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 그리고 또 후쿠오카.
때는 2014년 10월말, 성남 모란의 한 맥주집에서 지인들과 2차를 치르고 있던 중이다.
어쩌다 보니 여행에 대한 얘기가 흘러나왔고, 내가 마치 여행 전문가라도 되는 양 설교 수준으로 떠들어대고 있다.
한 명은 중국만 두세 번, 나머지 두 명은 해외여행은 전무한 수준이니... 난 그들 앞에서 여행의 필요성과 즐거움에 대해 설파를 할 수밖에.
(필자는 라오스, 베트남, 중국, 이탈리아 이렇게 4번이 전부였음)
그러다 일본 얘기가 나왔다. 다들 일본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지만, 난 무슨 못 들을 것을 들은 것처럼 펄쩍 뛰었다.
아니, 일제 강점기를 잊었단 말인가? 게다가 후쿠시마 방사능 유출로 위험하다는데 무슨 일본을 간단 말인가?
굳이 일본으로 여행을 갈 필요가 있겠냐며 난 절대 가지 않을 것이고, 다른 세명에게도 절대 일본은 가지 말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설명했다.
아니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물론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형의 갑작스러운 가족여행 제안에 모든 것이 순식간에 벌어졌고, 난 어느새 부산에서 후쿠오카로 향하는 쾌속선 '코비'를 타고 있었다. 세월호 이후 배에 대한 약간의 공포심과 뱃멀미에 대한 조바심이 났지만, 모두 다 기우였다.
2박 3일의 빠듯한 일정이었기에 캐널시티에서 잽싸게 우동을 흡입하고 타꼬야끼로 입가심하니 벌써 출발이다. 버스에 몸을 맡긴 채 한참을 가니 유황냄새가 진동한다. 이곳이 바로 벳푸다. 온천에 발한번 담그지 못했지만 유황냄새 실컷 맡고, 계란 하나 먹어주니 일본에 온 기분이 슬슬 나기 시작한다.
https://youtu.be/v6k8K4FOMZs?list=PLNp48vdGYpZlyjUZnPX80YrezbLmru5En
근처 유후인으로 이동하니 이곳은 마치 동화 속 작은 마을 같다. 조용하고 아기자기하다. 약간의 기념품을 챙겨 들고 이동한 곳은 바로 아소산이다. 작년에 폭발하면서 한동안 출입금지였고, 지금은 반경 1Km 금지라고 한다.
난생처음 접한 활화산은 굉장히 이색적이고 놀라웠다. SF영화 속 한 장면을 바로 눈앞에서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랄까.
아홉 번을 와도 단 한 번을 보기 힘들다는 아소산 정상은 이 날 역시 케이블카 운행금지로 아쉽게 발길을 돌려야 했다.
첫날은 유후인 근처 어딘지 모를 적당히 한적한 곳에 있는 한 호텔에 묵게 됐는데, 우리 가족은 술이 필수다. 호텔 1층에 회전초밥집과 어설픈 맥주체인점이 있었지만 여기서 먹고 싶지는 않았기에 무작정 술집을 찾아 나섰다.
큰 길가 양쪽으로 저 멀리 많은 가게들이 보인다. 술집 찾기는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아니다. 30분을 걸어가도 호프집 비슷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거의 1시간을 가도 없다. 반대편으로 건너가서 되돌아와본다. 역시 없다. 거의 2시간을 길바닥을 헤매며 돌아오는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호텔 1층에 있는 맥주체인점이라도 가보기로 한다. 어...근데 들어와 보니 생각보다 깨끗하고 가격도 저렴하고 맛도 좋다. 왜 우리는 2시간을 헤매고 돌아다닌 것인가? 헤매고 돌아다니다 와서 그런지 맥주는 꿀맛이다.
다음날 구마모토 근처에 있는 키쿠치로 이동해 료칸 비슷한 곳에 여장을 푼다. 이곳에서 유명한 마유 샴푸로 머리를 감고 온천에 몸을 담그니 물의 느낌이 한국의 것과 사뭇 다르다. 내친김에 노천탕 쪽으로 진출해 초겨울 바람의 시원함을 같이 느껴본다. 이제서야 알게 됐다. 왜 일본의 온천이 좋은지를. 말로 딱히 설명하기 힘든 그 오묘한 차이를.
온천욕을 끝내고 나오니 바로 앞에 조그마한 술집이 보인다. 망설일 것 없이 들어갔더니 어느 시골 선술집 같은 느낌이 든다. 한쪽 구석에는 술 취한 아저씨가 떠들고 있고 담배연기가 자욱하다.
우선 생맥주를 4잔 시켰다. 허름한 술집에 어울리지 않게 얼음잔에 삿포로 생맥주를 내온다. 삿포로만의 독특한 향과 알싸함 그리고 시원함이 환상적이다. 하지만 지저분한 실내와 퀴퀴한 공기 때문에 1잔만 마시고 나오기로 했는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무려 6천엔을 내라는 거다. 일본어에 약한 우리와 일본어뿐이 모르는 주인 할머니 사이에 계속 똑같은 대화만 오고 갈 뿐 도대체 무슨 영문으로 이렇게 비싸게 받는지 알 길이 없다. 바가지를 썼다며 씩씩 거리며 다른 술집을 찾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본은 이렇게 1인당 얼마로 책정되어 일정 시간 동안 무제한으로 마실수가 있는 선술집이 많다)
이번엔 말고기를 파는 꼬치집에 들어갔다. 시원한 아사히 맥주에 각종 꼬치를 시켜먹다가 호기심이 발동해 말 사시미를 시켰다. 걱정과 달리 소고기 육회보다 훨씬 육질이 부드럽다. 부산을 자주 왔다 갔다 한다는 주인아저씨와 농담도 주고받으며 실컷 마시고 나니 약 9천엔 정도로 저렴했다. 아까 그 집은 괜히 갔다고 억울해하며 첫 일본 나들이의 마지막 밤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전혀 예상치 않게 3주 후 또다시 후쿠오카에 가게 됐다. 이번엔 부산에서 카멜리아호를 타고 간다. 이렇게 큰 배를 타본 것이 처음이라 살짝 긴장도 됐지만 그것도 잠시, 개운하게 목욕을 하고 나서 바다를 바라보며 마시는 맥주는 정말 색다른 경험이고 즐거움이었다. 술빨(?)이 받는 관계로 과음을 한 탓에 다음날 아침 후쿠오카에 도착했을 때는 숙취로 꽤나 고생했다.
이번엔 4박5일의 일정이었지만 딱히 다른 도시를 갔다 오거나 관광명소를 둘러보지는 않았다. 하카타역 주변과 텐진 근처의 시내를 우리 동네처럼 돌아다니며 맛있는 걸 먹고 쇼핑을 하는 것으로 모두 소진했다.
느긋하게 일어나서 조식을 먹고, 지하철을 타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쇼핑을 하고, 매일 밤 술과 함께 보냈다.
오호리 공원을 걷다가 벤치에 앉아 갈매기들과 까마귀들 간의 자리싸움을 열심히 구경한다. 이런 느긋하고 특별할 것 없는 시간이 나는 좋다. 그 지역의 관광명소를 둘러보는 편이긴 하지만 그보다는 그곳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그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을 나도 즐길 때가 여행의 참맛이 느껴진다.
https://youtu.be/nVs_yIZ2k20?list=PLNp48vdGYpZlyjUZnPX80YrezbLmru5En
버스기사 아저씨의 친절함, 길거리의 차분함과 깨끗함, 이자카야의 시끄러움, 많은 것들이 우리의 것과는 다르다. 정말 비슷할 것 같았던 옆 나라 일본은 그렇게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었다.
분명 아직도 유독 일본 여행은 꺼려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물론 역사적인 문제와 함께 후쿠시마 방사능 유출이 그 이유겠지만 생각하기 나름이 아니겠는가?
상대를 알아야 나를 더 잘 돌아볼 수 있는 것이고, 먹거리의 신선함이나 공기의 깨끗함은 방사능 문제를 잊게 만든다. 물론 그래도 찝찝하다면 억지로 찾아갈 필요는 없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고, 볼 것도 많기 때문이다.
추신 : 하카타역 1층에 있는 짬뽕집에서 나가사키 짬뽕을 처음 먹어봤는데 역대급이다. 아직도 후쿠오카 하면 이 짬뽕이 생각난다. 바로 이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