깻잎명란크루도, 마늘관자구이
아내와 산책을 할 때마다 나는 레이더를 켠다.
스위치는 따로 없지만, 마음속에서 자동으로 켜지는 일종의 탐지기다.
특히 근처에 물이 보이면 경계 레벨은 최고 단계로 올라간다.
도심 한복판의 인공 연못이든, 동네 하천이든, 심지어 비에 젖은 웅덩이 하나라도 예외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고 없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시야에 들어왔다가, 한눈을 파는 사이 사라져 버린다.
마치 날개가 있듯이, 아니 사실 진짜로 날개가 있다.
나는 새를 찾는다.
아내는 물 위를 미끄러지듯 떠다니는 오리도, 거실 창밖에 앉은 까치도, 심지어 수풀 속에 모여 수다 떠는 참새들도 좋아한다.
그러나 좋아하는 것과 잘 찾는 건 별개의 문제다.
기뻐하는 건 아내의 역할, 찾아내는 건 나의 역할이다.
"저기 물 위에 둥둥 떠서 데이트하는 것 같은데?"
"저기 애기가 엄마 따라간다."
"저기, 저 나뭇가지 위에 하얀 거 보여?"
"어디? 아, 그거 비닐봉지 아니야?"
아내는 나를 따라오고, 나는 그 시선을 이끈다.
아침 7시, 침실로 스며든 햇살에 평소보다 조금 일찍 잠에서 깬 날이었다.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시러 산책을 나섰다.
아무도 없는 산책로에는 커피 향보다 참새와 까치소리가 먼저 깔려 있었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가려던 참에, 코끝을 스치는 고소한 냄새가 우리를 멈춰 세웠다.
단골 빵집이었다.
갓 구운 크루아상의 향은 언제나 우리를 흔든다.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오픈까지는 아직 30분이 남아있었다.
짧은 시간을 달래기 위해 우리는 조금 더 걷기로 했다.
평소 잘 가지 않던 길로 접어든 순간, 저 멀리 무언가 하얗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햇빛을 머금은 백로 한 마리였다.
가늘고 긴 다리로 물가를 거닐다가, 우리가 다가가자 고개를 들었다.
잠시 우리를 바라보는 듯하더니, 그 평온한 시선을 뒤로하고 천천히 날갯짓을 시작했다.
날갯짓은 생각보다 크고 느려, 묘한 기품이 있었다.
그리곤 곧, 건물 3층 높이쯤 되어 보이는 나무 위로 날아올랐다.
흔들리는 가지 위에서 위태롭게, 그러나 당당하게 자리를 잡았다.
바람이 스치면 몸이 기울었고, 가지가 흔들리면 균형을 잡았다.
마치 외줄 타기를 하는 곡예사 같았다.
물가에 앉은 백로는 자주 봤지만, 이렇게 나무 위에서 외줄을 타듯 앉은 백로는 처음이었다.
우리는 한참을 그 백로를 바라보았다.
조금은 더운 오전 어느날 이었다.
우리는 호수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호수 위에는 미세한 열기가 일렁였고, 햇빛이 그 위에서 반짝였다.
호수 가장자리의 바위 위에는 거북이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놓여 있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
누가 바위인지, 누가 거북이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저 거북이 살아 있는 거겠지?"
우리의 말을 들었는지, 거북이는 천천히 물가로 내려가더니 이내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거북이를 따라 시선을 옮기자, 저 멀리 물 위에서 무언가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크고, 우아했다.
백조였다.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에 우리는 백조가 있는 쪽으로 계속 걸었다.
하지만 호수의 넓이는 우리의 발걸음보다 훨씬 컸다.
백조 역시 우리에게 거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걸어도 걸어도 거리는 그대로였다.
코로나도 끝났건만, 마치 여전히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는 듯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호수를 배경으로 사진이나 남기자며 아내에게 포즈를 부탁했다.
나는 카메라를 들고 앵글을 맞췄다.
그런데 화면 속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백조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잠깐만, 움직이지 말고 있어. 지금 백조가 계속 다가오고 있어!"
"진짜?"
"진짜야. 지금 거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왔어!"
백조는 마치 누가 촬영 계약이라도 한 듯,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곧장 아내 쪽으로 헤엄쳐왔다.
그리고 카메라 정면에 이르자, 마치 포즈를 취하듯 잠시 속도를 늦췄다.
"이 각도가 제일 잘 나와요."
그렇게 말하는 모델 같았다.
사진 속 아내의 옆자리를 잠시 백조에게 양보했다.
찰칵.
그 순간, 나는 없는 완벽한 커플샷이 완성되고 말았다.
엄마 오리 뒤를 졸졸 따르던 일곱 마리 아기 오리.
엷은 갈색 깃털에 꼬리 무늬가 얼룩말 같던, 쉼 없이 땅을 쪼아대던 후투티.
고개를 뒤로 돌려 엉덩이를 배고 낮잠을 자던 거위.
추운 겨울, 따뜻한 국물 요리를 먹으러 들어간 식당 창밖에는 백로 네 마리가 날아와 나란히 앉았다.
마치 가족 나들이라도 나온 듯했다.
해외에서도 새는 늘 우리 곁에 있었다.
바르셀로나의 시끄럽게 지저귀던 초록새들.
도쿄 우에노 공원의 노란 발 작은 새.
날개를 활짝 편 아빠 공작과 그 옆의 엄마 공작, 그리고 엄마를 졸졸 따라다니던 아기 공작.
싱가포르에서는 아예 '버드 파라다이스'라는 새 동물원을 찾아갔다.
그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건, 관람로 한가운데 앉아 있던 검은 새 한 마리였다.
사진을 찍으려 카메라를 들자, 갑자기 "찍지 마!"라고 외치기라도 하듯 날개를 퍼덕이며 화를 냈다.
셔터를 누른 순간, 그 화난 얼굴이 정확히 프레임 한가운데에 담겼다.
지금도 가끔 그 사진을 보면 웃음이 난다.
화난 새의 얼굴인데, 묘하게 귀엽다.
오늘도 우리의 기억에 남을 한 마리의 새를 만났다.
하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걷던 중, 저 아래에서 회색빛 실루엣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왜가리였다.
언제 봐도 늘 반듯한 자세로 서 있는 녀석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달랐다.
사냥꾼의 눈빛으로 돌변해 있었다.
그 고상한 부리 끝에, 꿈틀거리는 물고기 한 마리가 매달려 있었다.
왜가리는 물고기를 문 채 머리를 살짝 기울였다.
마치 "어디 한 번 각도 좀 잡아볼까?" 하는 듯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물고기를 입 안쪽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한 입, 두 입, 세 입...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삼키는 모습이 왠지 와인 테이스팅 중인 미식가 같았다.
결국 꿀떡.
그 순간, 그의 긴 목을 따라 작은 승리의 꿀떡임이 지나갔다.
식사를 마친 왜가리는 한동안 미동도 없었다.
표정에는 만족감이, 자세에는 여유가 흘렀다.
우리는 다리 위에서 숨을 죽인 채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결국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이야, 잘 먹네. 먹방이 따로 없네."
"우리도 생선 먹을까?"
왜가리의 브런치를 감상한 뒤, 자연스럽게 우리의 점심 메뉴까지 정해졌다.
먼저 만들 것은 깻잎명란크루도다.
크루도는 이탈리아어로 '날것 그대로의 재료를 간단히 양념해 먹는 요리'를 뜻한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한국식 감성을 살짝 더했다.
먼저 광어 필렛을 먹기 좋은 크기로 썰었다.
그 위에 채 썬 깻잎을 얹고, 참기름으로 살짝 양념한 명란을 올렸다.
흰 생선은 간단히 초장이나 쌈장에 찍어 먹어도 좋지만, 명란의 짭짤함과 참기름의 고소함이 만나면 전혀 다른 감칠맛이 피어난다.
완성된 접시는 꽃잎이 흩날리는 듯한 모양이 된다.
식탁 위에 핀 한 송이 꽃 같다.
물론 이 꽃은, 먹을 수 있다.
두 번째 요리는 마늘관자구이다.
먼저 올리브오일에 다진 마늘을 넣고 약불에서 향을 우려낸다.
마늘이 노릇하게 변하면 관자를 넣고, 기름을 끼얹듯 굽는다.
겉은 살짝 노릇하고 속은 촉촉할 때가 딱 좋다.
마지막으로 치즈를 살짝 녹여 덮어주면 완성된다.
마늘의 향과 치즈의 짭짤함이 관자의 담백함을 감싸며 한입 안에서 고소하게 녹아내린다.
화이트와인 한 잔을 곁들이며 오늘의 물 냄새나는 요리를 천천히 맛보았다.
잔을 기울일 때마다 향긋한 포도 향이 살짝 올라왔다.
조금 전 다리 아래에서 봤던 왜가리의 식사 장면이 떠올랐다.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맛있게, 요리를 꿀떡꿀떡 삼켰다.
아내는 평소 회를 크게 선호하지 않는다.
그러나 좋아하는 명란이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젓가락을 멈추지 않았다.
관자는 조금 오버쿡되었다.
속의 촉촉함이 살짝 사라졌다.
하지만 그 또한 웃음으로 덮일 만큼 즐거웠다.
왜가리의 식사 시나리오가 만든 우리의 점심이었다.
식사를 마쳐갈 무렵, 나는 슬쩍 아내를 유혹해 본다.
"오랜만에 윙스팬 한 판 할래?"
윙스팬은 귀여운 새 카드들과 먹이 토큰, 새집, 새알 같은 아기자기한 소품이 가득한 보드게임이다.
우리 부부가 한때 꽤 자주 즐기던 게임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분위기가 달라졌다.
내 연승이 이어지자 아내는 이 게임을 '스트레스 방지를 위해 중단'하기로 선언했다.
오늘도 대답은 같았다.
"나중에 하자."
그 '나중'은 왠지 올 것 같지 않다.
결혼식에서 우리가 하객들 앞에서 서약한 세 가지 약속이 있다.
첫 번째는 요리는 내가 담당하겠다는 것이다.
이건 충실히 지켜지고 있다.
두 번째는, 내가 좋아하는 보드게임을 아내가 좋아하는 방탈출만큼 자주 함께 하자는 것이다.
이 약속은 반 정도만 지켜지고 있다.
우리는 방은 잘 탈출하지만, 보드게임은 상자 안에서 좀처럼 탈출하지 못하고 있다.
아무래도 이대로라면 새 찾기 레이더의 감도를 조금 낮춰야 할지도 모르겠다.
까치는 못 본 척, 오리는 그냥 지나치고, 백로는 한참 뒤에야 발견하는 척하는 식으로 말이다.
나만 슬그머니 보드게임을 외면당한 입장에 대한 조용한 시위랄까.
정당하지만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할, 아주 소심한 복수 계획이다.
아내의 후기
깻잎명란크루도
★5.0점
꽃처럼 꾸며진 플레이팅 덕분에 눈부터 즐거웠습니다.
평소 좋아하지 않던 광어회가 명란젓을 만나니 이렇게 맛있을 줄이야!
깻잎 향이 은은하게 배어 한입마다 싱그러운 느낌이 퍼졌습니다.
예쁘고 맛있는 요리란 이런 걸 말하는구나 싶었습니다.
마늘관자구이
★4.7점
관자가 살짝 오버쿡되어 아쉬워하던 신랑님!
덕분에 오히려 스테이크 같은 매력이 더해졌습니다.
탱글한 식감과 고소한 풍미가 어우러져 풍성하게 즐길 수 있었던 맛있는 한 접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