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 양보를 얻었어. 일요일엔 출근 도장을 찍지 않아도 돼.""우린 원래 일요일엔 안 찍잖아.""그게 얻어낼 수 있는 최선이었어.""개새끼네 그거."
그리고 나중에 이 협상을 뒤집는 문제로 다툼이 있는데 생산성과 효율성을 기치로 변화하는 사회 구조가 얼마나 억지스럽고 우스꽝스러우며 그래서 허무하기까지 한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변혁의 길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은 도태됩니다." 철도 회사 대표는 그렇게 말하며 기존의 노동자를 분리하고 퇴직시키고 도태될 수밖에 없게 만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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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좌파 사제' 켄 로치가 2001년에 내놓은 이 보고서는, 철도 민영화라는 거대한 자본의 실험장 위에서 노동자라는 부품이 어떻게 마모되고 폐기되는지를 다룬다. 영화 전반에서 사회주의적 이념의 냄새가 진동하지만, 그것은 선동의 악취라기보다 땀과 기름에 쩐 작업복 냄새에 가깝다.
배경은 1995년 사우스 요크셔. 민영화의 광풍이 철로를 덮친 시기다. 이 지점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한때 한국에서도 지식인들이 구로 공단으로 위장 취업해 노동자의 삶을 연기한 적이 있다. 역사적 필연성? 글쎄. 관찰자의 입장에서 그것은 지독한 오만이자 기만이다. 약자의 편에 선다는 명분 아래 약자의 삶을 '체험'하는 것. 그것은 마치 동물원 우리 안에 제 발로 들어가 잠시 원숭이 흉내를 내고는, 퇴근 후엔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는 위선적인 연극과 같다.
타인의 고통을 쇼핑하듯 체험하려 했던 그들은 지금 주류가 되어 샴페인을 마시거나, 도태되어 사라졌을 뿐이다. We shouldn't be doing this.
각설하고, 다행히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그런 위선자가 아닌, 실제 평생을 철로 위에서 보낸 노동자(롭 도버)가 썼다. 덕분에 대사 한 줄, 호흡 한 번에 현장의 거친 입자감이 살아있다. 유명 배우 하나 없이,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경계가 무너진 화면 속에서 역설적인 상황들은 건조하게 희화화된다.
이들의 협상은 블랙 코미디의 정수다. "한 가지 양보를 얻었어. 일요일엔 출근 도장을 찍지 않아도 돼." "우린 원래 일요일엔 안 찍잖아." "그게 얻어낼 수 있는 최선이었어." "개새끼네 그거."
이 대화에는 '효율성'이라는 미명 아래 자행되는 자본의 사기극이 압축되어 있다. 생산성과 효율성. 이 매끄러운 단어들이 현장에 적용될 때 얼마나 기형적인 촌극을 빚어내는지, 감독은 킬킬거리며 보여준다.
"변혁의 길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은 도태됩니다." 철도 회사 대표의 이 세련된 선고는 노동자들을 '구형 부품'으로 분류해 쓰레기통에 처박겠다는 선언과 다름없다.
이 비극적인 결말은 영화 초반, 아주 사소한 메타포로 이미 예견되었다. 이혼한 전처에게 비싼 장미를 바치려는 남자. 문은 열리지 않고, 그는 좁은 우체통 구멍으로 억지로 장미 다발을 쑤셔 넣는다. 짓이겨지고 으깨지는 꽃송이들. 그는 "이게 얼마나 비싼 건데"라며 푸념하지만, 좁은 구멍(시스템)에 억지로 끼워 맞춰지는 장미(노동자)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 무모함과 순수함의 대가는 처참한 파손뿐이다.
농담 따먹기 하던 노동자들의 얼굴에서 점차 유머가 거세된다. 생존의 공포가 그 자리를 채운다. 효율성을 위해 안전 규정을 무시하던 그들은, 결국 동료의 죽음 앞에서도 시체를 은폐하고 작업을 마무리해야 하는 괴물이 되어간다.
이 영화는 비관적이다. 그러나 눈물은 없다. 그저 현금에 저당 잡힌 하루하루가 어떻게 인간의 존엄을 갉아먹는지, 그 마모의 과정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