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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찍은 사진, 기억나세요?

꿀대구, 빠에야

by 퉁퉁코딩

최근 우리 부부가 빠져 있는 문화생활이 하나 있다.

바로 마술 공연 관람이다.

어느 날 아내에게 유튜브에서 마술 영상을 몇 개 보여줬다.

그중 마술 실력은 물론, 외적인 매력까지 아내의 기준을 완벽히 충족한 한 마술사가 있었다.

나와 외적으로는 단 한 픽셀도 비슷한 부분이 없었다.

그 마술사의 공연을 시작으로, 돈까지 내면서 기쁘게 속으러 가는 일이 잦아졌다.


규모도 제각각이다.

관객이 열 명도 안 되어 마술사가 숨을 쉬면 바로 들릴 만큼 가까운 소규모 공연부터, 천 명 이상이 앉아 있는 대극장에서 철창이 내려오고 자동차가 날아다니고 오토바이가 갑자기 사라지는 공연도 있다.

어떤 공연은 한 시간 내내 카드 한 덱만으로 모든 걸 해낸다.

보다 보면 이게 마술인지, 타짜 기술의 실전 시연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그런데도 관객들은 그걸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끝까지 바라본다.



가장 최근에 본 공연은 여덟 자리만 놓여 있는 작은 방에서 열렸다.

우리 부부 반대편에는 연애 2년 차 커플이, 그 옆에는 중학생으로 보이는 아들과 엄마가 자리 잡고 있었다.

마지막 두 개의 뒷자리는 역시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남학생 친구 둘이 채웠다.

이렇게 해서 '부부, 연인, 모자, 친구' 작은 방 안에 인간관계 도감 한 페이지가 완성되었다.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빨간 공은 손끝에서 증발하듯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고, 주사위는 요요처럼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했다.

비눗방울이 툭 하고 터지는 순간 나타난 동전 한 개는 순식간에 수십 개로 증식했다.

우리 부부의 사인을 받은 카드 두 장은 어느새 하나로 합쳐져 있었다.

마치 우리가 연인으로 만나 자연스럽게 부부가 것처럼.

그 장면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었고, 오직 감성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었다.

한 시간 반이 훌쩍 사라져 있었다.

시간이 그렇게 빠르게 흐른 것 역시, 결국 마술의 일부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공연의 테마는 '향수'였다.

향을 뿌리는 그 향수가 아니라, 마음속 어딘가에 오래 묵혀 있던 기억을 흔들어 깨우는 그 향수.

마술사는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슬며시 꺼내기도 하고, 불쑥 관객에게 질문을 던져 각자의 마음속 서랍에 넣어둔 추억을 하나씩 꺼내도록 이끌었다.

그러다 내게도 질문 하나가 날아왔다.

2년 전 찍은 사진, 기억나세요?

내가 답을 생각하느라 잠시 한눈판 사이 '뭘 하려는 걸까?'라는 호기심이 스쳤고, 머릿속에서는 정신없는 시계 되감기 쇼가 펼쳐졌다.

'2년 전... 2년 전... 뭐 했더라?'


그리고 곧바로 떠올랐다.

우리의 스페인 신혼여행.

선글라스로도 막을 수 없던 뜨거운 햇살.

팔레트의 색으로도 완전히 표현할 수 없는 해변의 노을.

바라보는 순간 동시에 입이 벌어졌던 가우디의 건축물들.

12년째 응원 중인 레알 마드리드의 첫 직관.

자연 그대로의 바람을 맞으며 거닐던 해변가까지.

사진들이 필름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전부는 아니지만 꽤 많이 기억나요.
신혼여행 갔을 때거든요.

마술사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아마 그분이 기대한 답은 "아니요. 잘 기억 안 나요." 이런 흐름이었나 보다.

나도 모르게 섬세한 감정 연출에 작은 돌멩이를 던져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그 질문 덕분에 내 마음속 쪽지 하나가 오랜만에 펼쳐졌다.

신혼여행의 추억이 시차도 없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코로나 때문에 결혼 직후엔 신혼여행을 가지 못했고, 결혼 후 1년이 지나서야 겨우 떠날 수 있었던 2주간의 스페인 여행이었다.

도시, 관광지, 교통편, 식당, 간식, 비상시 찾아갈 한식당까지 여행의 계획을 내가 담당했다.

스페인으로 향하는 14시간의 비행 동안에는 준비해 간 영상과 책을 보며 스페인의 역사, 예술, 건축을 공부했다.

말하자면 나는 가이드이자 일정표였고, 내비게이션이자 고객센터였다.

아내는 단 한 명뿐인 VIP 손님이었다.

매일 밤 하루를 마무리하며 다음 날의 관광지, 이동 동선, 먹게 될 요리까지 아내에게 업데이트하는 것도 내 업무였다.


스페인에서 처음 도착한 도시는 바르셀로나였고, 그곳에서 먹은 음식들 중 아내를 가장 감동시킨 메뉴는 바로 꿀대구였다.

생선을 꿀과 함께 먹는다는 기상천외한 조합이다.

이성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워낙 유명하다고 해서 주문했다.

의심 반, 호기심 반으로 맛본 한 입.

그 순간 우리의 의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접시에 남은 소스까지 싹싹 긁어먹는 실행력만 남아 있었다.


바르셀로나를 떠나 마드리드와 세비야를 거쳐 론다에 도착했을 때, 다시 일정 업데이트 시간에 돌입했다.

"내일은 그라나다로 갈 거고, 3일 뒤 다시 바르셀로나로 돌아가서 3일 더 있다가 귀국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내의 눈이 상그리아 두 잔 마신 사람처럼 번쩍였다.

"우리 바르셀로나 또 가는 거였어? 그럼 꿀대구 또 먹을 수 있겠네! 이번엔 두 접시 먹을 거야!"

하지만 그 다짐은 바르셀로나 도착 2시간 만에, 너무도 귀엽게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깨졌다.

두 접시를 먹겠다던 아내는 대신 세 접시를 먹고 말았다.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도 우리는 꿀대구의 맛을 쉽게 놓아주지 못했다.

여행 사진을 보다가도, 여행 이야기를 하다가도 어느 순간 결론은 늘 꿀대구로 귀결되곤 했다.

결국 직접 만들어 보고 싶어졌다.

블로그, 셰프 영상, 스페인 현지 레시피까지 찾아보며 연구했다.

하지만 현지 방식 그대로를 우리 집에서 재현하는 것은 무리였고, 그래서 맛만큼은 최대한 근접시키는 타협안을 만들어냈다.

이미 네 번이나 해 먹었던 우리의 꿀대구.


그리고 이번 다섯 번째 꿀대구는, 마술공연의 향수가 불러온 스페인의 기억 덕분에 다시 탄생하게 되었다.

신선한 대구살에 소금을 솔솔 뿌려 15분 정도 두었다.

정석은 염장 대구를 사용하는 것이지만, 집에서 할 수 있는 선에서 비슷한 결을 만들어본 셈이다.

그다음은 아이올리 소스 차례였다.

원래 아이올리는 마늘과 올리브유를 곱게 갈아 만드는 지중해식 소스다.

잘게 다진 마늘에 마요네즈와 올리브유, 레몬즙을 섞어 집에서도 만들기 쉬운 간이 아이올리를 완성했다.

향긋하면서도 고소한 맛은 충분했다.

종이호일 위에 레몬즙을 살짝 두르고 그 위에 손질한 대구살을 올린다.

그 위를 아이올리 소스로 듬뿍 덮어 오븐으로 넣는다.

대구가 익는 동안에는 또 다른 소스를 만들어야 한다.

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토마토소스를 약한 불에서 부드럽게 데운 뒤 여기에 꿀을 넣어 잘 섞어 준비한다.

접시 바닥에 꿀을 섞은 토마토소스를 넉넉히 깔고, 오븐에서 노릇하게 익은 대구살을 올린다.

그 위로 아이올리 소스가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도록 두면 된다.

이렇게 하면, 집에서 즐기는 우리의 버전 꿀대구가 완성된다.


함께 먹기 위해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스페인 요리를 만들었다.

스페인식 솥밥, 빠에야였다.

먼저 솥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다진 양파와 마늘을 은은하게 볶아 향을 냈다.

다른 냄비에서는 새우, 조개, 오징어를 살짝 볶아 향을 깨워 준 뒤 물을 부어 데쳤다.

해물만 따로 건져두고 남은 국물은 채와 키친타월로 걸러 맑은 해물 육수를 얻었다.

완성된 해물 육수를 양파와 마늘을 볶던 솥에 붓는다.

여기에 쌀과 토마토소스, 빠에야 파우더를 넣고 강불에 한 번 팔팔 끓인 뒤 뚜껑을 닫고 15분간 익힌다.

시간이 지나면 덜어두었던 해물을 위에 가지런히 올리고 다시 뚜껑을 덮어 10분 동안 뜸을 들이면 끝이다.



정통 스페인식이라고 부르기엔 부족할지 몰라도, 우리 입과 기억에는 충분히 그 스페인 느낌이 살아 있는 밥상이었다.

꿀대구 한 조각을 먼저 들어 올렸다.

아내는 원하던 맛이 맞았는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대구에게 주는 합격 점수였다.

빠에야는 첫 숟가락에서 바로 진가가 드러났다.

밥알에 해물 육수가 고르게 스며 있고, 바닥은 살짝 눌어 고소한 향이 올라왔다.

스페인에서 먹었던 것과는 조금 달랐지만, 먹다 보니 자연스럽게 신혼여행을 떠올리기엔 충분했다.

마술사의 손기술까지는 아니지만, 요리사의 손기술은 아주 깔끔히 먹힌 상황이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며칠 전 마술 공연 이야기를 꺼냈다.

"며칠 전에 마술 공연에서 우리 2년 전에 신혼여행 갔다 왔다고 했잖아."

"응."

"근데 생각해 보니까 우리 신혼여행이 진짜 2년밖에 안 됐다고? 왜 이렇게 오래된 느낌이지?"

2년이라는 숫자는 짧은데, 우리의 체감은 거의 '5년 차 부부'에 가까웠다.

아내도 숟가락을 멈추고 말했다.

"그러게. 2년보다 훨씬 오래된 것 같아."

"우리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나 봐."


빠에야 냄새 사이로 지난 2년의 장면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이사, 집 꾸미기, 근무지 변경, 다툼, 화해, 여행, 병원, 전시회, 영화.

그리고 별 내용은 없지만 이상하게 오래 기억에 남는 자잘한 일상들.

화려하진 않아도, 기억 속에서 살아 있는 작은 마술들이 2년이라는 시간을 이렇게 길게 늘여놓았던 걸까.

스페인 음식의 향이 남아 있는 식탁 위에서 우리는 둘만의 작은 마술 쇼를 보고 있는 듯했다.


아내의 후기

꿀대구
★4.9점
스페인에서 먹고 반해버렸던 그 꿀대구가, 이번엔 신랑의 손길을 거쳐 등장했습니다!
부드러운 대구살에 포근한 소스와 꿀까지 듬~뿍 퍼서 먹으면 입 안에서 은은하면서도 달달한 맛의 향연이 펼쳐집니다.
겉보기엔 근사한데 의외로 만들기 쉽다 해서 더 놀랐고요!
0.1점 감점은 소스가 조금만 더 조화롭게 어울렸다면 완벽했을 것 같아서예용. 히히히!

빠에야
★4.7점
스페인에서 정말 맛있게 먹었던 빠에야!
기름진 음식을 좋아하는 저에게는 해산물 풍미에 꾸덕하게 스며든 올리브유의 느낌이 최고였거든요.
신랑이 해준 빠에야도 그때의 추억을 떠올릴 만큼 정말 맛있었어요~ 냠냠


P.S.

마술 공연을 보기만 하던 나는, 비밀이 너무 궁금한 나머지 결국 조금씩 마술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제, 드디어 처가 식구들 앞에서 30분짜리 짧은 마술 공연을 펼치게 되었다.

공연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민망하지만, 어쨌든 내 인생의 첫 데뷔 무대였다.

그리고 마술사의 조력자 역할, 미녀 도우미는 아내가 맡아 주었다.

격렬한 환호와 박수를 받으며 순조롭게 흘러가는 듯했지만, 역시 초보 마술사는 실수를 하나 저지르고 말았다.

그래도 무료 공연이었기 때문에 "이건 잊어주시는 걸로 하겠습니다!"라는 멘트로 무사히(?) 넘어갔다.

다행히 장모님과 장인어른은 마지막 마술을 보시고, 하루가 지난 지금까지도 "이건 도대체 어떻게 한 거냐"며 진심으로 신기해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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