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갈비, 닭곰탕
우리가 연애하던 시절, 가끔은 코인노래방에 갔다.
자주는 아니었고, 몇 달에 한 번쯤이었다.
딱 2천 원이면 충분했다.
가끔은 천 원으로도 만족했다.
커피 한 잔 값도 안 되는 돈으로, 우리는 잠깐 세상에서 가장 시끄러운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각자 번갈아 노래를 부르며, 가끔은 내가 예약한 곡을 아내(그땐 여자친구)가 슬쩍 빼앗아 부르곤 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마지막 곡은 늘 정해져 있었다.
원곡은 쿨, 리메이크는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의 서인국과 정은지가 부른 'All For You'였다.
원곡이 발표됐을 때 우리는 그 노래를 알지도 못하는 어린아이들이었다.
드라마도 본 적이 없지만, 이유없이 둘 다 그 노래를 참 좋아했다.
자연스레 이런 농담까지 주고받았다.
"우리 결혼하면, 축가는 우리가 부르자."
"좋지. 그럼 보컬학원도 다녀볼까?"
흘려 한 말이었지만, 우리는 그 말을 마음속에 오래 간직했다.
몇 년을 더 함께한 우리는 식장을 예약하고, 상견례를 마치고, 웨딩사진을 찍고 있었다.
결혼은 어느새 2주 앞으로 다가왔다.
사랑이 현실이 되는 속도는 생각보다 빨랐다.
그제서야 나는 아내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우리 진짜 축가, 우리가 부를 거야?"
아내는 나를 잠깐 바라보더니, 그걸 왜 묻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당연하지!"
농담이었던 그 약속은 어느새 진짜가 되어 있었다.
각자의 회사생활, 청첩장 모임, 부모님 잔소리 사이를 오가며 정신없이 바쁜 나날이었다.
보컬학원까지는 무리였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퇴근 후에도, 주말 오후에도, 틈만 나면 코인노래방으로 향했다.
한때는 단순히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던 공간이었는데, 이젠 마치 리허설 무대가 되어 있었다.
역시 하루에 2천 원씩.
단 한 곡에만 투자했다.
처음엔 웃으며 부르다가, 점점 진지해졌다.
즐겁게만 부르던 노래가 이제 곧 수백 명의 하객 앞에서 울려 퍼질 거라고 생각하니, 손바닥에 땀이 찼다.
떨리고, 걱정됐지만, 이미 돌이킬 수는 없었다.
결혼식 전날까지 우리는 노래를 다듬었다.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한 키 낮춰 부르는 것도 고려했지만, 그건 우리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호흡, 박자, 음정, 심지어 화음까지 꼼꼼히 맞췄다.
연습할 땐 제법 괜찮았다.
적어도 그때는 서로를 보며 "우리 생각보다 잘하는데?" 하고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연습과 실전은 달랐다.
결혼식장이라는 공간은, 노래방보다 훨씬 냉정했다.
눈앞엔 수많은 하객들, 양옆엔 꽃길, 그리고 저 멀리서 터지는 플래시.
그 사이에서 나는 마이크를 쥐고 있었다.
전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직 입도 떼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숨이 찼다.
심장에선 북소리가 났고, 손바닥은 미끄러웠다.
마이크가 내 손에서 빠져나갈 것만 같았다.
노래가 시작되자 머릿속은 순식간에 하얘졌다.
익숙한 가사인데, 이상하게 낯설었다.
아내는 끝까지 침착했다.
그녀는 원래 강했다.
내가 음을 이탈한 건지, 아니면 정신이 이탈한 건지 알 수 없이, 정신없게 노래를 마쳤다.
어떻게 끝났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박수 소리가 들렸고, 누군가 "잘했다!"라고 외쳤다.
그제야 숨이 돌아왔다.
42.195km는 커녕 10km도 달려본적 없지만, 마치 마라톤을 완주한 기분이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우리가 노래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을 많은 친구들이 보내주었다.
우리는 아직도 괜한 민망함에 그 동영상을 본 적이 없다.
아마도 완벽하진 않았을 노래지만, 그날의 음정보다 더 중요한 건 마음의 진심이었다.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우리 둘의 기억 속에 그 노래가 남았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그런데 축가를 연습하러 코인노래방에 갈 때마다 우리를 괴롭히는 게 하나 있었다.
축가에 대한 불안이나 긴장은 아니었다.
그건, 바로 냄새였다.
그 당시 우리가 살던 동네에는 상가 건물 지하 1층에 코인노래방이 딱 하나 있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 바로 앞에 닭갈비집이 있었다.
복도를 지날 때마다 달콤하면서도 매콤한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불판 위에서 양념이 눌어붙는 소리, 지글지글 기름이 튀는 소리까지 들리면 노래 연습은커녕, 이미 마음은 철판 앞에 앉아 있었다.
결혼식을 앞두고 식단 조절을 하며 나름대로 다이어트를 하고 있었지만, 그 냄새 앞에서는 다짐도, 의지도 모두 무너지려 했다.
"우리 그냥 닭갈비 먹을까?"
내가 조심스레 한마디 하면, 아내는 마이크를 내려놓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며칠만 더 참자."
그 표정엔 닭갈비 한 접시로 웨딩드레스의 핏을 포기할 순 없다는 굳은 결의가 서 있었다.
코인노래방은 우리의 보컬 연습실 겸 인내력 테스트장이 되었다.
노래보다 어려운 건, 닭갈비를 참는 일이었다.
오늘 냉장고를 열어보니 깻잎과 양배추, 그리고 닭다리살이 남아 있었다.
힘겹게 참아내던 닭갈비 냄새가 문득 떠올랐다.
그래서 오늘은, 그때를 다시 꺼내보기로 했다.
닭다리살은 간장과 맛술, 후추로 살짝 밑간을 했다.
대파와 감자, 양배추는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둔다.
팬에 닭다리살을 넣자,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리와 함께 향이 퍼지기 시작한다.
이번엔 말릴 사람도 없으니, 마음 편히 그 향을 만끽한다.
고기가 어느 정도 익으면 대파, 감자, 고추를 넣고 함께 볶는다.
야채에서 수분이 나오며 국물이 만들어진다.
닭다리살의 기름이 스며든 이 국물은 그 자체로 훌륭한 육수다.
국물과 고기 일부를 냄비에 덜어둔다.
잠시 후, 그것은 또 다른 요리가 될 것이다.
남은 팬에 양배추와 양념을 넣고 다시 불을 올린다.
양념은 고추장, 고춧가루, 간장, 굴소스, 올리고당, 설탕, 마늘, 생강, 후추, 그리고 카레가루를 섞어 만들었다.
감자가 부드럽게 익어갈 때쯤, 불을 끄고 깻잎을 찢어 넣어 섞으면 완성이다.
덜어둔 국물과 고기로 간단한 닭곰탕도 만들 수 있다.
물을 살짝 더해 끓이고, 소금과 후추, 치킨파우더로 간을 맞추면 완성된다.
닭갈비는 보통 고기와 야채를 건져 먹고, 마지막에 밥을 볶아 먹는다.
어떤 식당은 아예 닭갈비 볶음밥을 별도 메뉴로 내세우기도 한다.
그 볶음밥이야말로 놓칠 수 없는 디저트라고들 한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처음부터 밥과 함께 먹는다.
따뜻한 흰쌀밥 위에 올려 먹는 매콤한 고기의 맛 그 단순하고 뜨거운 조합이 늘 좋았다.
볶아 먹는밥도 물론 좋아하지만, 굳이 마지막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믿는다.
맛이란 타이밍이니까.
닭갈비를 먹을 때면, 아니 길을 걷다 닭갈비집 간판만 스쳐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시절로 돌아간다.
코인노래방의 좁은 복도를 따라 퍼지던 그 냄새, 입맛만 다시며 서로를 달래던 우리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이다.
결혼식이 끝나고 어느새 3년 가까이 흘렀다.
우리는 아직도 그 코인노래방 앞 닭갈비집을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그토록 간절하던 그 냄새, 그땐 세상의 모든 유혹이 거기 있는 줄 알았다.
가지 못할 때는 그렇게 가고 싶더니, 막상 언제든 갈 수 있게 되니 이상하리만큼 발걸음이 향하지 않는다.
사람 마음이란 참 알 수 없다.
그래도 다행인 건 있다.
언제든 먹을 수 있는 메뉴판 없는 우리집 식당의 내요리를 아내는 여전히 맛있게 먹어준다.
매출은 0원이지만, 평점은 언제나 후하다.
내 요리도, 우리의 축가처럼 결코 완벽하진 않다.
그래도 함께 웃어주는 사람과 맛있게 먹을 수 있다면, 완벽하진 않아도 참 맛있는 인생이다.
아내의 후기
닭갈비
★4.7점
고기가 듬뿍 들어 있고, 감자는 포슬포슬하게 익어 식감이 좋았어요.
깻잎 향도 은은하게 퍼져서 입맛을 돋우더군요.
따뜻한 밥과 함께 먹으니 맛이 두 배!
말 그대로 밥도둑이었습니다.
닭곰탕
★4.9점
0.1점이 빠진 이유요?
파가 조금만 더 들어갔으면 완벽했을 것 같아요ㅎㅎ
제가 좋아하는 뽀얀 국물 스타일이라 정말 만족스러웠어요.
진하고 부드러운 국물 덕분에 어느새 그릇이 깨끗해졌네요.
순식간에 완식했습니다!
P.S.
<메뉴판없음 재료는사랑 단골은한명>이 30화를 넘어 새롭게 연재북을 만들었습니다.
이전 이야기들은 아래 링크에서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onlyoneplate
또한 일정상의 이유로 연재 요일이 목요일에서 일요일로 변경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맛있는 글과 행복한 요리로 찾아뵙겠습니다.
늘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