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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체 Apr 30. 2024

존나의 그물

존나, 라는 비속어를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여자의 이야기다.











그녀의 이름은 박하엘.











하엘은 예뻤다. 이름만큼 예쁜 외모는 아니었지만 상스러운 욕을 남발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의 곱상함을 유지했다.














그녀는 한 번도 염색하지 않은 검고 윤기 나는 생머리를 유지하였고, 눈동자는 유난히 까맸으며 피부는 평균보다 하얗게 보였다. 입술선이 분명하여 분별력도 있어 보였고 얼굴형은 질리지 않을 만큼 갸름한 편에 속했다. 키나 몸매는 평균을 유지했다. 평균의 범위를 좁히자면 서울 광진구에 사는 이십 대 초반의 대학생 중에서 나름 괜찮았다는 의미다.











하엘의 그럭저럭 봐줄 만했던 외모는 얼핏 보면 개성이 없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특징이 있긴 했다. 바로 코끝에 난 점이었다. 하엘이 점이 없었다면 글쎄 지금보다 예뻐 보였을지는 확신이 안 선다. 오래전 샤니 제과에서 팔던 백설기가 유독 탐스럽게 맛있어 보이던 이유도 실제로는 플라스틱 씹는 기분이었지만, 콕콕 박혀 있던 팥 때문이 아니겠는가. 고소영도 전지현도 한가인도 빼지 않고 간직하고 있는 점. 하엘은 그 점 때문에 외모가 예뻐 보이면서 사람들 눈에 각인될 수 있던 거다. 게다가 코도 약간 큰 편이라 점이 시선을 분산시키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해주기도 했고.











한때는 코 성형을 한 사람에게 자연스러워 보이라고 병원에서 점을 찍어주기도 했다던데 하엘의 점이 인공 점인지 자연스럽게 피지가 뭉쳐서 생긴 점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아무튼 얼굴의 점은 미의 관점에 맥을 끊는 요소이기도 하면서 주목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고 하겠다. 아마도 메릴린 먼로에게 점이 없었더라면 -물론 그녀는 인위적인 점을 찍었던 것이었지만-그렇게까지 성의 상징이 되지는 않았을 거다. 단연코. 그러니 점이란 건, 특히 여성에게 있어 점이란 섹시한 느낌의 정점을 찍는 마력의 아이콘임이 분명하다.








아무튼 하엘의 점은 코끝에 붙어 있었고 선명하게 잘 보였다. 속설로 점이란 건 눈에 띄지 않은 곳에 있어야 복이 들어온다고 하지 않던가. 은밀한 곳에 점이 숨어있을수록 좋은 일이 많이 생긴다는 설. 그렇게 따지면 하엘의 점은 보기에 예쁘고 메릴린 먼로처럼 섹시해 보였을지 모르나 재수는 없던 것 일수도. 더군다나 코끝의 점은 복잡한 남녀관계나 구설수를 의미하기도. 그러나 정작 문제는 하엘의 점에 있었다기보다 습관적인 행동에 있었다는 점.








그렇다고 그녀의 행동이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도 없었고.











사건의 발단은 카페에서 비롯되었다. 언제나 사람 많은 카페가 문제다. 길티 플레저의 관점으로 욕하면서 보게 되는 막장 드라마같이 늘 탐탁지 않은 2% 감정을 안고 찾아 들어가게 되는 곳. 좋으면 비싸고 만만하면 맛이 없고 우는 아기는 내버려 두고 얌전한 강아지는 못 들어가게 하는 곳. 흔히 먹는 밥값보다 비싸다고 하는 곳. 간섭이 지나치게 난무하는 세상에 최적의 장소가 아닐 수 없다. 선악의 줏대도 모호한 인간들이 모여서 시도 때도 없이 그들의 취향에 어긋나는 인간들을 축출하기 위해 규제를 하고 참견을 하고 한마디로 침해를 한다. 정작 제거 대상은 본인 자신인 줄도 모르고.





아무튼, 현대인들은 쥐뿔 사생활 운운하지만, 실상은 게놈 프로젝트가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획일화된 공통의 삶을 살고 있다. 진부하고 지루하고 똑같은 일상 말이다. 카페는 그런 장소였다. 그들은 서로들 뭐 재미난 일 없나 하면서 공허하기 짝이 없는 공부를 하거나 수다를 떨고들 있던 참이었다. 바로 그 카페에서.








공공의 적이 출현했다는 건, 너 마침 잘 만났다며 모처럼 마음껏 화를 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선착순으로 세 명에 국한되었다는 것이 유감스럽지만, 하엘은 그날 그들의 표적이 되었다.











살다 보면 유독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하엘은 선찍후식, 그러니까 주문한 메뉴를 먼저 찍은 후에 식사하는 또래들의 보편적 성향을 따라 하며 SNS에 일상을 담은 사진을 올리고 있었다. 헐렁한 흰색 면티에 원색적인 블루 재킷, 재킷에는 싸구려 금장 단추, 그리고 부분 부분 물이 빠진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나름 상당히 멋을 낸 차림이었고 그런대로 봐줄 만했다. 하엘의 외모 뒤에는 항상 그런대로 봐줄 만했다는 표현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는 것을 참고해야 한다.











샌드위치와 프라푸치노를 먹으며 하엘은 친구와 카톡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무언가 답답했던지 상대편에서 전화가 왔고 하엘은 소리 조절 능력을 상실한 채 떠들기 시작했다. 밖은 비가 오고, 비가 오는 날은 유독 소리가 울리는 것을 참작하고서라도 하엘은 거슬릴 정도로 유난스럽게 떠들었다. 문제의 존나와 함께.








영화 노스페라투의 배경음악을 상상하라.





악몽이 당신의 피 속에 싹틀 것이다. 뭐가 그리 급한가 젊은 친구. 누구든 운명을 비켜갈 수 없다네.








하엘이 눈총을 받으며 지적을 당했던 이유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 지나치게 큰 목소리로 존나, 라는 비속어를 썼기 때문이다. 귀에 거슬리도록 말이다. 그나마 세 사람의 잔소리로 그친 것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조금만 더 지체했더라면 누군가 그녀의 존나 횟수를 녹음한 동영상을 찍어서 세상에 유포했을지도 모르니까.








첫 번째로 젊은 남자가 먼저 충고하였다. 하엘이 있던 곳은 바로 그 카페! 한국인의 대표 모임 장소로 불릴만한 스타벅스 안에서였다. 스타벅스는 이제 대중의 휴게소 같은 곳이다. 영국의 pub이 발달하여 시도 때도 없이 들락거리며 술을 마시며 노닥거리길 일삼는다면, 한국인들에게는 스타벅스가 그런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이젠 남녀노소 가릴 것도 없다. 트루릴리진 청바지를 입은 초등학생이 카페인 없는 달달한 음료를 주문하기도 하고 다방이나 롯데리아 커피만 마시던 노인들도 업종의 쇠퇴 때문인지 유행에 편승하려는지 점차 스타벅스를 들락거리기 시작하며 신세계에 동참하려 한다. 말 많은 중장년층의 놀이터가 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대학생들의 공부 장소로도, 만남의 장소로도 스타벅스만 한 곳이 없었다. 그 모든 게 담배 문화가 사라진 덕분이 아닐 수 없다. 수다 몇 갑을 앉은자리에서 쉴 새 없이 허기가 지는 줄도 모르고, 그러고들 있었다.











하엘은 카페 구석에 홀로 앉아 있었다. 시종일관 대화를 하면서 존나가 끊임없이 나왔지만, 그것이 자신이 무의식 중에 그렇게 나왔는지 어쩌다 열받는 일이 많아서 유독 그날만 그랬는지는 당장은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속사포처럼 현란하게 쏟아붓는 존나는 아무래도 습관이지 싶다. 하엘은 친구와 장시간 통화를 하면서 연신 존나를 남발했다. 존나! 존나! 존나! 주변 사람들은 정말이지 노이로제에 걸릴 것만 같았다. 누군가라도 나서야 할 때가 온 거다. 근처에서 공부하던 젊은 남자가 듣다 듣다 화가 나 짐을 싸더니 하엘에게 말을 걸었다.











젊은 남자의 스타일은


누구든 여자에게 말을 걸면 마다치 않을 준수한 외모의 그럴듯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목소리도 기분 좋을 정도로 청아해서 무조건 신뢰가 갈 정도였다.





그러나 실제 젊은 남자는 상당히 예민한 편에 속했다.





매사 정확하게 따지길 좋아했고 부당한 것을 유독 참지 못했다.











또한, 자신의 관점을 절대적으로 신뢰했고 그러한 잣대가 기계보다 정확하다고 여기는 오만한 구석이 있던 남자다. 심지어는 마트에서 구입한 목욕 신발을 가지고 양쪽 길이가 맞지 않는다며 자신의 눈은 못 속인다며 컴플레인을 걸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를 진상이라든가 피곤한 스타일이라고 쉽게 판단하지 못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그의 온화해 보이는 겉모습 때문이다. 제 딴에는 아무리 노기 어린 감정으로 상대방에게 퍼부어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저 좋은 충고 혹은 권유 정도로 흘려듣는 경향이 다분했다. 게다가 남자는 타인의 반응 따위는 상관하지도 않았고 그저 제 할 말만 하고 후련해하는 뭐 그런 체질이랄까. 어쨌든, 귀가 상당히 거슬렸던 젊은 남자는 하엘의 어깨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처음에는 탁자를 톡톡 쳤지만 반응이 없자 할 수 없이 신체를 건드린 거다.








하엘은 뒤를 돌아보았고 허둥지둥 전화를 끊었으며, 무척이나 놀란 눈으로, 그것도 최대한 예쁘게 보이길 작정한 사람의 표정으로 젊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하엘은 그것이 젊은 남자의 작업 모드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저 예쁜 아가씨. 혹시 존나, 라는 뜻이 뭔지 아세요?











하엘은 잔뜩 수줍은 웃음으로 그저 낯선 남자가 말을 걸어오는 상황에만 취해서 부끄러워할 뿐이었다. 머릿속은 온통 내게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라며 환상에 젖어 소설을 쓰는 중이었다. 그래서 젊은 남자가 조곤조곤 어원을 설명하는 것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좆이 나온다는 소리예요. 아가씨 좆 나와요?











하엘은 멋쩍게 웃기만 하였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부실함이 하엘만의 특징은 아닌 세상이다. 현대인들은 시각과 촉각이 발달한 대신 후각과 청각이 둔감해지는 추세니까. 때문에 남자의 말이 자신에게 모욕을 주는 의미로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저 웃기만 하며 예쁜 표정을 짓는 하엘을 보며 젊은 남자는 황당함으로 주춤해진다. 바보 아니야?





확인차원에서 '좆'이란 남성의 성기를 비하해서 쓰는 말이다. 여자의 '씹'과 같은 거다.





설령 제대로 알아들었어도 영문을 모르긴 마찬가지였을 거다. 하엘에게 존나는 결코 욕이 아니었다. 그저 정말이나 매우 등의 상투적 부사에 불과했다. 혹은 미국인들이 습관적으로 내뱉는 you know와 다를 바가 없던 거다. 그러니 젊은 남자가 노골적으로 존나의 어원을 해석해 주었을 때도 이해 불가였던 것. 젊은 남자는 마무리 발언을 끝으로 카페 문을 나섰다.











-예쁜 입으로 존나, 라는 말 좀 아껴 쓰세요.








하엘은 지속해서 착각에 머물렀다. 자신이 미온적으로 굴자 부끄러워 도망간 것으로 해석했다.





아무래도 하엘의 기억 속엔 예쁜데 존나 아쉽네요, 정도로 남아있는 듯.











곧이어 약속했던 친구가 들어오자 하엘은 수선을 떨기 시작했다. 과장의 과장은 끝이 없었다. 조금 전 엄청나게 잘생긴 남자가 자신에게 예쁜 아가씨 하며 말을 걸었다며, 그런데 자신이 눈치 없게 대시한 줄도 모르고 그저 웃기만 했다고. 친구는 숙맥같이 왜 그랬느냐며 남자를 따라가지 내깟 게 뭐라고 나를 기다렸냐며 한술 더 뜨고 있었다.











-그래도 친구를 버리고 남자를 따라갈 수는 없지.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 관객 같은 손님들은 한껏 비웃고들 있었고.





친구가 등장하자 하엘은 좀 전의 흥분 탓인지 더욱 과격하게 잦은 존나를 사용하였다. 그렇게 존나 틀은 식을 줄 몰랐고 하엘이 보다 맛깔스럽고 그럴듯하게 내뱉고 있던 무렵.











참다 참다 엄마 또래의 아줌마가 폭발 일보 직전의 표정으로 다가왔다.








대체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리를 떠날 때쯤 용기가 생기나 보다. 카페를 나서며 아줌마는 하엘에게 격하게 쏘아붙였다.











-아가씨 말 좀 이쁘게 해. 좀 조용하게 떠들든지.











아줌마는 계속 구시렁거리면서 자리를 떠났다. 험담이 익숙한 분이라 직설적 충고는 서툴렀다. 하엘은 별꼴을 다 보겠다는 식으로 아줌마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하엘은 더 득의만만해졌다. 쇠퇴기의 초라한 아줌마가 자신의 젊고 아름다움을 시샘하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별꼴이야 쭈그렁 방탱이 아줌마 같으니라고.





-냅둬. 갱년기잖아.











하엘은 다소 불쾌했지만, 이번에도 반성하는 기미는 없었다. 존나에 불을 붙일 뿐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한 노인이 화가 단단히 나서는 주먹을 휘두를 기세로 하엘에게 덤벼들었다. 노인도 마찬가지로 논리적인 화법 대신 흥분하여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정황을 몰랐다면 노인이 미치광이로 보였을 것이 분명하다. 노인의 중언부언이 시작되었다. 했던 말을 또 하고, 화를 내고, 했던 말을 또 하고, 당최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고. 그렇다고 노인이 무식한 것으로 보이진 않았고. 주문을 외우듯 한자 성어를 잔뜩 섞어서 사용하였고. 하엘이 중간에 추측한 건 '도에 관심 있으세요?' 뭐 그런 권유를 하려던 참인가? 였고. 인상이, 관상이, 팔자가, 복덕이, 홍염이, 그런 식의 말을 해대는 것을 보면.





하엘은 속으로, 오늘 스타벅스 물이 왜 이래 하며 분위기 탓을 하고 있었고.











-사불급설 하지 못하고 어디 천박하상스럽게시리, 요즘 젊은 여자들은 격이 너무 낮아. 에잇.











하엘은 노인의 역정을 피해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엘은 차마 노인 앞에서는 대들지 못했지만, 친구와 심각한 노인 추태 문제를 얘기하며 걸었다. 정부 탓도 하였다. 왜 저런 노인들이 공공의 질서를 어지럽히며 애꿎은 젊은 사람들을 괴롭히는지 모르겠다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카페에서의 일들은 어쩌다 생길 수 있는 흔한 에피소드로, 기억조차 남지 않을 과거로 묻힌 지 오래고.











존나를 남발하던 하엘은 여전히 친구들 사이에서는 말버릇을 고치지 못했지만 이성 앞에서는 내숭을 떨 줄 알았다. 특별히 조심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원래 그런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표시하듯이 하엘은 지적이고 우아한 여성처럼 보였다. 비교적 가정교육을 잘 받은 티도 났다. 정말이지 존나를 달고 사는 것 외에는 하엘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순수한 구석도 많았고 자기 관리를 잘하는 편에 속했다. 모두가 그 마약 같은 존나 만이 문제였던 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엘은 물색 끝에 제법 괜찮은 남자를 사귀게 되었고,


연애의 두 번째 단계쯤인 친구에게 보여주는 과정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확신이든 과이든 꼭 필요한 절차였다.





흔히들 하는 실수 중 하나지만 만난 지 며칠 만에 하엘의 남자는 친구에게 보여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엘 역시 잔뜩 긴장하였고.








뜻밖에도 남자의 친구가 등장하자 하엘은 순간 심장이 멎는 듯했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 이런 기시감이 사랑일까. 하엘은 애인의 친구를 보며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렸다. 전에도 이렇게 준수한 외모의 남자를 본 적이 있었는데 하며 낯익은 느낌을 인연으로 간주하려던 찰나였다. 그리고 그렇게 좋고 낯익은 느낌은 얼마든지 지금의 남자 친구를 갈아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담은 거였다. 물론 별안간 든 생각이긴 하지만 새로 사귄 애인에 대한 확신도 들지 않았고 아직 이렇다 할 사이로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는 듯싶었다. 상황을 봐서 애인에게 미안하게 되었다며 사과를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엘의 생각은 그랬다. 아직 아무것도 단정할 수는 없으니깐, 이라며.











-전에 어디서 본 적 있지 않나요? 몇 주 전인 거 같은데. 제가 눈썰미가 좋은 편이라서. 극동 아파트 맞은편에 있는 스타벅스.











그제야 하엘은 기억이 떠올랐다. 하엘은 놀라우면서도 묘한 웃음을 지었다. 말할 것도 없이 기분 좋은 웃음이었다. 이런 걸 두고 인연이라 일컫는 것 같았다. 반면, 그때의 남자는 상당히 불편하고 겸연쩍은 태도로 일관했다. 그도 그럴 것 같았다. 쑥스러운 것이 당연한 거 아니겠는가. 하엘 혼자만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하엘은 순간 자신이 드라마 속 여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 좋은 착각을 하였으며 앞으로 닥칠 사랑전쟁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하며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엘의 표정은 누구보다 밝았고 예뻐 보였다.











-점. 코끝의 점 때문에 기억이 더욱 선명하게 나네요. 누구든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점이죠.








젊은 남자는 그때의 불쾌한 기억을 떠올렸다. 전과 달리 요조요조한 모습으로 나타난 하엘이 더욱 기괴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결국, 젊은 남자는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먼저 일어나야겠다며 나가버렸다.








하엘의 애인은 영문을 몰랐고. 하엘은 조심스럽게 남자를 만났던 이야기를 자신이 해석한 대로 알려 주었다. 하엘은 점점 표정이 굳어가는 애인의 감정 따위는 개의치 않으며 줄곧 애인의 친구에 관하여 질문을 하였고 답을 들으면 들을수록 하엘은 그에게 푹 빠져들었다. 바로 앞에 앉은 애인의 모습도 나무랄 데 없었지만 어쩐지 선택을 잘못한 것 같다는, 억울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아, 지루해. 뭐 재미난 일 없나.








하엘은 별안간 모든 상황이 지루하게 느껴졌으며 하루라도 빨리 애인의 친구를 다시 만나기를 고대하면서 어떻게 하면 애인과 결별을 할 수 있을까 고심하였다.








하엘이 잔뜩 들떠하며 어쩌지를 못하고 있는 사이 모든 정황을 친구로부터 카톡으로 받은 남자는 하엘의 뿌리 깊은 착각과 눈썰미 좋은 친구의 냉정한 비판에 묘한 분노를 하였고, 그놈의 사랑이란 감정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놀라운 체험을 하고 말았다. 둘은 쓸쓸하게 그 자리에서 바로 헤어졌고 조금 비겁하지만 남자는 그 뒤로 하엘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영문을 모른 척하면서 내심 기대를 하였던 하엘은 줄곧 남자를 추궁하며 이유를 듣고자 하였고 하엘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남자는 엉뚱한 사실을 전달한다.











-존나 착각하니까 좋냐? 니가 존나의 여왕이라며.








-무슨 소리야. 나 그 사람이랑 아무 일도 없었어.








-그렇겠지. 존나 무슨 일이 있는 게 이상한 거지. 존나 끊어.

















그렇게 하엘은 어이없게 차였다. 그렇다고 남자의 친구와 연락이 닿은 것도 아니었다. 하엘은 남자 친구와 헤어진 게 슬펐다기보다는 무언가 원인을 찾아야 했기에 진지하게 고민 모드에 빠져 보았다. 아무리 알 수 없는 난감한 상황에 놓여있다 해도 조금만 기억을 더듬다 보면 언제나 해답은 나오기 마련이다. 숙고의 시간이 지나 어렴풋이 원인을 알 것 같기도 하면서 인정하기 어려운 임계점에 도달한 순간이다.








-내가 존나의 여왕이라고? 존나. 존나? 아~


설마, 설마, 말도 안 돼. 누구나 쓰는 말인데. 존나가 어때서.











하엘은 정답을 알아냈으면서도 좀처럼 인정하기 싫었다. 존나의 여왕이란 말로 단서를 찾아 기억을 더듬어 갔던 하엘은 원인을 찾고 나니 정말이지 말도 안 된다는, 그러나 찜찜하다는 생각을 부인할 수 없었고 무언가 부끄러운 생각에 감히 친구에게조차 선뜻 상의하지 못하고 혼자 철드는 타이밍을 갖기로 하였다. 이젠 철없이 놀던 시기는 지나가고 있으니 여러모로 자중해야겠다며 비속어는 쓰지 않기로 마음먹은 계기가 된 건 분명하다.











그 이후로 하엘은 결코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비속어를 사용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런 다짐은 중요한 게 못 되었다.











졸업을 앞둔 시점 하엘은 취직보단 취집이 쉽겠다는 판단하에 사랑보다는 결혼에 적합한 남자를 찾아서 만났고 순조롭게 성사되는가 싶었다. 일류는 못 되어도 이류급의 여대를 다니고 있었고 나이도 한창 예쁠 때고 외모도 참신하니 어디다 내놔도 나무랄 데는 없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결혼을 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런 식으로 취집을 간 선배의 도움으로 제법 괜찮은 남자를 만났고 결혼까지 이어지나 싶던 찰나였다.











하엘이 남자의 부모님을 뵙던 날이다. 어느 시점을 거치고 나면 죽을 때까지 결코 스타일이 변하지 않는 아줌마를 먼저 알아본 것은 하엘이다.











아줌마는 그때의 하엘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영원히 모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줌마는 기억과는 별개로 하엘을 보며 마냥 기분 좋은 친숙함을 드러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아요. 며느리가 되려고 그랬나. 그 코끝의 점이 낯설지가 않아. 언젠가 한 번 봤던 건 같은데.











하엘은 알고 있었다. 아줌마가 결코 자신을 기억해 낼 리는 없다고. 그러나 대개 아줌마들은 그랬다. 기억은 망각한 채 촉이 좋은 직감을 활용하여 아는 척하는 것 말이다. 하엘은 그것에 미칠 지경이었다. 그냥 묻어둘라치면 코끝의 점을 들먹이며 기억해 내려는 모습에 심장이 잘려나가는 것 같았다. 누군가 젊은 대학생이 자신처럼 카페에서 존나를 연발하다가 과거에 있던 일을 회상할지도 모르고 그러나 그때의 그녀가 지금 자신의 며느리였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하엘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말없이 하엘이 먼저 절교를 선언했다. 이유는 너무도 구차하여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하였고 그저 타이밍이 안 좋다는 핑계로 에둘러서 그렇게 관계 끝났다. 정말 기도 안 찰 사소한 이유로 말이다. 어차피 사랑 따위는 없었으니까, 가  하엘이 유일하게 챙긴 위안이었다.











하엘을 불행에 휘말리게 한 사건은 극히 소소하고 가벼운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후유증은 상당히 컸다. 인생이란 그런 거였다. 사소한 것은 늘 그렇게 별것 아닌 것처럼 넘어가려는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하엘은 줄곧 자신의 불운과 상황 탓만 하였다.











이미 존나를 남용했던 그 철없던 시대의 실수는 망각 한지 오래고 말이다.








그래도 묵묵히 잘 버텨 나갔다. 노력도 하였고 점점 성숙하고 멋진 인간으로 변해갔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니까. 과거에는 그보다 더한 실수를 하면서도 잘 사는 사람이 수두룩 했으니까.


하엘은 모든 것을 잊고 삶을 성실히 모범적으로 살았다. 미적거리며 미루던 졸업을 앞두고 한창 좋을 몸값에 시집도 못 갔으니 정말이지 이젠 취직할 때가 온 거다.








용케도 원하던 회사에 지원하여 최종 면접을 보러 간 날, 중역들과 대면한 자리에서였다. 분위기는 좋았다. 면접은 그냥 형식적인 절차에 지나지 않는다 싶을 정도로 관대하고 긍정적인 분위기의 막바지였다. 그런 와중에 우연하게도 회사 대표와 고문이사가 기습 방문하였다. 어느 회사에나 비밀리에 있기 마련인 역술가였던 그는 그날도 어김없이 회사 대표와 풍수를 논하며 투자에 관한 적절한 시기를 상담하던 중이었다. 보통 중역 사원을 뽑을 때는 반드시 사주와 관상을 보면서 조언을 해주었지만, 대량으로 뽑는 신입 사원 절차는 일일이 간섭하지 않던 편이었기에 그날은 그저 우연히 면접 현장을 방문한 것뿐이다.





면접관들이 일어나 그를 맞이하는 통에 하엘도 얼떨결에 일어나 인사를 하였다. 예사롭지 않은 눈으로 고문이사는 하엘을 쏘아보았다. 하엘을 유심히 보던 그는 인사과장을 향해 속닥였다.








-저 친구는 관상이 안 좋아. 저토록 큰 코끝의 점은 구설에 자주 오르는 상이야. 신중히 뽑도록 해.








하늘 위에 돋보기가 자신을 향해서만 쪼고 있는 듯 태양은 뜨겁고 강렬했다. 이게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범벅이 되어 하엘은 쓸쓸히 걸었다. 거리엔 검정 스커트에 흰색 블라우스를 입고 하엘과 같은 표정으로 걷고 있는 여자들이 태반이었다. 서로 눈을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고난의 걸음걸이가 녹록지 않은 삶의 여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존,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존나의 그물에 걸리고 만 하엘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존나를 그친다 해도, 지속한다 해도 인생이 지금보다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세상은 너무도 좁고 촘촘하게 연계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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