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브로덱이고 그 일과 무관하다.
하지만 나에게는 늘 '안더러', 즉 '타인'이었다. 아마도 어디서 온 사람인지 알 수 없을뿐더러 우리와 달랐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진실이란 손모가지를 분지를 수도 있고 도저히 끌어안고 살기 힘든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헌데 우리 대부분이 원하는 것은 그저 살아 나가는 것이다. 가능한 한 고통스럽지 않게. 그것이 인간이다.
전쟁을 겪어봤다면 틀림없이 당신도 우리와 같을 것이다.
삶의 단계라네.... 처음에 본 것은 순수의 시대,
그다음은 어리석은 분노, 여기는 관조의 지혜라고 할 수 있겠지.
이제는 두려움이 나의 옷이 돼 버린 것 같다.
가장 이상한 점은 수용소에서 똥개 브로덱이 됐을 때, 그때는 두려움을 몰랐다는 사실이다.
그곳에는 두려움이 존재하지 않았다.
어젯밤 마을 사람들이 안더러를 죽였어요.
난 나중에야 거기 갔어요.
살인에 가담하진 않았어요.
'보고서'를 쓰는 임무만 받았지요..... 그게 다예요....
말이 입술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입 안에 머물러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죄가 없다는 것은 무고한 사람들 가운데 유일한 죄인과 결국 똑같다는 것을 알았다.
"가끔은 떠나온 곳에 돌아가지 않는 것이 더 나을 때도 있다오.
두고 온 것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데 돌아갔을 때 무엇을 보게 될지는 알 수 없는 법이니까.
더군다나 인간이 한참 동안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으니.
당신은 아직 젊어요....
명심해 두시오......
청이 있는데
... 그 아이를 용서하시오.. 그들을 용서해 주시오....."
"너는 다른 사람들과 달랐지." 늙은 은사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넌 다른 아이들과는 달랐어.
항상 사물 너머에 있는 것을 보고 있었거든...
항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려고 했지."
이 같은 비겁함이, 비록 실제로 있었던 일은 아닐지라도, 이것이 역겨웠다.
따지고 보면 나는 다른 사람,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 스스로를 변호하려고 나를 시켜 '보고서'를 쓰게 한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
인간은 이렇게 생겨 먹었다.
그래도 스스로 순수한 영혼을 가졌다고,
관념과 꿈과 이상한 멋진 것을 만들어 내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인간은 자신이 물질적 존재이며 머릿속에서 꿈틀거리고 싹트는 것 못지않게 두 궁둥이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도 중요한 그의 일부라는 사실을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억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는 없는 법이다.
잠시 잠재울 수 있을 뿐....
"인간은 항상 다시 시작하는 동물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끊임없이 다시 시작한단 말인가? 잘못을?
인간의 삶은 정말 이상하다.
그 안에 뛰어들고 나면 그다음에는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나 싶은 의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보다 영리한 사람들은 문만 살짝 열어 보는 것으로 만족하나 보다.
이제 와서 얘기지만, 이방인이 와서 좋아한 사람은 우리 동네에서 나 하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새로운 시작, 다시 삶으로 돌아간다는 뜻처럼 느껴졌다.
실은 군중 그 자체가 괴물이다.
어마어마하게 큰 하나의 새로운 몸뚱이로 다시 태어난다.
나는 행복한 군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평화로운 군중이란 없다.
"최후에 승리하는 것은 언제나 무지라는 걸 잘 기억해 둬. 브로덱, 결코 지식이 아니야."
이제 진실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대부분은 그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는 진실이 아니라 의심을 택했다.
비록 그 의심이 지극히 작고 빈약한 것일지라도.
그렇다. 나는 그 편이 더 좋았다.
진실이 어쩌면 나를 죽일 수도 있었기에.
세상에 균열은 만들지언정 갈라놓지는 못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려지기가 무섭게 잊힐 수도 있는 것이다.
수용소가 나에게 가르쳐 준 역설은 이런 것이다.
인간은 위대하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발뒤꿈치에도 미치지 못한다.
우리의 본성에 이러한 무능력이 이미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도대체 윤리가 뭡니까,
무슨 소용입니까? 모든 것을 초월하는 유일한 윤리는 바로 목숨입니다.
죽은 자들만 억울한 법이지요.
사람들은 침묵하는 사람을 두려워한다.
아무 말 안 하는 사람을. 들여다보고 아무 말 없는 사람을 경계한다.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으면 무슨 생각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안더러가 그린 초상화는 한마디로 살아 있었다.
그것은 곧 나의 삶이었다.
그림이 나로 하여금 나 자신, 나의 고통, 나의 현기증, 나의 두려움, 나의 욕망 전부와 얼굴을 마주하게 만들었다....
.. 그들은 자기 자신을 보았다. 생살이 드러난 모습을. 그들이 누구이고 무슨 짓을 했는 지를...
어리석음은 두려움에 동반되는 병이다.
이 둘은 서로를 살찌워 암종을 만들고 그 암종은 삽시간에 퍼져 나간다.
"이제 잊어야 할 시간이네. 사람에게는 망각이 필요해."
분노와 증오만으로도 얼마든지 정신이 뒤집힐 수 있다. 실은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독한 술이다.
"이제 남은 게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그래서 자네가 불행한가?"
"종이는 불탔어도 제 머릿속에 있는 것은 태우지 못했습니다!"
"자네 말이 맞아. 종이에 불과했어.
하지만 그 종이 위에 마을 전체가 잊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이 있었네
마을은 잊을 거야. 사람이 다 자네 같지는 않아, 브로덱."
나는 지치지도 않고 계속 걸어간다. 행복하다. 그렇다, 난 행복하다.
.. 풍경 속에 있던 모든 것이 내 발자국 뒤에서 지워져 버린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