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호구를 위하여
희생하는 사람은 숭고하고, 양보하는 사람은 아름답다. 그만큼 희생이나 양보는 어려운 일이다. 어느 누가 쉬운 일에 이런 찬사를 보낼까? 그런데 이 어려운 희생과 양보가 기본값인 '호구'의 삶은 어떻겠나? 심지어 이들은 같은 행동을 하면서도 존경과 찬사를 받는 대신, 이용하기 좋은 바보 취급을 받거나 놀림거리가 되기도 한다. 그 입장이라 생각해 보라. 얼마나 답답하겠나. 그렇다. 호구를 자처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존경받으며 희생하고 박수받으며 양보하는 것보다 당연히 몇 배는 더 어렵다.
그렇다면 '호구를 자처하자'는 말을 이렇게 쉽게 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인정한다. 솔직히 매사 희생하는 '자발적 호구'는 존재하기 어렵다. 희생한다는 것, 즉 내 입장을 버리고 상대방에 맞춰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겠나. 상대방을 헤아리는 것도 쉽지 않지만, 나를 배제한다는 것은 더 어렵다. 사람도 결국 동물인지라 본능적으로 개인의 생존과 이익을 우선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본인을 버리고 남 먼저 돌볼 수 있는 사람을 존경하는 거다. 그런 사람은 호구라 하지 않고 '성인', '부처', '군자'라 한다.
그럼 애초에 '자발적 호구' 론은 헛소리일까? 아니다. 가능한 방법이 있다. 희생이 아니라 양보로 접근하는 거다.
지금까지 희생과 양보를 같은 개념처럼 썼지만, 사실 이 둘은 엄연히 다르다. 희생이 나의 처지와 상관없이 남을 우선시하는 것이라면, 양보는 내가 여유를 가지고 있는 상황을 전제한다. 그게 물질적인 부분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이 정도까지는 포기해 줄 수 있다'는 여유 말이다. '이 정도 없어도 사는데 지장 없다', '이 정도 져줘도 대세에 지장 없다'는 생각이다. 어느 정도 손익 계산이 들어간다고 볼 수도 있다. 특히 정신적인 여유는 풍족해지면 양보를 할 수 있게 되어 좋지만, 반대로 최소한의 수준마저 바닥나면 인간관계 관리에 곤란한 상황이 벌어진다. 스스로가 부족한 사람이라 생각하니 항상 손해 볼까 걱정한다. 모든 상황에서 얕잡아 보이지는 않을까, 호구가 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방문판매 대리점을 운영할 때 있었던 일이다. 갑자기 카운터 쪽에서 큰 소리가 났다. 부랴부랴 가보니 판매 직원은 울고 있고, 방판 카운셀러는 역정을 내고 있다. "저 년이 나를 무시한다"며 연신 고함을 쳐댄다. 회의실로 데려가 진정시키고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화가 난 이유가 어이없다. 자기가 먼저 말했는데 다른 사람 물건을 먼저 챙겨줘서란다. 정말로 그 사람을 무시하고 가려서 응대한 것 아니냐고? 그 사람이 못본 거지, 해당 카운셀러의 물건은 이미 매대 위에 나와 있었다.
세상에는 '성인'이 많지도 않지만 온통 '악인'들만 있는 것도 아니다.
여유를 가지자. 어떻게? 우선 나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하자. 스스로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자. 그래야 남을 바라볼 여유, 양보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인도의 구루(스승, 달인) 오쇼 라즈니시는 이렇게 말했다. "본인조차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데, 그 누가 이 골칫거리를 떠맡으려 하겠는가?" 스스로를 사랑할 때 비로소 타인과의 정상적인 관계 맺기가 가능해질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 우리는 바로 이것을 '자존감'이라고 한다. 이는 '자발적 호구'로 갈 수 있는 기초 체력이기도 하지만, 그전에 세상을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원동력이다.
'자존감'이 없다면 '자발적 호구'는 꿈도 꾸지 못한다. 자존감이 모자라면 그 비어버린 자리에 자존심이 고개를 치켜든다. 자존심은 자기 보호 기제다. 스스로 안정감이 없으니 남에게 나를 존중하도록 강요하게 된다. '자발적 호구'는커녕 스스로 '갑'임을 선언하는 꼴이다.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갑' 말이다.
"없이 사는 사람이 자존심만 세다" 드라마 속 '가난한 사람을 괴롭히는 악역'의 전문 대사라 인용하기 조심스럽지만, 경험에 비추어 생각할 때 크게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자존감이 낮으면 그 부족분만큼을 자존심으로 채우게 된다. 스스로에게 좋은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자긍심이 없으면,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는 허영심이 폭발하게 된다. 자존감이 충만하면 남의 성공에 진심으로 박수 쳐줄 수 있지만, 자존심만 가득하면 타인의 성과에 질투와 시기심만 생긴다. 그래서 자존감의 또 다른 이름은 자신감이다. 스스로를 존중하고 스스로에게 자신이 있지 않으면 남을 인정할 주제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자기 자신을 떠벌이던 사람은 과연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었나? 되려 열등감이 커지면 자기 자랑의 말이 길어지기 마련이다.
자존감이 충만하고, 자신감으로 빛나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사람들의 평가나 시선에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들, 언젠가는 존엄이 드러나는 사람들, 스스로 존엄한 사람들, 자신을 떠벌이지도 않고 남을 깎아내리지도 않는 사람들, 그들은 본인이 어떻게 보인다 해도 개의치 않는다.
자존감이란 그런 것이다. 그저 스스로 나 자신을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마음. 이 과정에 남의 평가 따위는 아무 상관없는 것이다. 이제 다시 하나의 숙제가 생긴다. 그렇다면 자존감은 어떻게 키우고 컨트롤하면 좋을까?
#자존감 #자존심 #호구 #자발적호구 #심리 #심리학 #인간관계 #직장인공감 #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