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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오토픽션

백화점 생존법

by 무체

쉬는 날이다. 12시간 내리 잠만 잤다. 그런데도 고단함이 그대로다. 뜬눈으로 멍하니 벽에 걸린 시계만 바라보고 있다. 1초, 1분, 1초, 1분. 시간이 가는 건지 부는 건지 모르겠다.


나의 씻지 않은 얼굴에는 라면 냄새가 나는 것 같다. 그러자 갑자기 라면이 당긴다. 부글부글 물 끓는 소리에 면을 넣었다. 면발이 고슬고슬하니 잘 말렸다. 끓일 때마다 물이 과했는데 이번에는 운이 좋았다. 짭조름하니 간이 잘 배었다. 후루룩 쩝쩝. 잘 먹었다는 것인지 방귀가 나온다. 1초, 1분, 1초, 1분. 시간이 가는 소리가 들린다. 소앵에게 전화가 오려면 앞으로 3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 TV를 켰다. 문득 사고를 일삼는 두 직원이 생각난다. 걱정도 고단함에는 맥을 못 추는 것 같다. 또다시 눈이 감긴다.


잠깐 졸았나 보다. 전화벨 소리에 다급하게 눈이 떠졌고 벽시계를 보았다. 9시. 소앵의 전화다. “여보세요.” 소앵은 들뜬 목소리로 별일 없었다고 전한다. 나는 소앵에게 수고했다고 말하고 엉겁결에 전화를 끊었다. 엎드린 채 개 체위로 기지개를 켠다. 비로소 꿈인지 잠인지에서 깨어난다. 어떤 환영은 TV 속으로 도망가고 소앵의 앵앵거리던 목소리만 맴돈다. 사고를 일삼던 두 직원에 관하여 물어볼걸. 그들이 잘하려고 할수록 내 마음이 불안하다. 그런 마음으로 만들어 놓은 실수는 선의의 거짓말같이 깜찍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책임은 온전히 내 몫이라 하니까.


백화점 파트 매니저 김서영이 나를 찾는다고 조장이 전한다. 그녀가 나를 좋은 일로 찾을 리가 없다. 어제 내가 무슨 꿈을 꾸었던가.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녀의 책상 앞에 두 손을 모으고 섰다. 그녀는 배우 이미연을 꼭 빼닮았다. 찰랑거리는 긴 머리카락 때문인 건지... 외모만큼 능력도 뛰어나다. 이대 나왔다고 했던 것 같은데 항간에는 그룹 패밀리란 말도 떠돌았고. 그런 소문이 그녀의 카리스마를 더욱 부각했다. 그녀는 팔랑거리는 인쇄용지를 내 앞에 던지듯 건넸다. 나 따위와는 눈도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태도로 컴퓨터 모니터를 뚫어지게 보면서 말했다. “어떻게 할지 본사와 얘기 후 알려 주세요.”


인터넷에 불만 글이 올라왔다. 세트 상품의 판매 거부가 이유다. 같은 물건을 네 세트 이상 팔지 않은 판매원 김송윤의 이름이 보인다. 사고를 일삼는 아해 1인이다. 그녀를 위해 거들어 준 최희슬도 포함됐다. 사고를 일삼는 아해 2인이다. 전날 꿈속 대화처럼 들리던 소앵의 말이 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매니저님 오늘 별일 없었어요. 객단가도 높았고 매출도 저희가 헤라 다음으로 2위 했어요. 저희 완전 잘했죠?’


매니저가 없는 날에는 직원들이 알아서 잘하는 것도, 못하는 것도 내게는 걱정이었다. 직원들은 용지를 들고 온 내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화장 중이던 손끝을 멈칫하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수다를 떨던 이들도 입을 닫기 시작했고. 소앵이 조심스럽게 내 손에 들린 용지를 걷어간다.

“소리 내서 읽어.” 내가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가 소리 내어 읽는 동안 내 눈은 앞코가 다 헤어진 소앵의 통굽 신발을 보고 있었다. 내용을 다 읽은 소앵의 발이 움직였다. 내 앞에 사고를 일삼는 두 직원의 발이 멈췄다. 이들의 신발도 소앵의 그것과 비슷하게 닳아 보였다.


“왜 그랬어?” 나는 그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카드깡’이 의심스러워서 물건을 팔지 않았다고 답했다. “카드깡인지 어떻게 확신하는데?” 입을 다문 그들의 표정이 자못 억울해 보인다.


백화점은 달마다 규제 지침이 바뀐다. 지난달은 과대 포장을 단속했다. 이번 달은 네 품목 이상의 동종 세트 상품 판매를 금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다들 ‘요령껏’ 팔고 있다는 것을 나는 모르지 않았다. 전임 매니저는 테스터 제품을 불법으로 판매하다 걸렸다. 그녀는 즉시 퇴사를 밝히고 매장을 떠났다. 나는 인수인계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급하게 발령받아 오게 되었다. 그것도 교육팀에서 곧바로 온 터이라 영업 관리에 대하여 도통 아는 게 없었다.

딱히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할 수도 없는 적잖은 나이인데도 카드깡이란 용어는 내게 생소했다. 누군가에게 그것을 물어본 적도 없다. 그런 것까지 알아야 하나 싶은 반발심도 있었고 행여 애송이 취급을 당하진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어렴풋이 이전 매니저가 저지른 비슷한 불법이겠거니 했다. 카드깡에 관한 구체적인 궁금함을 나보다 오래 근무한 소앵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다들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나만 모르는 카드깡. 혼자서 정의한 것이 두 개 이상이 똑같은 제품을 카드로 구매하는 행위 그리고 그것을 상습적으로 일삼는 일이라고 정하였다.


사고를 일삼는 두 직원은 내 앞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내가 김서영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최희슬은 내 눈치를 보더니 전날 왔던 손님은 카드깡 업자가 분명하다고 작은 소리로 말한다. 소앵도 열심히 그들을 위해 거들어 주었다. “맞아요. 그 사람 아주 상습적인 업자예요. 여기서 오래 일한 사람들은 다 알아요.” 소앵의 바둑알 같은 서클 렌즈가 반짝거린다. 그녀에겐 오래 일한 게 벼슬이다. 나는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김서영에게 경력도 없이 굴러 들어온 돌이란 이유로 까인 한이 맺힌 까닭일까.


발령 첫날, 나는 매장 데스크 앞에 서툰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때 백화점 잡화팀 파트 매니저 김서영은 만삭의 배를 하고 내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나는 그녀를 보며 쭈뼛한 자세로 인사했다. 그녀의 냉랭한 기운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는 내 인사는 받지도 않고 내 앞의 데스크 문을 신경질적으로 열더니 무료 주차권 한 무더기를 집어 들었다. 언제 그런 것이 들어 있었는지를 의심할 겨를도 없었다. 나는 주차권 뭉치를 쥐고 있는 그녀의 왼손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은 땡땡하게 부어 있었다. “이건 뭐죠? 따라와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뒤를 따라 사무실에 도착한 나는 눈물 콧물을 다 쏟으며 사과했다. 눈이 퉁퉁 부은 채로 매장으로 돌아갔더니 소앵이 두서없이 해명했다. “모아놨다가 고정 고객들한테만 드리곤 했는데, 백화점에선 절대로 못하게 했거든요. 전 매니저님이 워낙 고정 고객이 많아서 관행처럼 하느라 모아 두고 있었어요. 매니저님 오시고 치워 놨어야 했는데 미처 보질 못했어요. 죄송해요. 그런데 파트 매니저가 어찌 알고 뒤졌을까요? 마치 본 듯이 말이에요.”


김서영의 사람 길들이기는 계속되었다. 그 그룹의 지침은 파견 사원은 공포로 다스리는 거였다. 본사는 무조건 참으라고만 했다. 횡포가 심하기로 유명한 백화점이라 오죽하면 별도 수당을 책정했겠느냐며 참는 게 능사라고 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이제 겨우 잠잠해지나 싶었는데 또다시 일이 터지고 만 거다. 김서영은 이번 일을 구실로 본사에 재차 무리한 요구를 할 것이 틀림없다. 해결점을 찾거나 버틸 동안 고문을 당하는 것은 오로지 내 몫이었다.


“사은품 얼마나 더 지원해 주면 되는 거라니?” 본사 과장이 내게 물었다. 본사 과장도 까다로운 김서영과는 직접 대면을 피하려 했다. 과장은 전날 사고를 친 직원 하나를 바꿔달라 했다. 나는 김송윤에게 전화기를 넘겼다. 그녀는 기가 죽은 목소리로 죄송하다고 하더니, 카드깡이 맞다며 어조를 높였다. 내 손끝이 부르르 떨렸다. 최희슬이 전화를 넘겨받았다. 최희슬도 김송윤과 똑같이 말했다. 자신들은 원칙대로 했을 뿐이라고.


본사 과장은 그들의 말만 듣고 직접 해결해야겠다고 나섰다. 적잖이 우려가 되었다. 과장은 흥분과 실수를 잘하는 사람이다. 술만 마시면 운다. 그러다 부장이 등을 한 번 다독거리고 허리께를 만지작거리면 이내 없던 일로 돌아가곤 했다. 다음 날 예상했던 대로 그가 인터넷에 두 번째 불만 글을 올렸다. 얼마 후 본사 과장이 힘없는 목소리로 내게 전화했다. 자신을 비롯한 문제를 일으킨 직원 두 명이 그 앞에서 무릎 꿇고 사과하길 원한다고.


본사 과장은 입사 동기인 데다 사석에선 나와 언니 동생하면서 각별히 지내는 사이다. 사람은 좋은데 결정적인 순간에 비굴한 근성을 잘 드러낸다. 딸린 식구가 많아 회사에 오래 다니고 싶다는 게 그녀의 상습적인 변명이다. “내가 어떻게 그 새끼 앞에서 무릎을 꿇니. 이젠 아예 나 퇴사할 때까지 계속 인터넷에 올린단다. 완전 악질이야. 임자 제대로 만났어.” 입속에 말이 맴돌았다. '그가 카드깡 업자는 확실한 거예요?'


“그 손님 전화번호 아시죠? 제가 한 번 해볼게요.” “괜찮겠어?” “시도는 해봐야죠.”


그가 전화를 받았다. 탁하고 불분명한 목소리. 발음도 부정확하고 말도 무척 빠르다. 지적인 사람이 아닌 건 분명하다. 그는 누운 자세로 전화를 받고 있는 모양이다. 잔뜩 늘어진 태도로 말꼬리를 잡고 있었다. 어찌 됐든 나는 예의를 갖추어 그에게 사과했다. 거칠고 투박한 그 남자는 왜 비싼 화장품 네 세트를 사려다 오해를 받았는지 궁금했다. 그의 얼굴을 모르니 추리에 제약이 많다. 바람을 피우는 건가. 정말로 카드깡 업자가 맞나. 나는 그의 밑도 끝도 없는 말을 경청할 뿐이었다. 마치 사과만 하도록 설계된 로봇처럼 말이다.


“네. 죄송합니다. 고객님 말씀이 옳아요.” “그래도 이 사람은 경우가 바른 것 같네.” “죄송합니다. 최근 백화점 규정상 네 세트 이상 제품을 못 팔게 하는 관계로,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내가 카드깡 업자인 줄 안거네. 사람을 그렇게 매도해도 되는 거요? 나 진짜 가만있지 않을 거야. 그 본사 과장인가 뭔가 하는 여자는 뭔 일을 그딴 식으로 하는지. 그 여자부터 잘려야 해. 그리고 나 똑똑히 기억하는데 가운데 송자 들어간 이름이랑 휘슬인지 희슬인지 그 직원 그리고 본사 과장이란 여자 셋이 내 앞에서 무릎 꿇고 사과하지 않으면 보라고 어떻게 되는지.”


이젠 대놓고 반말이다. 카드깡이란 용어는 세상에서 나만 모르는 단어 같다. 좋은 단어 같지도 않은데 왜 모르는 사람이 없는지도 신기하다. “어떻게 하면 고객님 화가 풀리실까요?” 그의 주장은 그들이 자신 앞에 무릎 꿇고 사과하는 거라고 했지만 뭔가 다른 속셈이 있는 게 틀림없다. 협상을 원하면 안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죄송하다는 말뿐이다.


빌고, 사정하고, 울고, 빌고 그러다 보니 4시간이나 지났다. 독한 놈이다. 세상에 이런 악질이 다 있나 싶다. 차마 권고사직을 못하고 연봉만 동결시키고 있던 김송윤과 최희슬. 그들에게 직접 가서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한다면... 그들은 그리 할 것이다. 그래서 더 싫었다. 그들은 왜 자기 자존심도 못 챙기고 사는지. 왜 그렇게 바보같이 무능하기만 한지. 화가 났다. 나는 결코 그들을 위한 게 아닌데. 자꾸 그들 편을 들고 있었다.


나는 점심도 거른 채 무용한 소모전에 지치기 시작했다. 그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 온종일 바닥에 드러누워 게임을 하고 밥 먹고 오줌·똥을 싸고 트림까지 한다. 직장도 없고 친구도 없는 사람인가. 도저히 이대로는 결론이 날 것 같지가 않다. 아무래도 내가 먼저 백기를 들어야겠다. 까짓거. “제가 대신 가서 꿇을게요. 아니면 옷을 벗던지.” “아니, 미스 주가 왜? 미스 주는 아무 잘못도 한 게 없어. 미스 주는 본사 과장보다 나아. 그나마 제일 정상이야.” 그는 어느새 나를 ‘미스 주’라고 부르고 있었다. 요즘도 그렇게 호칭을 쓰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하지만, 호칭에 기분이 나쁠 틈도 없다. 도대체 그는 뭐 하는 작자일까. 지치고 막막하고 암담했다. 짜증의 다음 단계가 포기였던가.


백화점 안에는 벌써 소문이 파다하게 돌고 있을 것이다. 기초·색조 화장품 할 것 없이 잡화코너 직원들은 구중궁궐 무수리들처럼 내가 울며 사과하는 모습을 훔쳐보고 갔다. 내가 우는 모습이 그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을 줄로 안다.


보다 못한 옆 매장 정혜란이 조심스럽게 내 앞으로 다가왔다. 하얀 가운을 입고 마치 의사 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화장품 브랜드의 매니저다. 그녀는 보글보글하게 베이비 파마를 했다. 속눈썹이 유난히 길고 풍성하여 깜박이는 속도가 감지될 정도다. 피부도 하얀 서리가 낀 것처럼 고운데 화장을 기가 찰 정도로 못하고 다녔다. 스킨케어가 주력 상품이라지만, 화장품 회사 직원이 화장을 저렇게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손 기술이 서툴렀다. 그래도 나와 제일 먼저 말을 튼 사이다. 친구로 지내기는 했어도 서로 너무 바빠서 대화할 시간이 적었다. 이 백화점 특성이 그랬다. 1년이 하루처럼 바쁘고 정신이 없는 결과로 세계에서 매출 1위를 하는 곳이라 말이다.


정혜란은 내 앞으로 쪽지를 건네주었다. 나는 아직 그녀에 대해 모르는 것이 더 많다. 그래서 그녀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알 수가 없다. 구설수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어느 편에 속하느냐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말이 많이 팔리는 곳이니까. 김서영은 편 가르기의 주범이었다. 그녀 주도하에 곳곳에 정보원들이 포진해 있다는 말을 소앵으로부터 흘려들은 적이 있다. 하여튼, 소앵은 백화점 일이라면 모르는 게 없었다. 정보를 많이 알수록 승진에 도움이 된다고 굳게 믿는 모양이다. 소앵은 김서영이 모든 것을 본 듯이 행동하는 건 그러한 정보원들 때문이라고 했다. 설마.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그런 유치한...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한 유치함의 중추적 역할은 주로 백화점 조장이 맡아했다. 백화점 조장은 아침마다 파견 직원 및 아르바이트 직원을 불러 세웠다. 고객 응대를 위한 인사 연습은 제일 많이 시키는 일 중의 하나다. 허리를 15도 낮추고 솔 톤으로 8대 인사법을 복창해야 한다. 당일 진행될 행사 내용을 숙지시키고 모르면 야단을 치기도 했다. 네 귀퉁이 벽면으로만 통행이 가능한 직원 전용 도로로 잘 다니고 있는지. 한가할 때 잡담 없이 똑바로 잘 서 있는지. 오후 네 시 청소 시간을 알리는 음악이 울리면 밀대를 들고 먼지를 닦고 있는지 등을 주의 깊게 살피는 일도 조장의 몫이다. 외출증 없이 백화점을 무단으로 빠져나가는 이가 없는지 감시하는 일도 주 업무에 속했다. 그리고 행동 수칙에 어긋나는 직원을 체크한 후 파트 매니저에게 보고했다. 소앵은 부매니저 자격으로 백화점 조장과 똑같은 행동을 매장 직원에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내게 사사건건 고해바쳤다.

백화점 화장품 여직원들.jpg


발령 첫날부터 나를 혼쭐나게 한 주차권 사건은 누구의 소행인지 아직 파악도 못 한 상태다.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나의 적들. 그런 적의가 죄다 파견 사원인 우리끼리 무슨 도움이 된다고 그러는지 모를 일이다.

정혜란이 나를 순수한 의도로 도와주려 했다고 보아도 될까. 의심을 접자. 딱히 방법이 없다. 진상 고객 앞에 직접 옷도 벗겠다고 한 마당이다. 어차피 누군가 무릎을 꿇거나 퇴사하지 않으면 해결이 나지 않을 일 같다. 그녀가 내게 건넨 쪽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박상도 700815-, ** 백화점 블랙리스트. 카드 번호 확인했더니 카드깡 업자 맞아. 확실해!’ 정수리에서 땀샘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전화기를 손으로 막고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카드깡 업자가 맞다고?” 정혜란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면 내가 책임질게.” 책임을 진다니. '네가 왜?'라고 물을 뻔했다. 본사에서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일을 타 브랜드 매니저가 책임을 지겠다고 한다. 대체 왜.


어느덧 그와 통화한 지 5시간이 넘어가고 있다. 나는 소앵을 시켜 직원들 점심도 보내고, 휴식 시간을 주면서 책임을 다하였다. 그게 매니저가 하는 일이라고 하니까. 백화점의 매니저는 십여 년간 판매 경력을 인정받아 오르는 자리다. 다들 그렇게 승진이 되었다고 한다. 딴에는 대단한 감투인 셈인데. 더군다나 본사에서는 세계에서 제일 높은 매출을 자랑하는 이 백화점의 매니저라면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고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특별 수당을 더 많이 받는 곳이기도 했고. 본사 발령의 마지막 관문이기도 한 곳이었다. 그런데 나는 교육부서의 특수 경력직이란 명목으로 이곳저곳 랜덤 배치되어 있다가 몇 주 전 이곳으로 발령을 받았다. 회사 사정상 순식간에 그만둔 매니저를 대체할 직원이 나밖에 없다는 것이었는데... 내가 속한 브랜드는 한국에 처음 론칭한 신생 색조 화장품 브랜드이다 보니 위계가 상이했다. 외부 경력을 인정받아 매니저가 된 경우가 반반이었다. 그러나 이 백화점에선 그런 걸 용인하려 하지 않았다. 자기들 식으로 길들여진 직원을 매니저로 인정하겠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처음에 나는 월급이 본사보다 훨씬 많다고 해서 좋아했었다. 그것도 노련하게 추가 근무 수당을 잘 작성해야 가능한 일이었지만. 처음에는 그것마저도 서툴게, 그러니까 거짓을 부풀리지 않아 직원들 월급이 대폭 줄어드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휴무를 줄이고 추가 근무 시간을 늘려야 그나마 월급을 더 많이 받아간다는 사실을 몰랐다. 관행을 미처 배우지 못한 탓이다.


나도 소앵처럼 한 곳에서 5년 이상을 있었더라면 요령이 생겼을 텐데. 바쁘고 힘든 매장이니 제때에 쉬고, 제때에 점심을 먹이고, 휴무를 자주 주면 직원들이 만족할 줄 알았다. 그런데 직원들은 그러한 복지보다 한 푼이라도 더 받길 좋아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버렸다.


“니들 꼭 돈 때문에 일하는 건 아니잖아? 하고 싶어서 하는 일 아니었어? 너희는 메이크업 아티스트 자격으로 입사한 거지 판매 사원으로 온 게 아니야. 그러니 판매보단 고객들 메이크업에 주력하라고. 원하는 분들 있으면 무조건 무료로 메이크업 서비스 다 해드려. 그래야 니들 메이크업 실력이 빨리 늘지.” 나는 직원들에게 아티스트 정신을 강조했다. 다들 겉으로는 내 말에 힘을 얻는 듯했다.


정혜란에게 쪽지를 받은 이후 용기가 생겼다. 나에게 미스 주라고 부르는 남자의 이름을 호통치듯이 불러 보았다. “박상도 고객님?” 점점 내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고객님 계속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그러니까 그 두 직원과 본사 과장을 내 앞에 무릎 꿇게 하라고. 옷을 벗기던지.” 그는 똑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그럼 제가 옷을 벗을게요. 제가 그만둘게요.” “뭐요? 미스 주가 옷을 벗겠다고? 아, 자꾸 왜 그래? 난 그건 또 원하지 않지. 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어. 잘못한 사람이 빌어야지.” “당신 카드깡 맞대며 이 십새끼야.”


내 입에서 욕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참다 참다 뱉은 말이 십새끼라니. 막상 하고 나니 입에 잘 붙는다. 열 번도 더 할 수 있을 것 같다. “뭐? 뭐라고? 당신 지금 나한테 욕했어? 오, 이것 봐라, 그나마 제일 괜찮은 것 같아서 넘어가려 했더니 뭐? 카드깡 맞잖아 십새끼야?” “그래, 십새끼야. 나 이제 옷 벗을 거니까 상관없어. 미친 새끼야. 좀 작작 좀 괴롭혀라. 이게 사람이 할 짓이니?” 나의 언성이 높아지자 곁에 있던 정혜란도, 소앵도, 주변의 지나가던 손님들도 눈을 크게 뜨고 일시 정지했다.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길게 웨이브진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 질끈 묶었다. 한결 목덜미가 시원해짐을 느꼈다. 다시 수화기를 손에 들었다. “오. 알았어.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당신 이제 어떻게 되나 두고 보자고. 밤길 조심해라. 너. 오늘 밤 그냥 안 둔다.”

그가 전화를 끊었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시계가 없는 백화점에 손목시계는 필수다. 언제인가 한 고객이 내 손목에 꽉 조인 까르티에 짝퉁 시계를 보더니 피식 웃고 간 적이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계는 고장 없이 잘 가고 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사이에 소앵이 괜찮으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후 전화벨이 울렸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본사 과장이다. 그녀가 말하길, 그가 흥분된 어조로 본사에 전화해 나를 가만두지 않겠다며 협박했다고 한다. 어찌 되었든 본사 과장은 내 편이다. “우리 그냥 같이 나가서 무릎 꿇고 오자. 아니면 사고 친 걔들 내보내면 안 될까?” 본사 과장의 기막힌 말에 더 이상 화도 안 났다. 그렇다고 본사 과장이 미운 건 아니었다. “그 사람 카드깡 맞아요. 옆 브랜드 매니저가 정보 확인해 줬어요.” “정말? 그랬단 말이지? 일단 알았어. 그러면 그 사람 더 위험할 텐데. 혼자 집에 가면 안 될 것 같은데.” “동네 친구들한테 데리러 오라 했어요.” “그래. 잘했다.”


폐점 시간을 앞두고 백화점은 더욱 분주한 모습이었다. 다들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인 줄 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그들의 무심함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백화점 천장에선 아바의 'I have a dream'이 흘러내리고 있다. 저쪽에서 친구들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군대와 유학을 다녀온 뒤에도 여태 취직을 못하고 있는 은준과 만화가 지망생 석현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동네 친구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바빠지기 시작할수록 이들은 한가하기 짝이 없었다. 녀석들은 내가 지켜줘도 모자랄 부족한 기력으로 나를 부축하려 하였다. 나는 묶은 머리를 풀어헤쳤다. 그리고는 그들을 데리고 힘없이 백화점 밖으로 퇴장하였다. 김송윤과 최희슬이 나를 보고 있을 것이다. 내가 왜 그랬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하루 종일 내 등 뒤로 무슨 일이 오갔던지...


녀석들과 만화가게에 도착했다. 우린 짜장면을 주문했다. 비로소 찾아온 허기에 급하게 짜장면을 흡입했다. 한숨 돌린 후 녀석들에게 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내 직원들인데 무릎을 꿇리면 안 되는 거 아니니?” “물어봤어? 걔들한테? 그럴 수 있는지?” 은준이 입가에 짜장면을 묻히며 되물었다. “아니. 그런 걸 왜 물어? 그들에게 거부할 권한이 있어? 꿇으라면 가서 꿇겠지.” “물어보지 그랬어. 그래서 꿇는다고 하면 끝나는 거 아녔어?” 석현도 궁금한 듯 물었다.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무릎을 꿇어?” “하긴, 근데 넌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여섯 시간 동안 진상 손님이랑 싸움을 하고 끝내는 욕지거리까지 하고 옷을 벗겠다고 지랄이냐.” 은준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러게 그게 뭐라고. 진짜 지겨워서 이 짓 못하겠다. 만화가나 되던지 해야지.” 나는 은준을 보며 답했다. “아까 너 뭐라고 욕했다 했지? 십새끼?”


다음 날 나는 퉁퉁 부은 얼굴로 출근하였다. 예상했던 대로 백화점에서 난리가 났다. 나는 곧바로 백화점 고객 상담실로 불려 갔다. 파트 매니저 선에서 해결할 일이 아니라고 하였다. 고객 상담실 담당자는 나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고객님한테 욕을 할 수가 있어요?” “그것은 잘못했지만 제가 여섯 시간 동안 시달리며 사과를 하고 있었다고요.” “정황이 어찌 되었든 고객한테 욕을 한 건 잘못한 거예요. 이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란 것도 아시겠죠?”


사람들은 새로운 환경에 대해서는 신뢰보다는 두려움을 먼저 접하게 된다. 인터넷이 활성화되면서 이 백화점도 업계에서 처음으로 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했다. 특히 고객 만족 1위 백화점이라는 상품성을 철저히 지키고 있는 곳이었기에 평판에 민감하였다. 그런 탓인지 홈페이지 게시판에 뜨는 모든 게시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곧바로 고객의 요구대로 이행하였다. 한 색조 화장품 브랜드가 백화점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브랜드 퇴출을 건의한 고객의 인터넷 글로 인해 퇴점한 사례도 있었다. 그 브랜드가 프랑스에서 150년 동안 명성 있는 브랜드란 것을 아는 이가 적은 무지를 탓할 수도 없고...


'칭찬해 주세요'란 글만 뜨면 해당 매장은 각종 특혜에 경사가 나곤 했다. 반면 악성 고객 구분 없이 불만 글이 접수되면 분위기가 달라졌다. 해당 직원을 공개적으로 질타하면서 인사이동을 종용하는 등의 소란을 떨었다. 모두가 정체 모를 인터넷 글에만 의존하였다. 그룹 회장을 비롯한 임원진들이 고객의 의견에 민감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동안 쌓아 놓은 원칙과 신뢰는 번복되고 무너지고 있었다. 천둥 번개보다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고객의 컴플레인. 밤 12시가 넘으면 그들은 호박 마차의 마법이 풀린 허무를 탓하듯 그곳에 글을 올렸다. 자신을 무시했다고 불평하는 글이 주를 이뤘고...


“카드깡 업자도 고객으로 간주할 수 있나요?” 그녀에게 공포가 잔뜩 실린 훈계성 지침을 듣고 있던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그 고객이 카드깡 업자라면요?” “그렇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겠죠. 그런데 왜죠?” 나는 그녀에게 정황을 설명하였다. “어쨌든 고객에게 욕을 한 건 잘못한 일이지만, 카드깡 업자가 분명하다면 우선 이것부터 바로잡아야겠죠. 일단 저는 감사팀에 요청을 할 테니 그와 관련한 정황과 자료는 알려 줄 수 있는 거죠?”


그 뒤부터 사건은 내가 전혀 예측하지 못하던 방향으로 흘렀다. 내가 몰랐던 사실들이 속속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정혜란은 내 앞에서 그간의 노고를 토로하더니 차라리 잘 되었다고 안도하였다. 이참에 이런 폐단이 뿌리 뽑혔으면 좋겠다고. 다른 매니저들도 합심하여 감사에 솔직하게 응하겠다고 하였다.


파트 매니저 김서영이 영향력 있는, 그러니까 상위 매출을 차지하고 있는 화장품 브랜드 매니저를 포섭해 카드깡에 가담하고 있었다는 정황이 포착되었다. 월말이 되면 목표 달성을 위해 각 브랜드 매니저는 본인 카드로 매출을 발생하거나 카드깡 업자를 부르곤 했다는 진술이 이어졌다. 비로소 내가 카드깡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게 된 사실이 반가운 일이었을까. 그런데 왜 나만 모르고 있던 것이지? 월 매출 달성에 고작 1%가 부족해도 나는 임의 매출을 발생하지 않았다. 그런 것은 매니저 재량껏 본사 모르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인센티브제가 있어 목표 달성을 위해 내 카드 혹은 타인의 카드로 만 원의 매출을 긁기만 해도 직원들은 월급에서 십만 원을 더 챙길 수 있었다. 바보같이 나만 몰랐다.


파트 매니저의 지시로 임의 매출을 발생시킨 일부 매니저들은 비로소 자신들을 옥죄어 온 부담에서 벗어난 듯 보였다. 애가 탄 시간을 보상받기 위함인지 연일 파트 매니저에 대한 폭로가 이어졌다. 그들은 파트 매니저가 중징계를 받을 거라 확신했다. 짐짓 모른 척 추이만 지켜보던 본사 부장도 잔뜩 의기양양해져서 나를 불러 위로하고 등을 다독거렸다. 다들 매출 향상을 위해 조직적으로 카드깡 업자를 끌어들인 김서영이 중징계를 받게 될 것에 신이 난 듯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감사팀은 그녀에 대한 처벌 의지가 강력해 보였다. 매니저들은 감사에 적극 협조하면서 그녀의 징벌에 관해 몇 번이나 확답을 받았다. 모두가 그녀의 경질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쩌면 감옥에도 갈 수 있겠다며...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김서영의 처벌은 물 건너간 듯했다. 감사팀의 강력한 의지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고, 오히려 이 모든 사건이 조용히 덮이는 분위기였다. 우리가 증거로 제출한 자료들은 어디로 갔는지 찾아볼 수 없었고, 사건은 그저 작은 해프닝으로 치부되고 있었다. 김서영이 그룹 회장의 먼 친척이라는 소문이 들려왔다. 또 다른 소문으로는 그녀가 백화점 매출에 기여한 공로가 너무 커서 그룹에서 손을 댈 수 없다는 말도 있었다. 어떤 연줄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어떤 처벌도 받지 않은 채 그대로 직위를 유지했다.

나는 이런 상황에 분노하기보다는 오히려 담담했다. 이곳의 질서와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을 이제는 분명히 알게 되었다. 이곳에서 처벌은 잘못의 크기가 아니라 권력의 크기에 반비례한다는 사실을. 아침 조회가 시작됐다. 조장은 곧 기관에서 소비자 만족도 조사를 진행할 것이라고 했다. 브랜드별로 직원 한 명씩 사복을 갈아입고 입구 쪽을 서성이라고 지시했다. 누군가 설문지를 내밀면 무조건 좋게 작성하라는 지침도 있었다. 백화점도 기관의 정보원을 매수했는지 언제나 뉴스보다 정보가 빨랐다.


김서영은 출산 후 한 달 만에 출근하였다. 긴 머리는 여전히 찰랑거렸고 다소 홀쭉해진 모습이 산뜻해 보였다. 그녀는 직책을 그대로 유지했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전히 카리스마 넘치는 태도로 직원들을 대했다. 나 역시 아무 징계도 받지 않았다. 이상한 평화가 모든 것을 덮었다.


직원 통로를 걷다가 파트 매니저를 마주쳤다. 그녀는 상냥한 모습으로 내게 먼저 인사했다. 언제 한 번 밥이나 같이 먹자고 말하는 그녀. 내가 준 오일은 잘 쓰고 있다며 고맙다고 하였다. 그녀가 산전휴가를 받기 전, 나는 그녀에게 배가 트지 않는 고가의 오일을 선물했다. 이제는 알겠다. 이 세계의 생존법은 겉으로는 서로 알량한 선물을 주고받으며 웃는 얼굴로 야수 같은 본능을 숨기는 것. 나는 이제 이 시스템에 적응하기로 했다. 그들이 하는 대로 해보자. 아니, 그들보다 더 잘해보자. 이런 오기가 생기는 건 처음이었다.


화장품을 포장해 온 소앵이 내 앞으로 걸어왔다. 나는 사용법을 꼼꼼히 적은 카드를 쇼핑백에 넣었다. 그것을 김송윤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밝은 표정으로 백화점 사무실을 향해 총총 걸어갔다. 최희슬은 전화벨 소리에 급하게 달려갔다. 그녀는 솔 톤의 목소리로 경쾌하게 전화를 받았다. “매니저님 월말에 긁은 카드 취소 발생 언제 하죠?” 소앵이 내게 물었다. 이제 내게도 요령이 생겼다. 급할 때 부를 수 있는 카드깡 업자도 포섭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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