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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텀블벅 영퍼센트 Aug 13. 2021

넌 메릴 스트립이 걱정돼? 난 네가 걱정돼

[토요일의 용기] <메릴 스트립 프로젝트> 박효선 감독 에세이

토요일의 용기

각기 다른 위치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전하는 용기. 평범한 토요일을 힘차게 만들어 줄 한 편의 에세이를 실어 보냅니다.


박효선
필름메이커. 
트위터 메릴 스트립 정보봇 한국본부 계정 운영자.

메릴 스트립과 만나기 위한 여정을 담은 다큐 〈메릴 스트립 프로젝트〉현재 진행 중.



"넌 메릴 스트립이 걱정돼? 난 네가 걱정돼"


에세이 기고 요청을 받으며 주제가 ‘불확실성’이라고 들었을 때, 그것이야말로 내가 끝없이 떠들 수 있는 내 분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불확실성을 타파하기 위해 내가 했던 선택의 순간들을 글로 풀자니 좀 막막했다. 이 영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요약하자면 1. 맨땅에 헤딩 2. 당연한 위기 3. 죽어라 문제 해결 4. 다시 처음으로의 반복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디어에 대해 메모는 해도 일기는 쓰지 않는데, 감정이 뚝뚝 묻은 일상은 그냥 휘발되길 바라서다. 하지만 주로 내가 실수를 했거나 예상치 못한 상황의 변수가 생겼을 때 잊지 않으려고 쓰는 촬영 노트가 있다. <메릴 스트립 프로젝트>의 촬영을 시작하고 1년이 채 안 됐을 때 맞은 내 생일에, 친구가 너무 자기 취향으로 고른 것 같다며 머쓱하게 웃으며 선물한 귀여운 다이어리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나는 내 인생 최악의 번아웃을 향해 열심히 고꾸라지고 있었다. 사실 나는 본격적인 촬영 전부터 이미 여러 가지 일로 소진되어 있던 상태였다. 추스를 잠깐의 여유도 없이 계속 큰 사건들을 마주했으니 어쩌면 예정된 결과였는지 모른다.


그래서 내가 앞이 까마득했던 시기에 썼던 예상치 못하게 내 마음의 방향을 조금씩 틀어 앞으로 가게 해준 짧은 촬영 노트들을 공유하기로 한다. 이 글이 어떤 이들에게 어떤 식으로 닿게 될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혹여 무모하고 거대한 계획을 앞둔 사람이 읽고 있다면, 나처럼 가진 모든 걸 탈탈 털어서 해보라고 하고 싶지 않다. 아니, 사실 이건 제발 그러지 말자고 쓰는 글에 가깝다. 왠지 이런 말에 맘이 덜컹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상황을 견디는 것보다 목표를 포기하는 게 더 힘들 유형의 사람일 것이다. 내가 그랬으니까. 처음으로 돌아가도 딱히 내가 취할 방법들이 달라지진 않았을 테니,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대단히 유용한 조언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난 이렇게 답도 없던 상황 들을 거치고도 지금은 잘해나가고 있으니 이왕 포기 못 할 거면 나를 최대한 많이 아껴주라는 말을 하고 싶다. 당신이 하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당신을. 


▪️ 2017. 03 메릴스트립정보봇 상영회

마지막 상영회를 마치고 정리 중이었다. 누군가 다가와 인사를 하는데, 좀 전까지 앞줄 객석 가장 중앙 자리에서 눈을 반짝이며 토크를 듣던 중년의 여성분이었다.

다 큰 딸과 함께 온 그는 조금 전보다 더 눈을 반짝이며 내 손을 꼭 잡았다. “절대 포기하지 말고 메릴 스트립 꼭 만나주세요. 꼭이요.” 잠을 거의 못 자 얼떨떨한 상태라 그 분이 가시고 나서도 한동안 멍했다. 이걸 카메라에 담았어야 하는데!



2018. 12 끝없는 기다림

계속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부탁하고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같이 볼 사람이 없다. 온당하게 지적하거나 화내는 법을 까먹은 것 같다. 어디에 뱉지는 못하는 생각이 끊기지 않아 머리가 터질 것 같다.


2019. 12. 27 재회


인터뷰를 너무 하고 싶어 호기롭게 찾아갔으나 몇 초 만의 대화가 끝이었던 그분과 2년 만의 만남이다. 아직 한 번도 그런 생각을 안 해봤는데, 진짜 끝이 다가오나 보다. 할 일이 산더미인데 마음이 가벼워서 날아갈 것 같다.


▪️ 2020.2 (미국 촬영)

길거리에 카메라를 들고 나서기조차 쉽지않게 느껴진다. 아무도 마스크를 안 쓰니까  불안해도 어쩔 수가 없다. 동양인 여자가 마스크를 쓰면 더 이목이 집중되니까. 그런데 언놈들은 길에서 코로나라고 우리에게 소리를 지른다.

(...) 완전히 휴관하기 전 겨우 가본 미술관에서 큐레이터와 대화를 하게 됐다. 한국에서 왔고, 필름메이커라고 했더니 너도 <기생충> 다음이 될지도 모른다며 눈을 찡긋했다. 이 프로젝트를 응원해온 친구와 엄마도 왠지 흥분하며 내게 문자를 보내왔다.

이곳 상황은 하루가, 아니 한시간이 다르게 안 좋아지고
도시가 멈춰있는데...

한동안 나는 쌓여있는 메시지에 답장할 말을 떠올리지 못했다.



2020. 03 미국 촬영


내가 여기서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알고 싶다.



▪️ 2020.06

한동안은 관둬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 
푸념을 하는데 내 무모한 아이디어를 늘 힘차게 응원해준 친구가 눈물을 보였다. 카메라 앞에서 울기는 싫어서 꾹꾹 참으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우리가 만난 게 4년 전이었다. 그 말은 우리 둘 다 기획단계였던 각자의 프로젝트를 포기하지 않고 진행한 게 4년은 됐다는 뜻이었다. 우리 진짜 지겹게 오래했다. 어휴, 그럼 역시 계속 해야겠네. 뭐 이런 말을 하면서 대화를 끝냈다.



▪️ 2020. 7

원룸에서 늦잠을 자는데 건물에 아주 무섭고 요란한 화재경보가 울려댔다. 순식간에 새 마스크를 뜯어 끼고, 카메라 가방을 메고, 외장하드를 꼭 껴안고 달려 나왔다. 주말 아침이라 아직 나처럼 잠옷 바람으로 나온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건물 아래에 모여있었다. 누군가 경보기를 잘못 건드렸다는 걸 알게 될 때까지 10분은 대로변에 그렇게 서 있었다. 그새 말을 좀 섞게된 이웃이 내게 "아가씨는 그 짧은 시간에 짐을 알차게 챙겼네"라며 웃었다.

'네, 백만원 넘게 주고 살려낸 하드는 아직 백업중이고 카메라는 다치면 안 되거든요.' 순간 이런 대답이 떠올라서 비참해졌고, 이 상황도 찍어볼까 아주 잠깐 생각이 드는 것도 묘하게 열이 받았다. (찍긴 찍었다. ・・・짜증난다.)

집에 들어와 한참을 누워있었다.
카메라를 너무 좋아했는데 요즘은 쳐다보기도 싫다.


다소 퍽퍽한 에피소드만 소개했으나 걱정하지 마시라. 나는 요즘 지난 몇 년을 통틀어 가장 건강하게 살고 있다. 주중에는 운동과 편집에 몰두한다. 주말에는 아무것도 안하고 쉬기만 하거나, 평상시와는 다른 방향의 에너지를 쓰는 취미생활을 조금씩 하려고 한다. 지난 두어 달은 정말로 하루 동안 하는 고민이 작업과 운동, 다음 끼니는 무엇을 해 먹을까 정도만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컨디션이 좋아지니 자잘한 것들이 고민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번아웃에서의 회복하려면 이렇게 단순하게 살아야만 한다는 걸 절실히 깨닫는다.


단순히 건강이 안 좋아져서 문제가 아니라 작업에 집중할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온전히 작업에만 몰입할 수 있는 상태가 되기까지 꼬박 2년이 넘게 걸린 것 같다. 도전적인 과정은 흥분되고 즐겁지만, 그럴수록 목표가 계획대로 이뤄지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실패가 계속되고 의지할 곳마저 별로 없으면 인간은 결국 자신을 땔감으로 써버린다. 원하는 일을 끝까지 마치기 위해서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다.


최근 나의 방콕 피서를 책임져준 하계 올림픽이 폐막했다. 역병으로 1년이 미뤄져 불안하게 시작한 대회. 속절없이 주어진 시간은 때로 기회가 아니라 고통일 수 있음을 아는 나는 그중에서도 마지막 올림픽에 참여하는 선수들을 보며 참으로 많은 감정을 느꼈다. 갑자기 붕 떠버린 그 시간에 다시 자신을 다잡고 마침내 끝으로 달려온 사람들의 표정이 그 누구보다도 홀가분해 보였다.


종종 이런 이벤트를 보며 마음이 웅장해지고, 가끔은 이 영화에 몇 년 전부터 담겨온 친구들의 좋은 소식을 듣고 또 혼자 울컥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한편으론 그런 위안과 자극이 없어도 썩 괜찮다. 난 내 걱정으로도 바쁘고 행복하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하는 일이 걱정된다면 그 누구보다도 나를 걱정해야 했던 것이다. 그 덕에 꽤 오랜 시간을 괜스레 민망해하던 사실을 인정하게 됐다. <메릴 스트립 프로젝트>는 ‘메릴 스트립’ 영화가 아니라 박효선의 영화라는 걸.


여전히 불확실하더라도, 누군가는 답이 없다고 쓸데없는 훈수를 두는 상황이라도, 이제는 이것만큼은 확실하게 이야기 할 수 있다. 나는 반드시 이 영화를 끝낼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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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박효선 

편집 홍비, lotso

디자인 최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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