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기다렸다

스프카레

by 퉁퉁코딩

추위를 맞이하기 위해 겨울을 기다렸다.

아침저녁 공기가 조금씩 얇아질 때마다 아직은 아니라며 스스로를 되돌려 세웠다.

패딩을 꺼낼지 말지 망설이게 만드는 날씨로는 부족했다.

이불 밖으로 나오는 일이 결심이 되고 창문을 여는 일이 용기가 되어야 했다.

전역을 기다리던 병장 시절처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고민할 여지도 없을 만큼 확실한 추위를 원했다.

겨울을 기다린 이유가 첫눈을 기다리는 낭만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국물을 기다리고 있었다.

추우면 추울수록 더 잘 어울리는 요리, 바로 스프카레를 먹기 위해서였다.



일본에서 두 번 먹어본 적 있는 요리다.

첫 번째는 6월의 도쿄였다.

여행 셋째 날 아침, 도심에서 기차를 타고 삼십 분쯤 벗어나 관광지와는 거리가 먼 조용한 동네에 도착했다. 기찻길을 건너 골목으로 들어서자 삼 층쯤 되는 빌라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주말 오전 같은 느린 공기 속을 걸었다.


그 한적함 속에서 동네 분위기와는 살짝 어긋난, 너무 세련되어 오히려 낯선 흰색 인테리어의 브런치 카페를 찾았다.

카페였지만 주력 메뉴는 음료나 디저트가 아니라 스프카레였다.

이 지점에서 이미 신뢰가 조금 생겼다.

마치 우리 동네에 횟집 간판을 달고 있으면서 정작 사람들이 더 많이 먹는 건 닭갈비인 식당처럼.

얼마나 맛있길래 굳이 정체성을 벗어난 요리를 내놓는 걸까, 괜히 기대가 됐다.

번역기를 켜 두고 맵기와 토핑을 하나하나 골라 주문했다.


난을 찍어 먹기엔 너무 묽고, 재료를 따로 익혀 올린 한국의 찌개나 국과는 결이 다른 음식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말 그대로 '스프'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리는 요리였다.

숟가락으로 떠서 살짝 기울이면 국물은 주르륵 흘러내린다.

밥을 비벼 먹는 음식이 아니라 말아먹는 음식이었다.

구운 채소들은 각자의 역할을 분명히 하고 있었고 닭다리 역시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처음 만나는 형태의 카레였지만 배 속으로 내려가는 든든함과 혀끝에 남는 얼큰함만큼은 전혀 낯설지 않았다.



두 번째는 7월의 삿포로였다.

삿포로는 원래 여름에도 삼십 도를 좀처럼 넘지 않는 도시였지만, 몇 해 전부터는 그 공식이 무너지고 있다.

그날도 그랬다.

기후 변화 앞에서 여름의 삿포로는 생각보다 훨씬 더웠다.

오전에는 삿포로 외각의 항구도시 오타루에서 스테인드글라스 박물관 두 곳을 연달아 관람했고, 오후에는 다시 삿포로 시내로 돌아와 현대미술관을 둘러봤다.

볼 건 많았고, 걷는 거리는 길었고, 우리의 체력은 예상보다 훨씬 빨리 바닥을 드러냈다.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미술관 다음 일정이 저녁 식사인건 다행이었지만, 문제는 이동이었다.

걸어서 가면 삼십 분,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까지도 한참을 걸어야 했다.

그날의 더위와 우리의 상태를 고려해 처음으로 그 비싸다는 일본 택시를 타보기로 했다.

오 분쯤, 지나가는 차들을 유심히 바라봤지만 택시는 한 대도 오지 않았다.

결국 포기하고 식당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서른 걸음쯤 걸어가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순간, 마치 후광이라도 비추는 듯 한 대의 택시가 눈앞에 나타났다.

우리는 무인도에 표류하다 구조 헬기를 발견한 사람들처럼 마구마구 손을 흔들었다.


택시에 올라타니 머리가 희끗한 기사님이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식당 주소를 보여주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함께 차는 곧바로 출발했다.

그 시간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웨이팅이 심하다고 들었던 곳이었지만 운 좋게도 대기 없이 바로 입장할 수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시원한 맥주로 목을 축이며 스프카레를 기다렸다.

더위에 이미 한 번 지쳤지만 스프카레의 얼큰함이라면 다시 땀을 흘리며 먹어도 괜찮았다.

일본 사람들도 이열치열을 아는 걸까.

식당 안에는 현지인들은 아무렇지 않게 뜨거운 스프카레를 즐기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 식당이 있는 지하부터 1층까지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인터넷에서 보았던 '한 시간 넘게 기다릴 수도 있다'는 바로 그 풍경이었다.


만약 택시를 잡지 못하고 그 더운 길을 걸어 도착했더라면 우리는 얼마나 더 지쳤을까.

우리는 더 늦었을 것이고, 이 긴 웨이팅을 끝까지 버틸 수 있었을까.

아내는 아직도 그 노년의 기사님을 은인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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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카레가 가장 유명한 지역은 우리가 7월에 찾았던 삿포로다.

삿포로는 홋카이도의 최대도시이자, 눈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겨울이 되면 비행기 값이 팔십만 원에 육박하지만, 사람들은 기꺼이 그 값을 치르며 눈을 보러 간다.

영화 러브레터에서 여주인공이 "오겡끼데스까"를 외치던 바로 그곳이 바로 홋카이도의 삿포로에서 멀지 않은 한 설원이다.

그러니 스프카레는 태생부터 겨울 요리다.

여름에 먹었어도 분명 맛있었지만 찬바람이 뺨을 때리고 손끝이 먼저 시려오는 계절에 다시 한번 제대로 먹어보고 싶었다.


집에서는 늘 반바지 차림이던 내가 어느 날부터 긴 바지 잠옷을 꺼내 입기 시작했고, 아내는 겨울을 나기 위한 핫팩 한 상자를 주문했다.

드디어 그때가 왔다.

다시 스프카레를 먹어야 할 타이밍이었다.

먼저 얇게 썬 돼지고기에 소금과 후추를 뿌려 냄비에 굽는다.

고기에서 나온 물이 모두 날아가고 냄비 바닥에 살짝 눌어붙을 즈음 고기를 건져낸다.

그 냄비 그대로 다진 양파를 갈색이 될 때까지 천천히 볶는다.

캐러멜라이징이라는, 시간을 요구하는 과정인데 기다린 만큼 단맛이 돌아온다.

양파를 계속 저어야 해서 이 과정만큼은 아내의 도움을 받았다.

여기에 다진 마늘과 생강, 토마토소스를 넣고 살짝 볶은 뒤 일본 카레 파우더와 드라이 바질을 넣어 섞는다.

물과 치킨 파우더, 건져둔 고기를 붓고 끓이기 시작한다.

오래 끓일수록 맛있기 때문에 카레를 계속 끓이며 토핑 준비에 들어간다.

느타리버섯과 브로콜리는 기름을 발라 오븐에 15분 굽고, 닭다리는 소금, 후추, 맛술에 잠시 재운 뒤 마찬가지로 오븐에서 사십 분 굽는다.

파프리카와 피망은 팬에 굽고 그 팬에 남은 기름으로 데쳐둔 연근과 당근도 다시 익힌다.

계란은 완숙으로 삶는다.

카레 국물을 담고 준비한 토핑을 하나씩 올린 뒤, 따로 담은 뜨거운 밥 위에 치즈를 얹어 녹이고 레몬즙을 뿌리면 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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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레를 계속 저어줘야 하고 동시에 여러 가지 토핑을 준비해야 하는, 아주 번거롭기 짝이 없는 요리였다.

식당에서 주문할 때는 채소 하나 추가할 때마다 천 원, 이천 원씩 붙는 가격이 괜히 야속하게 느껴졌던 음식인데, 직접 만들어보고 나니 그 정도는 받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맛이 별로였다면 요리의 수고는 꽤 억울해질 뻔했지만, 첫 숟갈을 입에 넣는 순간 만들어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얼큰한 국물이 혀를 감싸며 먼저 열을 남겼고, 뒤이어 향신료의 냄새가 코끝을 스치며 천천히 올라왔다.

한 숟갈을 삼킬 때마다 국물은 점점 진해졌고 몸 안쪽부터 따뜻해지는 게 느껴졌다.

마음껏 올린 토핑들은 그 어떤 것도 과하지 않았다.

어느 하나 빠지는 재료 없이 모두가 제자리를 알고 있는 듯했다.

모두가 주인공인 완성된 한 그릇이었다.


일부러 창문을 살짝 열었다.

찬 공기가 방 안으로 스며들게 두고 그 상태로 국물을 한 숟갈 더 떠먹었다.

약간의 으슬함, 그리고 그걸 단번에 덮어주는 뜨거운 국물.

스프카레는 역시 겨울 요리가 맞았다.



스프카레를 먹기 위해 이번 겨울을 기다렸다면, 이제는 또 다른 이유로 겨울을 기다리게 됐다.

다만 그 겨울은 다음 해도, 그다음 해도 아닌 십 년 뒤의 겨울이다.

우리가 처음 연애를 시작한 건 12월 중순의 추운 겨울밤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그 겨울로부터 여덟 번째 해를 맞이했다.


8주년을 기념해 아내는 혼자서 작은 이벤트를 준비했다.

십 년 뒤의 자신에게, 십 년 뒤의 나에게, 그리고 혹시 그때쯤 세상에 와 있을지도 모를 우리 아이들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일본의 한 서점에서 하얀 눈이 내리는 그림의 편지지와 봉투를 고를 때부터 이미 시작된 이벤트였다.

별을 보기 위해 찾아간 영월에서 잠시 머물 한 카페를 찾았다.

나는 책을 읽고 있었고, 아내는 절대 보지 말라며 네 통의 편지를 완성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보자기로 꽁꽁 싸서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 조심스럽게 숨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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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어갈수록 겨울을 반기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추워서 무릎이 시린다고, 난방비가 많이 나온다고, 눈 오면 차가 막히고 길이 미끄럽다고.

다 맞는 말이다.

겨울은 확실히 불편한 계절이다.


그런데 만약 기다릴 무언가가 있다면, 그 계절은 조금 달라진다.

스프카레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아직 열어보지 않은 편지를 떠올리는 마음으로 겨울을 맞이할 수 있다면 그건 꽤 괜찮은 계절이 아닐까.

이번 겨울도 나는 그렇게 겨울을 맞이해보려 한다.

겨울은 여전히 춥겠지만, 기다릴 이유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반가운 계절이 된다.


아내의 후기

스프카레
★5.0점
삿포로에서 먹었던 스프카레 뺨치게 맛있었던 정말 맛있었던 우리 집 스프카레였습니다.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을 바라보며 캐럴을 배경음악 삼아 듣고, 와인으로 적당히 취기가 까지 오른 정말 행복한 식사 시간을 보냈습니다.
닭다리살은 얼마나 촉촉한지요.
브로콜리 사이사이로 카레가 맛있게 스며들고 연근과 당근도 부드러워 좋았습니다.
맛은 물론이고 분위기까지 함께 잡은 그야말로 최고의 메뉴였어요.


P.S.

아내는 이번 겨울을 또 다른 이유로 기다리고 있다.

눈이 펑펑 오면 나와 함께 눈사람을 만들고 싶다고 한다.

같이 해줄 수 있냐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묻는데, 그 누구도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몇 해 전, 아내는 언니와 함께 눈사람은 아니고 '눈곰'을 하나 만들었다.
공원 한가운데 세워둔 그 눈곰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어갔다.

그 정도의 완성도를 따라가려면 이번 겨울은 나도 각오를 좀 해야 할 것 같다.

내가 마지막으로 눈사람을 만들어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기 때문이다.
미리 찰흙이라도 사서 연습을 해둬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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