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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체 May 26. 2024

망각의 과정

어릴 때는 딱히 무언가를 기억하고 살 필요가 없었다. 공부할 것도 많고 특히 익히고 암기할 것 투상이었을테니까. 그리고 축적된 과거가 길지 않을테니 더욱 더 떠올릴 이유도 못 찾았고.


요즘 자꾸 기억력 감퇴를 호소하는 경향이 있다. 자꾸 가물가물해지는 기분. 그래서 이렇게 늙는가보다 싶다. 눈도 침침해지고 흰머리도 눈에 띄게 늘고.

그러나 늙은 것과 상관없이 이제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보다 자꾸 과거에서 정보를 찾으려 하는 안일함이 문제가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왜 자꾸 과거의 경험에 의존하려는건지. 그 시간들이 꼭 바람직했다고 볼 수도 없는데.

그냥 기억이 나지 않으면 내 인생에 그리 중요한 것이 못 된다는 의미다. 사람이건 물건이건 추억이건 떠오르지 않는 건 애써 찾지 않아도 된다.


어쩌다 자연스럽게 잊고있던 사람이나 물건이 떠올랐다면 그 또한 그럴만한 이유가 있고 그럴 때가 왔다는 거겠지. 그러니 애써 기억을 끄집어내려고 하지 말자. 망각을 들춰내면 지저분해지기 십상이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지저분한 것들이 묻어 기억의 왜곡을 일으키기 다반사일테니까. 


그런데 기억할 필요도 없던 익숙한 시스템 오작동은 난감을 넘어 좌절이다. 노인들이 맞춤법을 틀리는 것 따위를 비웃었던 내가 한심하다. 치매와 노망은 엄연히 다르다지만, 내 나이가 이런 것들을 거론할 만큼 늙은 것도 아니어서 그저 건망증으로 치부하면 될 일이지만.


미리 준비하는 차원으로 기억을 망각하는 일이 잦아졌다면 그것은 단순 노화로만 볼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마스터하고 다른 차원으로 가기 위한 일종의 혼미한 혹은 혼동 상태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죽음이 끝이 아닌 허물만 남기고 다른 차원으로 가는 유체 이탈이라면 말이다. 개인적으로 영혼은 불멸한다는 주의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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