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루틴

두부김치, 황태미역국

by 퉁퉁코딩

나는 여행을 갈 때 짐을 많이 챙기지 않는 편이다.

여벌옷은 최소한으로, 세면도구는 꼭 필요한 것만 챙긴다.

만약을 대비해 넣는 것도 상비약 몇 알과 보조배터리 하나 정도다.

그 이상은 과하다고 느낀다.


아내 역시 짐 욕심이 없는 편이라 우리의 여행 가방은 언제나 가볍다.

공항에서 캐리어 무게를 재며 긴장해 본 적도 없다.

애초에 일주일쯤 되는 해외여행은 기내용 가방 하나면 충분하다.

여행은 삶의 자리를 잠시 옮기는 일이지, 짐을 옮기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나의 여행 가방에 들어가기라곤 생각지 못했던 예외가 하나 생기기 시작했다.

바로 책이다.

책을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다.

집에서도 읽고, 카페에서도 읽고, 잠들기 전에도 읽는다.

다만 여행만큼은 다를 거라 생각했다.

호텔 창밖에는 평소 보지 못하던 풍경이 있고, 어쩌면 다시는 오지 못할지도 모르는 곳인데 굳이 종이 위의 글자를 들여다본다는 건 왠지 최적화 알고리즘을 벗어나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올해 여름, 여행이라 부르기엔 애매한 사정으로 여의도의 한 호텔을 찾게 되었다.

마음이 움직이는 맛집도 없었고, 호텔 근처에는 굳이 시간을 내어 찾아가고 싶은 곳도 없었다.

다행히 호텔 안에는 라운지가 있었다.

그럼 거기서 책이나 읽을까?

책을 읽자고 먼저 말한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날 처음으로 여행 가방에 책을 넣어 나섰다.


새를 좋아하는 아내는 페이지마다 새 그림이 가득한 책을 골랐고, 나는 마침 브런치 작가 미친 PD님의 북콘서트에 갈 예정이어서 그분의 책을 챙겼다.

체크인을 마치고 책을 들고 라운지로 내려갔다.

간단한 다과를 앞에 두고 각자 책을 펼쳤다.

읽다가 고개를 들면 창밖 풍경이 있었고, 다시 내려다보면 문장이 이어졌다.

어느 문장에선 아내가 웃었고, 어느 페이지에선 내가 이 부분 좀 보라며 책을 내밀었다.

각자 다른 책을 읽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지난 몇 시간은 이상하게도 꽉 찬 느낌이었다.

생각보다 그 기억이 꽤 좋았던 모양이다.

그 이후로 책은 여행 가방에서 빠지지 않는 물건이 되었다.

우리는 숙소 예약만큼이나 어떤 책을 가져갈지도 함께 고민하게 되었다.



가을에는 송도의 한옥 숙소를 찾았다.

책 읽기가 더없이 잘 어울리는 계절이었다.

운 좋게도 두 시간이나 이른 얼리 체크인이 가능했다.

책을 읽기엔, 더할 나위 없이 넉넉한 여유까지 모든 조건이 완벽했다.


숙소에는 작은 뒷마당이 딸려 있었다.

내 키보다 조금 높은 돌담 너머로 소나무 몇 그루가 서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정원을 지나왔고,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렸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작은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각자 자리를 잡고 자연스럽게 책을 들었다.

아내는 철학책을 나는 또 다른 브런치 작가 카르멘 님의 책을 펼쳤다.


처음엔 책을 읽는 게 좋았고, 그다음엔 책을 읽는 아내를 보는 게 더 좋았다.

그러다 보니 책장을 넘기는 속도보다 아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횟수가 더 많아졌다.

결국 책을 덮었다.

맥주 한 캔을 따서 천천히 마시며 말없이 책 읽는 아내를 바라봤다.

그 장면 자체가 이미 충분한 독서처럼 느껴졌다.

체크아웃 날에도 우리는 일찍 일어났다.

커피를 내려놓고 아침 공기를 마시며 다시 책을 펼쳤다.

숙소를 떠날 때의 마음은 처음 왔을 때보다 조금 더 채워져 있었다.



이제는 해외여행에서도 책이 빠질 수 없게 되었다.

여권 다음으로 책을 챙겼는지 한 번 더 확인하게 된다.

지난달 나고야 여행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엔 아내가 카르멘 작가님의 책을 읽었다.

함께 북콘서트에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나는 사전을 만드는 출판사 직원들의 이야기를 담은 일본소설을 챙겼다.

여행지에서 그 나라의 언어 이야기를 읽으니 괜히 현지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책 읽기 좋은 카페를 찾았다.

나란히 앉아 각자 책을 펼치기 위해서였다.

저녁 이후 문을 연 카페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스타벅스도 있었지만, 해외까지 와서 익숙한 로고 아래 앉고 싶지는 않았다.

현지 감성의 카페를 찾아 지도 앱을 확대했다 줄였다 하며 괜히 골목 안쪽까지 걸어 들어갔다.

그렇게 해서야 겨우 찾아낸 카페들이었다.

잠자리가 바뀌어 쉽게 잠이 오지 않는 밤에도 손이 향한 건 스마트폰이 아니라 책이었다.



최근에는 아예 책을 읽기 위해 떠나는 여행을 즉흥적으로 다녀왔다.

목적지는 인제의 만해마을이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이 시집 님의 침묵을 집필했던 백담사를 배경으로 조성된 곳이다.

아내는 동화작가로 유명한 타샤 튜더의 책을 펼쳤고, 나는 아내가 좋아하는 화가 클림트에 관한 책을 읽었다.


비성수기라 사람도 거의 없었다.

책을 읽다가 하품을 해도, 자세를 바꿔도 눈치 볼 대상이 없었다.

그 덕분에 책에 더 깊이 빠져들 수 있었다.

시간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었다.


책 읽기 좋은 라운지와 북카페도 잘 마련되어 있어 하루의 대부분을 책과 함께 보냈다.

우리는 책을 '틈날 때 읽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내어 읽는 것'으로 대우해 주었다.

책이 그 정도의 예의를 받아도 될 곳이었다.

그림3.jpg 여의도, 송도, 나고야, 인제에서 읽은 책들



여행에서 짐이 늘어나는 걸 그렇게 싫어하던 내가, 어느새 책을 챙겨 함께 읽는 시간을 보낸 여행이 네 번이나 되었다.

전혀 내가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여행 루틴이다.


생각해 보니, 이번 요리도 딱 그랬다.

내가 전혀 해볼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던 메뉴를 아주 아무렇지 않게 만들고 있었다.

바로 두부김치다.


나는 두부를 좋아하지 않는다.

싫어한다고까지는 못 하겠고, 국이나 찌개에 들어 있으면 먹는 정도다.

식당 반찬으로 나오면 굳이 남기진 않지만 먼저 손이 가는 음식도 아니다.

그런데 누룩으로만 만들었는데도 묘하게 과일 향이 나는 전통주인 청명주를 마시기로 한 날 문득 두부김치가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느새 집 앞 마트에 가서 두부를 집어 들고 있었다.

김치는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고춧가루, 간장, 설탕을 넣고 미리 버무려 두었다.

팬에 기름을 살짝 두르고 돼지목살과 파를 볶다가 고기가 어느 정도 익자 김치도 넣고 함께 볶았다.

불을 끄고 참기름을 한 바퀴 둘러 섞어 김치를 준비했다.

두부는 간단히 끓는 물에 잠깐 데치기만 하면 된다.

썰어서 볶은 김치와 함께 담으면 그럴듯한 두부김치 한 접시가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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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미역국도 함께 끓였다.

불린 미역과 물에 살짝 헹군 황태채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들기름에 먼저 볶아 주었다.

여기에 다진 마늘을 넣고 물은 조금만 부어 끓이기 시작했다.

간은 간장과 참치액으로 맞췄다.

물은 한 번에 붓지 않고 세 번에 나눠 넣으며 천천히 끓여 마무리했다.

그림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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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말이와 나물, 장아찌와 젓갈을 곁들여 상을 차렸다.

거창하지는 않았지만 술을 앞에 두기엔 딱 좋은 구성이었다.

다행히도 그 상은 청명주와 아주 잘 어울렸다.

술을 마시기 위해 음식을 만든 건지, 음식을 먹기 위해 술을 꺼낸 건지 잠시 헷갈릴 만큼 자연스러웠다.

나와 달리 두부를 아주 좋아하는 아내는 두부 위에 김치를 야무지게 올려 한 점, 한 점 정성스럽게 먹었다.

그 모습만으로도 오늘 메뉴 선정은 충분히 보상받은 느낌이었다.

신기하게도 내 입맛에도 잘 맞았다.

요리과정도 수월했다.

처음엔 상상도 못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챙기게 된 책처럼, 이 요리도 앞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식탁에 자주 올라올 것만 같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올해의 마지막 여행을 위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이번 여행의 출발점은 아내의 한마디였다.

어느 날 아내는 갑자기 별 보기 좋은 곳을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괜히 기억 속에서 가장 화려했던 장면을 꺼냈다.

"있지. 말 그대로 별이 쏟아졌고 은하수까지 또렷하게 보였던 곳이 있어."

아내의 눈이 반짝였다.

"어딘데?"

"요세미티 국립공원."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아니, 거긴 갑자기 갈 수가 없잖아."


나는 물러서지 않고 두 번째 후보를 꺼냈다.

"그럼 내가 어릴 때 정말 많이 봤던 곳도 있지."

"그건 어딘데?"

"우리 고등학교 옥상."

이번엔 아내의 눈빛이 더욱 식었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주변에 논과 밭밖에 없던 곳이었다.

밤이 되면 학교 건물 불만 꺼도 주변은 완벽한 암흑이 되었고, 옥상에는 뚜껑이 열리는 돔망원경 두 대와 이동식 망원경이 다섯 대쯤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전교생이 옥상에 올라가 별을 보는 '별 쇼'가 열렸다.

내가 속해 있던 교내 천문동아리가 진행하던 행사였다.

낭만 있는 학창 시절이었다.


하지만 아내는 내 추억에 오래 머물 생각은 없어 보였다.

휴대폰을 붙잡고 무언가를 열심히 찾기 시작하더니 영월의 한 숙소와 천문대를 그 자리에서 예약해 버렸다.

우리는 3박 4일 동안 숙소에서, 그리고 천문대에서 마음껏 하늘을 올려다볼 계획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 여행을 떠난다.

숙소는 한적한 숲 속에 있다.

낮에는 책을 읽고, 밤에는 별을 보기로 했다.

시간이 넉넉한 만큼 이번엔 책도 평소보다 두 배로 챙겼다.

아내는 좋아하는 심리학자의 책 두 권을, 나는 미술관의 명화들에 관한 책 한 권과 SF 소설 한 권을 가방에 넣었다.

게다가 별은 누워서 봐야 한다는 아내의 의견에 따라, 짐 늘리는 걸 싫어하는 내가 돗자리와 에어매트까지 챙기게 되었다.


안 할 줄 알았던 일들이 이렇게 하나씩 늘어간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변화들이 점점 마음에 든다.

밤하늘을 올려다볼 여유와 함께, 올해의 마지막은 아마도 꽤 잘 마무리될 것 같다.


아내의 후기

두부김치
★4.8점
늘 가게에서만 사 먹던 두부김치를 이번엔 처음으로 신랑이 집에서 만들어 주었어요.
사 먹는 것보다 더 맛있었다는 게 솔직한 감상입니다!
두부는 부드럽고 고소했고, 김치는 짭짤하면서도 돼지목살의 기름진 맛과 씹는 맛이 살아 있어 두부와의 궁합이 아주 좋습니다.
신랑이 요리하기 쉬웠다고 하던데 너무 맛있게 잘 먹은 한 끼였어요.

황태미역국
★4.5점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을 만큼 담백하고 맛있는 황태미역국!!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육식파인 저에게도 개운하고 깔끔해서 부담 없이 숟가락이 계속 갔습니다.


P.S.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바라본 밤하늘은 말 그대로 경이로웠다.

아내는 아직 별이 가득한 하늘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이번 여행에서는 부디 날씨가 도와줘서, 아내가 바라던 별을 마음껏 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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