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은 처음이지?
기획을 배우다 보면 어느 순간 이런 질문이 생긴다. 기획은 왜 필요한가? 많은 조직에서 기획은 보고서를 만드는 일처럼 여겨지고, 문서를 얼마나 잘 꾸미는가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런데 기획의 핵심은 문서가 아니다. 기획은 ‘생각’을 ‘현실’로 바꾸기 위한 구조다. 기획이 없으면 사람의 생각은 떠다니다 사라지지만, 기획이 있으면 생각은 구체적인 행동이 되고, 행동은 결과로 변한다.
생각 자체는 누구나 한다. 하지만 생각을 실제 변화로 옮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 기획이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기획은 막연한 가능성을 구체적인 계획으로 끌어내고, 계획을 실행으로 옮기는 힘을 만든다. 예를 들어 아마존이 ‘고객 중심 기업’이라는 매우 추상적인 문장을 실제 전략으로 바꿀 수 있었던 것도 기획의 힘이다. 제프 베이조스는 모든 회의 문서를 “보도자료 형태”로 작성하게 했는데, 미래의 고객이 실제로 사용하게 될 모습을 글로 먼저 만들어 보고, 그 이미지를 실현하기 위한 문제·방법·실행을 기획 단계에서 정리한 것이다. 생각을 이미지로 바꾸고, 그 이미지를 실행 가능한 단계로 분리하는 일. 이 구조가 기획이다.
기획의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다이슨의 진공청소기 개발이다. 제임스 다이슨은 “더 좋은 청소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생각만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문제를 찾고, 해결 방법을 만들고, 반복해서 실행했다. 5,126번 실패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지만, 이 과정 전체는 기획의 구조 그대로였다. 문제를 정리하고, 가능한 해결책을 적용하고, 실패를 분석하고, 다시 실행하는 반복. 다이슨의 기획은 거창하지 않았다. 다만 생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구조적으로 움직였을 뿐이다.
조직의 성과도 기획과 실행 구조에 따라 달라진다. 인텔의 전 CEO 앤디 그로브는 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지 않을지 선택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결국 기획의 본질을 설명한다. 생각이라는 것은 언제나 많지만, 실행은 선택된 소수만 가능하다. 기획은 선택의 근거를 만드는 작업이다. 목적과 문제, 방법과 실행을 정리하면서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 무엇은 하지 않아도 되는지 기준이 생긴다. 기획이 없으면 우선순위가 흐려지고, 우선순위가 흐려지면 아무리 좋은 생각도 실행되지 못한다.
기획이 생각을 현실로 만드는 또 하나의 이유는 ‘문제 정의’ 때문이다. 어떤 문제든 명확하게 정의되는 순간 현실을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이 보인다. 예를 들어 한 지방자치단체가 교통 혼잡 문제를 겪고 있을 때, 겉으로 보이는 현상만 보면 도로 확장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실제 문제는 출퇴근 시간의 수요 집중, 대중교통 환승 동선, 특정 구간의 병목 등이 원인일 수 있다. 이런 구조를 찾기 시작하면, 도로를 넓히는 것이 아니라 시차 출근 유도나 버스 노선 개편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문제 정의를 바로잡는 순간 기획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는 것이다.
개인의 삶에서도 기획은 같은 힘을 발휘한다.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은 누구나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생각에서 멈춘다. 이유는 단순하다. 기획이 없기 때문이다. 왜 해야 하는지, 지금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할 것인지, 언제 어떻게 실행할 것인지 정리하지 않으면 행동은 시작되지 않는다. 사람은 막연한 것보다 구체적인 것을 행동으로 옮길 가능성이 높다. 기획은 이 구체성을 만들어 준다.
기획은 실행을 가능하게 한다. 실행이 없는 기획은 종이에 적힌 글인데, 실행이 생긴 순간 기획은 현실이 된다. 도널드 노먼이 “좋은 디자인은 사람의 행동을 바꾼다”고 했듯, 좋은 기획도 행동을 움직인다. 기획이 흔히 문서로만 다뤄지는 이유는 조직이 기획서를 산출물로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획의 본질은 문서가 아니라 사고의 구조다. 사람의 생각이 현실로 내려오기 위해 필요한 구조를 만드는 일. 이것이 기획의 역할이다.
생각이 현실이 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요소는 반복 가능성이다. 기획은 한 번 작성하고 끝나는 문서가 아니라 여러 번 반복될수록 더 강력해지는 도구다. 한 번 기획 구조를 만들고 실행하면, 그다음 기획도 자연스럽게 같은 구조를 따라가게 된다. 반복할수록 사고가 정리되고, 판단의 폭이 넓어지고, 실행력이 안정된다. 기획은 생각을 현실로 바꾸는 반복 가능한 시스템이다.
결국 기획은 복잡한 기술이 아니다. 기획은 생각을 구조화하고, 문제를 정의하고, 방법을 선택하고, 실행의 뼈대를 만드는 과정이다. 기획이 있으면 변화는 방향을 얻고, 변화는 움직이기 시작한다.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생각을 현실로 만드는 힘은 기획을 아는 사람에게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