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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텀블벅 영퍼센트 Sep 10. 2021

파도 소리에 숨겨 가져온 조각들

[FRAME] 한승무 작가의 사진 에세이

FRAME
사각 프레임에 담긴 무궁무진한 시각과 상상력. 창작자들의 비전(Vison)을 프레임을 통해 만나 보세요.  


작가 한승무(Sem Han)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사진작가. 2021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서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선정. 호주 멀럼빔비의 바닷가 마을에서 아내와 함께 연년생인 준지, 준야를 키우며 다양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육아의 기쁨과 슬픔을 재치있게 담은 사진집 〈숲과 바다, 형제 사진〉을 펴냈다.




파도 소리에 숨겨 가져온 조각들


과학자들은 온 우주에 별이 바닷가 모래 알갱이들보다도 많다고 한다. 나는 아무래도 모래 알갱이가 더 많아 보이는데. 알갱이들이 얼마나 작고 고운지 양손 가득 딱 한 움큼만 퍼서 밤하늘에 흩뿌리면 반짝반짝 다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두 번 세 번 뿌리면 밤하늘은 아마 대낮처럼 밝아질걸. 하지만 아이들이라면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다섯 번, 여섯 번, 열 번, 정말 우주별의 개수가 과학자들 말처럼 바닷가 모래알보다 많아지고 밤이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얗게 변해 버릴 때까지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뿌려댈 것이다. 어떻게 저렇게 뒷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뒷일 걱정에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끝까지 안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때 그거랑 그거 안 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에 혼자 속으로 뿌듯해한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걱정 없이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자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둘째 빨랫감 바지 주머니를 뒤집다가 거실 바닥에 모래 한 움큼을 쏟았다.




나도 친구네도 등산화를 챙기는 스타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미끄러운 플라스틱 밑창 운동화를 벗고 맨발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침 안개에 축축하게 젖은 바위산은 멀리서 봤을 땐 큰 모양이 둥글둥글 귀여웠는데 맨발로 밟아보니 표면이 두리안 껍데기처럼 뾰족뾰족해서 발이 너무 아팠다. 몸무게가 가벼운 아이들은 따갑지도 않은지 도란도란 금방 짙은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따라가지 못하고 뒤처지다가 그냥 그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멀리서 작게 들려오는 아이들 소음에 집중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부르겠지. 어디서 들어본 명상 흉내도 내고 숲 향기가 밴 습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너무 조용해서 조금 걱정스러울 즈음 아이들이 안개를 뚫고 바로 옆에서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자기들끼리 발견한 비밀장소와 고슴도치 이야기를 속삭이듯 들려주면서 나는 어디에 있었냐고 물어보길래 계속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물과 쿠키를 차려주었더니 이번엔 자기들이 쿠키를 먹으면서 기다릴 테니 조용히 가서 고슴도치를 보고 오라고 시켰다. 발바닥은 아팠지만 궁금하기도 해서 살금살금 가르쳐준 장소에 가보니 정말 큼지막한 고슴도치가 바닥을 긁고 있었는데 나를 보자 느릿느릿 뒤뚱뒤뚱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돌아와서 고슴도치가 멀리 가버렸다고 보고했다. 아이들은 그제야 목소리를 높이며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안개가 갑자기 걷혔다. 온종일 고슴도치 이야기를 하고 고슴도치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도시락을 한 보따리 싸서 종일 바다에서 아이들을 봤다. 겨울의 바다 노을은 색바림이 특히 아름답지만 짧게 나타났다가 금세 불을 끄고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 버린다. 예쁘게 그려 놓고 결국 시커멓게 먹칠해 버리는 아이들 그림 같다. 바다에서 나오는 길에 달달한 유화물감 향기가 살살 퍼졌다. 아이들은 킁킁대며 처음 본 화가 할아버지가 사탕이라도 끓이는 줄 알고 갓 펼친 이젤 주위에 바싹 달라붙었다. 유화물감 냄새라고 했더니 그렇다면 물감을 먹어보고 싶다고 졸랐다. 할아버지는 익살스럽게 물감을 찍어 먹고 고통스럽게 죽는 연기를 보여줬는데 연세도 있으신 분이 죽는 연기를 너무 열심히 해서 그만 모두 숙연해지고 말았다. 입맛을 다시며 툭툭 털고 일어난 화가는 문득 노을을 놓칠세라 황급히 붓을 잡고 캔버스 앞에 서서 작업에 푹 빠져들었다. 나는 사진을 찍고 마음속으로 인사한 다음 아이들을 파도 소리에 숨겨 사각사각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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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한승무(Sem Han)

편집 홍비

디자인 최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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