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자발적 호구'가 성공할 것이다
한자로는 사람을 인간(人, 사람 인 | 間, 사이 간)이라고 쓴다. 사람은 사람 사이에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뜻일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도 있다. 사회를 떠나 자연 상태로 돌아간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만큼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사회의 울타리 안에서 어울려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들이다. 연약한 인간들이 서로 부족한 걸 채워주며 사는 모습, 언뜻 떠올려도 아름답지 않은가?
하지만 이 아름다운 꽃밭에는 치명적인 덫이 하나 있다. 바로 인간관계 관리다. 인간관계, 생각만 해도 징글징글하다. 관계를 맺고, 유지하려 노력하고, 실망하고, 배신당하고. 이만큼 심력 소모가 큰 일도 없다. 생각해 보면 학창 시절이나 회사 생활, 심지어 군대 생활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기억은 주어진 과업 때문이기보다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문제들이었다. 이것은 비단 나만 느끼는 어려움이 아닐 것이다. 사람들이 나이가 들수록 아는 이는 늘어가는데, 보통 인간관계는 오히려 점점 좁아지는 걸 보면 말이다. 다들 관계 관리에서 오는 피로감을 피하려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인간관계 자체가 나에게 감당하기 버거운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다는 건데, 대체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은 내게 무엇을 바라기에 이렇게 힘이 드는 걸까?
깨달음을 얻기 위해 종교의 힘을 빌려본다. 아, 기도의 힘으로 이겨내자는 뜻은 아니니 오해는 마라. 실제로 대한민국 3대 종교의 핵심 교리는 인간관계 관리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기독교의 '사랑(愛)', 불교의 '자비(慈悲)', 유교의 '인(仁)'이 바로 그것이다. (유교가 종교가 맞느냐는 논란이 있지만 우선 넘어가자. 일단 우리나라 장례 문화의 세 방식 중 하나이니.)
그런데 이 세 가르침에는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오늘의 정답이다. 인간관계를 잘하기 위해서는 나의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에는 무조건적인 용서와 헌신이 전제된다. "원수도 사랑하라", "오른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도 내주어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기독교식 사랑은 끊임없이 베푸는 헌신적인 사랑이다. 부처님이 말한 '자비'도 마찬가지다. '자(慈)'는 온갖 생명체를 사랑하여 즐거움을 준다는 의미이고, '비(悲)'는 모든 생명체를 불쌍히 여겨 괴로움을 뿌리 뽑아 준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근간에는 '나를 버리고' 다른 이를 사랑하라는 무아(無我) 사상이 있다.
'인'이라고 다를까? '인'의 사전적 의미는 '어질다'이지만, 공자님이 말한 '인'은 단순히 온정 같은 문제가 아니다. 논어에 보면 '인'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구절이 있다.
己所不欲, 勿施於人 (기소불욕, 물시어인)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남에게 시키지 마라.
즉, 자기를 낮춰 몸가짐을 최대한 공손하고 경건하게 행하면서, 내가 힘든 것은 남들도 힘들 것이니 남에게 미루지 않는 것. 이것이 '인'의 참뜻이라 볼 수 있다.
타인의 잘못을 몇 번이고 용서하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기독교, 무아 위에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불교의 '자비', 항상 스스로를 낮추고 너그러이 수용하는 유교의 '인'. 모두 결국 희생을 말한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고? 그래서 '호구'가 사랑받을 것이고, '호구'가 이길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조건 없는 희생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3대 종교의 교리 속 모습도 아무나 쉽게 이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도 '성인'이나 '부처(보살)', '군자'라 칭하며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로 삼는다. 호구는 어떤가? 자신을 숙이고, 버리고, 포기하며 희생하는 이가 호구 아닌가? 이들이 곧 '성인'이고 '부처'이며 '군자'의 모습이다. 이유야 어찌 됐든 말이다.
정리해 본다.
'어떻게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관리해 나갈 것인가?' 이것이 사회 속에서 사람과 어울려 '잘 살아가기'의 핵심일 수 있겠다.
'얼마만큼의 희생과 양보를 가져갈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타인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역량 지표일 수 있겠다.
그리고 바로 이 희생과 양보야말로 '호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다.
물론 약간 비약이 심했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 양보와 희생에 주저하는 이유가 '나를 우습게 볼까', '내가 호구 잡힐까' 하는 우려 탓이라면, '호구'를 자처한 우리들은 이미 유리한 출발선에 섰음이 틀림없지 않은가?
그런데 갑자기 정신이 퍼뜩 든다. 우리는 진짜 '호구'가 아니라 '자발적 호구', 그러니까 '호구' 코스프레를 하려는 것이었다. '숭고한 희생'이나 '은혜로운 양보' 같은 걸 흉내 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방법이 없냐고? 물론 있다. 쉽지는 않지만. 사실 '호구'를 자처하는 것도, '자발적 호구'로 성공하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수월한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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