝살을 사야 하나 싶은 선택들도, 돌이켜보면 그 '굳이'의 순간들이 우리의 삶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

아내가 디올 다이어리를 펼칠 때마다 살짝 지어 보이는 미소.

내가 티파니 다이어리에 조심스레 글씨를 적으며 느끼는 이상한 뿌듯함.

그리고 후추를 넉넉히 뿌린 최상급 고기 앞에서 서로의 노력을 기꺼이 인정해 주는 마음.

돌아보면 그런 사치들이야말로 평범한 하루를 조금 더 다채롭게 물들이는 수채화 같은 존재였다.


가끔은 필요 이상의 사치가 우리의 삶을 행복 쪽으로 돌려놓는다.

어쩌면 우리가 누린 사치는 값비싼 물건 그 자체가 아니라, 기쁨을 나누기 위해 용기 내어 조금 더 마음을 쓰고 조금 더 지불해 보는 그 '여분의 행동'인지도 모른다.

삶이 조금 밋밋해질 때는, 후추 뿌리듯 사치를 살짝 더해보는 것도 제법 괜찮다.


아내의 후기

스테이크 오 푸아브르
★5.0점
첫 입을 베어무는 순간 스테이크가 살살 녹아 눈이 절로 휘둥그레졌습니다.
후추의 얼얼함과 아래에 깔린 크림소스가 어우러져 정말 훌륭한 조화를 이뤘습니다.
좋은 부위를 쓴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스테이크가 완벽하게 구워져 입안에서 사르르 녹았습니다.


P.S.

스테이크로 사치를 부렸지만, 우리의 입맛은 결국 너무도 소박했다.

고기를 다 먹고 난 뒤 입안에 살짝 남은 느끼함, 그리고 위장이 은근히 보내는 '조금 더'의 신호.

우리는 그 미묘한 허전함을 외면하지 못했다.

3주년 파티의 화려한 엔딩을 장식한 디저트는 바로 봉지라면 한 개였다.

라면 앞에서는 서로의 젓가락이 더욱 바빠졌다.

사치로 시작해 라면으로 마무리하는, 이보다 현실적인 로맨스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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