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즈마리 감자오븐구이, 토마토참치범벅
이제 막 명함을 받은 직장인 1년 차였을 때, 여자친구(지금의 아내)는 학교 앞 미용실에서 당당하게 학생증을 내밀며 재학생 할인을 받을 수 있던 3학년의 대학생이었다.
대학교에서는 같은 과 선후배였지만 내가 취업을 했다고 해서 우리의 물리적인 거리가 갑자기 멀어지지는 않았다.
운 좋게도 회사가 졸업한 학교와 같은 도시에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친구는 학교 기숙사에 살고 있었다.
거기서 걸어서 20분쯤 떨어진 곳, 내가 구한 자취방은 우리가 전부터 자주 놀러 다니던 동네에 있었다.
신입사원이었던 나는 아직 회사의 많은 일을 맡기엔 너무 새것이었다.
대부분의 날을 다섯 시에서 여섯 시 사이에 퇴근할 수 있었다.
선배들은 왜 저렇게 야근을 하는지, 나보다 월급도 훨씬 많으면서 왜 늘 돈 걱정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시절의 내가 선배들보다 많이 가지고 있던 것은 시간뿐이었다.
퇴근 후 수업을 마친 여자친구와 거의 매일 저녁을 함께 먹었다.
선배들이 매일 퇴근 후 무엇을 하느냐고 물으면 나는 아무렇지 않게 여자친구랑 먹을 저녁을 준비한다고 답하곤 했다.
마치 내가 취미로 도예를 한다거나 주말마다 봉사활동을 간다고 말한 사람처럼 신기한 눈빛들이 따라왔다.
하루는 여자친구가 전복을 한가득 사 들고 자취방으로 찾아왔다.
오는 길에 할인하는 걸 봤다고 했다.
한 번도 손질해 본 적 없는 전복을 인터넷을 뒤져가며 둘이 나란히 솔을 들고 꼬박 사십 분에 걸쳐 손질했다.
여자친구가 먹고 싶다며 재료를 들고 찾아오는 날이면 그날의 메뉴는 즉흥적으로 정해졌고, 우리의 연애 초반은 매일이 새로움으로 가득했다.
그 무렵 저녁 식탁에는 늘 빠지지 않는 질문이 하나 있었다.
여자친구는 숟가락을 들기 전에 꼭 나의 하루를 먼저 꺼내 들었다.
오늘 회사생활은 어땠는지, 하루 종일 무엇을 했는지.
신입사원 시절의 회사는 모든 것이 신기했고, 마주친 새로움은 늘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지금도 가끔 아내가 웃으며 꺼내는 이야기가 있다.
회사에서 혼자만 쓰는 이상한 줄임말을 애용하던 부장님 이야기다.
부서에 처음 배치되던 날, 전체 메일로 하나의 요청이 날아왔다.
KT 할 수 있는 미팅을 셋업 한 뒤 어레인지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미팅은 회의, 셋업은 준비, 어레인지는 시간과 장소를 잡는 일.
여기까지는 그럴듯했다.
문제는 KT였다.
도무지 감이 오지 않는 두 글자였다.
선배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Knowledge Transfer, 그러니까 인수인계 시간을 잡아달라는 뜻이라고 했다.
원래 다들 이렇게 쓰느냐고 묻자 선배는 자신도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분만 그렇게 쓴다고 했다.
메일의 끝에는 TS도 붙어 있었다.
이건 또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Thanks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 역시, 그분만의 표현이었다.
IT 업계에서는 영문 용어를 섞어 쓰는 말을 흔히 판교어라고 부른다.
처음엔 어색하지만 대부분은 업계 안에서 공유된 약속이어서 금세 익숙해진다.
언어란 결국 함께 쓰는 사람들끼리의 합의이니까.
다만 그 부장님의 언어는 아직 합의되지 않은, 어쩌면 영원히 합의되지 않을 자신만의 언어였다.
지금은 그냥 그런 사람이 있구나 하고 혼자 넘길 만한 사소한 일이지만, 그때의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저녁 식탁 위에 하나씩 풀어놓았다.
여자친구는 신기하다는 얼굴로 듣기도, 낄낄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하지만 회사생활이라는 것이 매일같이 새로운 일만 선물해 주지는 않는다.
대부분은 비슷한 하루의 반복이고, 가끔은 그 반복이 유난히 지겨운 날도 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이상하게 지치고, 하루를 설명하려 들면 오히려 더 피곤해질 것 같은 날.
빨리 회사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날도 있다.
입사하고 석 달쯤 지났을 때, 나는 결국 여자친구의 질문에 조금은 신경질적인 대답을 하고 말았다.
퇴근 후에는 회사 생각을 하고 싶지 않다고, 이제 그 질문은 그만해 주면 안 되겠냐고.
여자친구는 아직 회사를 다녀보지 않아 그저 궁금해서 묻는 것뿐이라며 투덜거렸고, 곧 알겠다는 말과 함께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저녁, 아내는 조금 뾰로통해 보였다.
그리고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여자친구 역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회사를 조금 다닌 뒤에야 그때의 내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퇴근하면 회사 생각을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고 했다.
가끔은 유난히 더 힘든 날이 있다.
힘든 일은 나누면 반이 된다고 하지만, 굳이 다시 꺼내 생각하고 말하고 싶지 않은 하루도 분명 있다.
그저 직장에서의 나를 내려놓고 집에 돌아온 나로서 쉬고 싶은 날 말이다.
바로 그런 날이었다.
복잡한 하루를 보낸 날에는 저녁 식탁까지 복잡할 필요가 없다.
밥과 국, 여러 반찬이 차려진 상보다 익숙한 재료로 만든 한두 접시의 간단한 저녁상이 더 어울린다.
거기에 어울리는 술 한 잔이면 충분하다.
그래서 그런 저녁상을 준비했다.
냉장고에 로즈마리가 조금 남아 있어 로즈마리 감자오븐구이를 만들기로 했다.
이름만큼은 왠지 하루를 잘 보낸 사람의 음식 같다.
먼저 올리브오일에 다진 마늘과 로즈마리를 넣고 약불에서 천천히 기름에 향을 입혔다.
주방에 퍼지는 로즈마리 향이 지친 하루를 감싸주기 시작한다.
그사이 감자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물에 삶고 건져 물기를 빼고 소금과 후추로 가볍게 버무려 두었다.
향이 충분히 밴 기름은 체에 걸러 감자에 골고루 묻혔다.
그리고 오븐으로 보냈다.
오븐 안에서 천천히 노릇해지는 동안 두 가지 소스를 준비한다.
허니 머스타드에 마요네즈와 백후추를 섞은 담백한 딥 소스.
케첩에 타바스코, 꿀, 레몬즙, 백후추를 더한 스파이시 케첩 소스.
감자가 다 익자 볶아 두었던 마늘과 로즈마리를 위에 올려 마무리했다.
팬에 남은 로즈마리 기름이 아까워 요리를 하나 더 만들었다.
토마토참치범벅이다.
남은 기름에 캔 참치와 토마토소스, 모짜렐라 치즈를 넣고 잘 비벼 약불에서 밑면이 살짝 눌어붙을 때까지 익혔다.
접시에 덜어 파슬리 가루와 흑후추를 갈아 뿌리 완성했다.
와인을 한 잔 곁들이자 오늘 같은 날에 딱 알맞은 식탁이었다.
힘들었던 하루가 끝난 뒤의 저녁을 먹었다.
잔을 기울이는 동안 오늘 하루도 조금씩 정리되었다.
이제 아내는 퇴근 후 내 표정이 어둡거나 유난히 지쳐 보이면 굳이 캐묻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물어보되, 말하고 싶지 않다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덧붙인다.
식탁에서는 회사에서 있었던 이야기가 단 하나도 오르지 않는다.
대신 음식 맛이 어떤지, 요즘 재미있게 본 영상 이야기, 다녀왔던 여행의 사소한 장면 같은 것들을 꺼낸다.
자주 나누었던 이야기가 다시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겹지는 않다.
오히려 즐거움에 더 가깝다.
우리의 일상도 생각해 보면 비슷한 것들의 반복일지도 모른다.
항상 즐겁기만 할 수도 없다.
하지만 아내와 나누는 그 반복적인 이야기들은 이상하게도 좀처럼 지겹지 않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날, 이야기하기 싫었던 하루는 억지로 꺼낼 필요가 없다.
결국 언젠가 회사를 떠나게 된다.
아내는 평생 함께한다.
반복되는 하루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해 주고, 말하지 않는 선택마저 존중해 주는 누군가와, 우리는 결혼을 결심했나 보다.
아내의 후기
로즈마리 감자오븐구이
★4.8점
감자를 삶고 오븐에 구워 속은 부드럽고 겉은 살짝 쫀득한 식감의 감자였다.
신랑이 스스로 양식에 약하다고 말하곤 하는데, 그 말이 무색할 만큼 정말 맛있었다.
간도 딱 맞았고 와인과의 궁합도 좋았다.
토마토참치범벅
★4.9점
남은 기름으로 슥슥 만들어냈다고 한 참치 요리.
그런데 이게 오히려 내 입맛에는 더 잘 맞았다.
모짜렐라 치즈를 더 넣지 못한 게 아쉬웠다.
다음번에는 꼭 더 듬뿍 넣어주시길.
너무너무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