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 우삼겹해물국
회사에서 진급을 앞두고 큰 프로젝트를 맡았던 적이 있다.
많은 관심과 기대가 쏠린, 그 해의 주요 과제였다.
부장님은 물론 임원들까지 "이번 프로젝트, 진짜 잘해야 한다"라며 한 마디씩 보탰다.
그 '진짜'라는 단어가 얼마나 무거운지, 그때 나는 거의 전장으로 나가는 장수 같은 기분으로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20개가 넘는 부서, 100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해 매주 정기회의를 진행했다.
회의 초대 메일만 봐도 스크롤을 다섯 번은 내려야 했다.
나는 신규 기능의 정책을 세우고, 기능 요구사항을 정리하며 전체 일정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새 페이지를 열고, 내가 한 줄 한 줄 써 내려간 신규정책이 어느새 회사 전체로 공유되기 시작했다.
디자인 검토, 개발 일정 조율, 법무 검토까지 끊임없이 검토하고 또 검토했다.
출시 막바지에는 하루가 회의로 시작해 회의로 끝났다.
이메일은 쏟아지고, 이메일을 처리하면 또 다른 메신저가 와있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1년이 흘렀다.
마침내 프로젝트를 일정 내에 마무리했고, 그제야 평화를 되찾을 줄 알았다.
출시 후 시장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 데이터를 정리하려던 바로 그때였다.
고객 VoC 부서에서 전화가 왔다.
"문의가 좀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이 말은 회사에서는 '태풍의 전조'다.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자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새로 만든 기능과 비슷한 예전 기능이 있었던 것이다.
하위 버전의 기능은 사용성 개선이라는 명목으로 지원을 중지했는데, 그 기능을 필요로 했던 고객이 예상보다 훨씬 많았던 것이다.
그즈음 우리 부서에 새로 합류한 동료가 있었다.
타 사업부에서 전배 온 직원이었는데, 나와 사번이 같았다.
어느 날, 유난히 이른 시각에 사무실에서 그를 마주쳤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알람을 잘못 맞췄어요. 한 시간 일찍 울렸는데 다시 자려다 포기하고 그냥 나왔어요."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부럽네요. 저는 알람이 필요 없어요."
그러곤 내 스마트폰 통화기록을 보여줬다.
아침 7시부터 저장되지 않은 번호들로 수신 기록이 빼곡했다.
"요즘 제 상황 알죠? 저는 이렇게 일어나요."
동료의 눈이 동그래졌다.
잘못 전배 온 게 아닌가 싶은 표정이었다.
"헉... 여기 이런 곳이었나요?"
나는 피식, 힘없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런 건 저도 처음 겪어봐요. 제가 먼저 부딪혀봤으니까 OO님은 실수하지 않게 잘 알려드릴게요."
말은 그렇게 믿음직하게 했지만, 속으로는 모든 걸 내려놓고 딴 부서로 전배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실제로 그 시절의 하루는 알람 대신 전화벨로 시작됐다.
눈을 뜨기도 전에 유관부서 직원들이 나의 의견이 필요하다며 쉴 틈 없이 전화를 걸어왔다.
평소라면 전화를 걸기 전에 메신저로 '지금 통화 괜찮을까요?'라고 묻는 게 예의였지만, 그 시기엔 그들조차 여유가 없었다.
약 한 달간, 지난 1년보다 더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이슈를 정리하고, 수정하고, 또다시 터진 이슈를 해결해야 했다.
전화벨 소리로 일어나 샤워를 하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업무 생각뿐이었다.
회사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하루치 체력이 반쯤 빠져 있었다.
밤 10시쯤, 사무실의 불이 하나둘 꺼질 무렵에야 퇴근했다.
어떤 날은 바빠서, 어떤 날은 마음이 지쳐서 저녁을 거른 채 퇴근한 날이 많았다.
그 시절, 나의 저녁 친구는 김밥이었다.
김밥 전문점에서 즉석에서 말아낸 김밥이 아닌, 편의점 냉장 코너 속 플라스틱 트레이의 한 줄이었다.
퇴근 버스를 내리면 늘 같은 편의점이 보였다.
그곳에서 김밥 한 줄을 사서 집에 도착하면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하나씩 집어 먹었다.
잠시나마 생각을 비운 채 김밥을 삼켰고, 이내 소파에 몸이 녹아내렸다.
그리고 잠들면, 또 다른 전화가 나를 깨웠다.
결국 이전 버전을 사용할 수 있는 우회경로를 만들어냈다.
문제는 해결됐지만, 그다음엔 '포스트모텀'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의 회의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시체를 해부하듯, '무엇이 잘못됐나'를 놓고 하루 종일 회의했다.
이곳저곳 불려 다니며 재발 방지 대책을 세운 끝에야 비로소 숨 돌릴 틈이 생겼다.
한때는 끼니를 때우기 위해 아무런 감정 없이 먹던 김밥이었지만, 사실 김밥이란 건 참 맛있고 예쁜 음식이다.
마침 집에 김밥용 김이 있어 김밥을 말아먹기로 했다.
김밥 재료에는 정답이 없으니, 냉장고 속 재료들을 이것저것 긁어모아 준비했다.
우삼겹 김밥과 참치 김밥, 두 종류를 만들기로 했다.
밥은 참기름과 맛소금, 참깨를 넣어 비벼두었다.
참치는 마요네즈와 후추를 뿌려 버무렸고, 우삼겹은 팬에 소금과 후추를 뿌려 노릇하게 구웠다.
기름에 채 썬 당근을 볶고, 깻잎과 쪽파, 절인 무도 준비했다.
이제 김을 깔고 밥을 펴 올린다.
그 위에 깻잎을 깔고 참치 또는 우삼겹을 올린다.
야채를 차곡차곡 얹은 뒤 꼭 눌러가며 말아준다.
조심조심 칼을 앞뒤로 움직여가며 썰면, 김밥 완성이다.
여섯 줄 정도를 만든 것 같은데, 막상 완성된 양은 그것보다 적었다.
원래 김밥은 만들면서 하나씩 집어먹는 게 별미다.
김밥을 마는 내 앞에서 아내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앉아있었다.
처음 말았던 한 줄은 밥 양을 조절하지 못해 옆구리가 터졌다.
괜찮다.
김밥의 첫 줄은 원래 연습용이다.
아내 입에 하나 넣어주고 내 입에도 하나 넣다 보니, 두 줄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평소엔 내가 요리하는 걸 이렇게 가까이서 지켜보는 일이 거의 없는데, 김밥은 요리하는 걸 구경하는 재미도 있고, 하나씩 받아먹는 재미도 있는 음식이다.
김밥을 마는 사이, 미리 준비해 둔 우삼겹해물국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우삼겹과 양파, 당근, 마늘을 기름에 볶은 뒤 해물과 코인 육수를 넣고 끓인 국이다.
김밥에 사용한 재료를 최대한 활용해 번거로움을 줄였다.
국과 함께 김밥을 조금 더 맛본다.
국물의 따뜻함이 입안에 퍼지고, 그 사이 아내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배가 불러서 그런 건지, 아니면 김밥이 불러온 추억 때문인지 평소보다 훨씬 말을 많이 했다.
어릴 적 소풍날, 장모님이 싸주신 김밥 이야기를 하며 그 시절의 얼굴로 돌아간 듯했다.
점심시간이 되면 친구들과 한데 모여 까먹던 도시락.
누구는 김밥, 누구는 유부초밥, 누구는 주먹밥.
김밥 한 줄에 들어간 시간과 정성, 그리고 사랑의 온도를 이제야 어른이 되어 느끼는 듯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국을 한술 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 이후로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들고 간 기억이 거의 없다.
소풍날이면 집에서 만든 김밥 대신 아침에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샀다.
엄마가 새벽에 일어나 김밥을 싸주지 않아도 서운하지도 않은 그런 아들이었다.
그때 아내가 먹던 김밥도, 내가 먹던 삼각김밥도 이제는 우리 모두 그 맛을 기억하지 못한다.
심지어 2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 밤마다 먹던 편의점 김밥의 맛도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감정만 남아 있을 뿐이다.
입이 기억하는 음식이 있고, 마음이 기억하는 음식이 있다.
아마 김밥은 후자 쪽일 것이다.
회사에서 발생한 이슈로 김밥으로 늦은 저녁을 때우며 보냈던 그 기간은 내 커리어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때는 그저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 같았지만, 결국 그 시간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프로젝트는 잘 마무리되었고, 나는 그 공을 인정받아 사내 수상과 함께 진급까지 하게 되었다.
수상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상장을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아내는 박수를 치며 상장을 꼼꼼히 살펴보다가 갑자기 큰 소리를 냈다.
"어머, 이게 뭐야!"
나도 깜짝 놀라 상장을 다시 들여다봤다.
상장 문구 중 '협업'이 '헙업'으로 인쇄되어 있었다.
뜻밖의 오타 이슈였다.
"이거 회사에 말해서 다시 뽑아달라고 해야겠다."
그러자 아내가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그냥 이대로 두자. 헙업상은 세상에 딱 하나뿐일걸? 오타 에디션이잖아. 희귀템이야."
그 말을 듣고 나도 웃음이 터졌다.
어쩐지 이 상장이 그해 나의 프로젝트를 상징하는 결과물 같았다.
최선을 다했지만 완벽하지는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1년간의 프로젝트, 오타가 난 상장, 그리고 옆구리가 터져버린 김밥 첫 줄.
모두 완벽하지 않기에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아내의 후기
김밥
★5.0점
김밥 마는 신랑을 구경하면서 갓 만든 김밥 몇 알을 즉석에서 맛보던 순간, 마치 오마카세 식당에 온 듯했어요.
신랑표 김밥은 저에게 오래된 추억을 불러일으켜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셰프가 직접 요리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인 줄 어렸을 땐 몰랐어요.
어머니가 요리를 해주시는 게 당연한 게 아니라, 우리 집 셰프가 가족을 위해 준비한 오마카세 코스라고 생각했더라면 한 끼 한 끼를 더 감사하고 소중하게 먹었을 텐데 말이죠.
현장체험학습을 위해 초등학생 때 엄마가 싸주신 김밥을 들고 갔던 기억, 중학생 때는 친구들과 나란히 김밥집에서 줄 서서 김밥을 사 먹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개인적으로 저에겐 정말 감동적인 김밥이었어요.
백 점 만점에 백 점을 주고 싶지만, 메뉴판 없는 식당의 점수 체계상 만점은 5점이니 만점 오점 드립니다.
히히.
우삼겹해물국
★5.0점
김밥이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담백한 맛이라면, 국은 우삼겹의 깊은 풍미에 해물의 향까지 더해져 진한 맛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완벽한 조화였어요.
P.S.
올해 3월, 예상치 못한 일들로 가득했던 나고야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 첫날, 비행기를 타기 전부터 아내가 아파 고생했던 여행이었다.
2박 3일의 짧은 일정이었는데 첫날을 그렇게 보내서 아쉬움이 남았던 걸까?
아니면 나고야에서 먹었던 히츠마부시가 너무나 맛있어서였을까?
우리는 다시 한번 나고야를 가기로 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여유 있게, 5박 6일간의 일정이다.
지금 이 글은 공항으로 떠나기 3시간 전, 새벽 4시에 쓰고 있다.
이 글이 업로드되는 날에는 나고야의 한 목장에서 말과 양에게 먹이를 주고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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