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ME] 문정인의 프랑스 커피문화 네컷만화
사각 프레임에 담긴 무궁무진한 시각과 상상력. 창작자들의 비전(Vison)을 프레임을 통해 만나 보세요.
문정인
프랑스에 살며 그림을 그리는 문정인은 주로 펜과 잉크를 활용합니다. 현재 스트라스부르그 장식예술학교에 재학 중이며, 이야기를 쓰고 이야기를 쓰고 그림책을 만들거나 만화를 그립니다. 만든 독립 출판물로는 <à paris>, <구덩이들>, <불면>, <추격>, <해변에서>, <어떤 산책> 등이 있으며, 최근 커피 중독자를 위한 네컷만화 <커피스트립> 제작을 마무리했습니다.
프랑스의 여름은 매년 참 힘들다. 건조한 공기, 그 사이로 내리쬐는 날카로운 볕. 습한 한국과는 다르게 금방이라도 불이 붙어 바싹 타버릴 것 같은, 뜨겁기를 넘어 '따가운' 날씨. 그럴 때마다 간절히 생각나는 것이 있으니 바로 한국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다.
사실 유럽에 아이스 커피가 없다는 이야기는 프랑스에 오기 전부터 익히 들었다. 유럽인들은 특히 커피가 중요한 프랑스나 이탈리아인은 커피가 차가우면 그 풍미가 떨어진다 하여 취급하지 않는다나. 그래도 이런 날씨에 뜨거운 커피라니!
"뭐? 커피를 차갑게 마신다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찾지 못한 내가 직접 아이스 커피를 만들어 마실 때마다 프랑스인 친구들은 소스라치게 놀란다. '차가운 커피'란 단어가 '뜨거운 얼음' 같은 것이라도 되는 듯이. 그래도 이런 듣도 보도 못한 것을 만난 반응이라니. 친한 프랑스인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도대체 아이스 커피가 어떻길래 그래?
"우리한테 차가운 커피, 하면 식은 커피를 떠올리거든."
아하. 그래서 차가운 커피라고 말하는 친구들의 표정이 다 '그 맛없는 것을?' 하던 것이었다.
"난 프랑스인들이 커피에 자부심이 넘쳐서 차가운 커피는 취급하지 않는 건 줄 알았는데?"
"글쎄, 우리에게 커피는 자부심이라기보다 빵처럼 너무 일상적이라 커피, 하면 에스프레소이고, 에스프레소는 항상 뜨거우니까."
하긴 프랑스 카페에서 "커피 한 잔 주세요" 하면 에스프레소를 준다.
"뭔지 알겠어. 나도 프랑스에서 차가운 밥으로 만든 디저트 보고 엄청 놀랐어."
"너희는 밥을 뜨겁게만 먹는단 말이야?"
프랑스에 올 계획인 사람들이여. 그래도 너무 걱정 마시라. 스타벅스 같은 프랜차이즈 카페엔 아이스 커피가 있으니! 운이 좋다면 길을 걷다 우연히 아이스 커피 간판을 내놓은 작은 카페를 발견할 수도 있다. 우리 동네인 스트라스부르에도 그런 곳이 딱 하나 있는데 커피를 아주 맛있게 만드니 놀러 온다면 커피 한잔하러 들르는 것을 추천 드린다. 물론 여름엔 아이스 커피로!
'프랑스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는가.
프랑스에 오기 전 나에게 그건 카페 테라스였다. 흑백 영화와 사진 속 테라스에 앉아 베레모를 쓰고 무심하게 담배를 문 사람들. 신문을 펼쳐 읽고 가끔 글이나 그림을 끼적이다 해가 나오면 멋진 선글라스를 꺼내 쓰는 시크한 파리지앵. 게다가 테라스는 그야말로 수많은 사상과 예술의 산실, 영감의 장이자 만남의 광장이 아닌가.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도 나오지 않는가. 커피잔을 두고 담배를 태우며 테라스를 거쳐 간 수많은 예술가와 지성인들! 오죽 그곳이 좋았으면 반 고흐는 〈밤의 카페 테라스〉를 그리기까지 했겠는가.
프랑스의 카페는 우리나라와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편안한 소파나 최신식 예쁜 인테리어는 고사하고 일단 실내에 있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낡은 테이블과 의자를 다닥다닥 붙여놓은 야외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아주 좁은 골목길에 있는 카페도 굳이 굳이 테이블과 의자를 길가에 꺼내어 놓는다. 파리에 있는 조금 큰 카페들은 겨울에 히터까지 놓으며 테라스를 열어둔다. 그러다 날씨라도 좋으면 테라스에 자리를 잡기 힘들 정도로 프랑스 사람들은 밖에 앉아있기를 좋아한다. 하긴 프랑스에 산 지 몇 년이 지난 지금, 왠지 모르게 같은 커피라도 테라스에 앉아 마시면 훨씬 맛있게 느껴지긴 한다. 거기다 볕까지 잘 드는 자리라면 금상첨화.
그렇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다른 점은 바로 테라스의 모든 테이블에 재떨이가 있다는 것이다. 모든 야외 공간이 금연이요, 흡연실이 실내인 우리나라와는 반대로 프랑스는 실내를 제외한 모든 공간이 흡연 가능 구역이다. 그러니 테이블과 의자가 있고, 맛있는 커피까지 주는 테라스는 그야말로 최적의 흡연 공간일 수밖에! 괜히 수많은 영화와 사진 속 테라스에 담배를 든 사람들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흡연자들에게는 신나는 일일 테지만 비흡연자들은 테라스에 앉아있다 보면 사방에서 날아오는 뽀얀 담배 연기를 커피와 함께 마실 수 있다.
낭만은 사진과 영화 속에서만.
그래도 테라스에서 마시는 커피는 포기할 수 없다!
“커피 한 잔 줄까?”
프랑스인의 집에 초대받아 그가 이렇게 물어본다면 무조건 “위oui” 라고 답하라. 각양각색의 커피 제조법을 보게 될 것이니.
프랑스에 오기 전 내게, 집에서 마시는 커피란 가루로 된 커피믹스를 물에 풀어 마시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커피메이커와 머신이 슬슬 대중화되기 시작했다만, 한국에서 누군가의 집에 갔을 때 ‘제대로 된’ 커피를 마셔본 적이 없었다. 커피는 자고로 사 마시는 것이었으니까. 그나마 제일 그럴싸했던 커피는 미국 영화 속 사무실이나 식당에 자주 나오는, 커다란 전기 드립 커피포트로 내린 커피였다. 그래서 누군가가 원두를 구비해 놓고 커피를 내려 마시기라도 한다면 엄청난 마니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프랑스에 와 보니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집에 cafetière(캬프티에), 그러니까 커피메이커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이름부터 프렌치인 프렌치 프레스는 모든 집의 필수품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누구는 드립 커피, 누구는 프렌치 프레스, 또 누구는 모카 포트. 커피믹스를 타 마시는 사람은 그야말로 나밖에 없었다.
프랑스에서 처음 사 본 프렌치 프레스로 만드는 커피는 참 번거로웠다. 가루를 물에 타 휘리릭 저어 마시던 내게 원두를 사고, 티스푼을 꺼내어 커피를 넣고, 천천히 물을 붓고, 기다리는 일은 시간과 정성이 필요한 요리와 같았다. 커피를 마신 후 커피 메이커를 차근차근 열어 원두를 버리고 닦는 것까지. 이 모든 게 ‘커피 타임’의 일부였다. 이 정도는 돼야 ‘커피 한 잔의 여유’라는 말을 쓸 수 있겠구나 싶었다.
프랑스인의 식사처럼 프랑스인의 커피는 참 느리다. 거기다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장비와 제조법까지. 먹고 마시는 것에 시간과 돈 그리고 정성을 들이는 것이 익숙한 사람들이어서일까. 과정을 귀찮아하며 빠르고 편하지만 맛없는 커피를 만들어 마시던 나와는 달리 괜찮은 커피 한 잔을 위해 기꺼이 여러 단계를 밟는다.
덕분에 나도 이곳에서 커피메이커에 넣을 원두를 찾아다니며 취향이 생겼다. 여러 커피메이커 사이의 차이점도 알게 되었다. 물을 조심스레 천천히 따르는 법을 배웠다. 나름의 레시피가 생겼다. 커피를 너무 자주 마시지 않게도 되었다.
그렇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성질 급한 한국인인지라 아직도 커피믹스를 사다 놓고 바쁘거나 정신없을 땐 자주 타 마신다. 그래도 이제는 커피 메이커로 만든 커피를 마셔야만 커피를 제대로 대우해주는 느낌이다. 진짜 커피를 마시는 느낌이다.
〈커피스트립〉에 나오는 cafetière는 모카포트다. 나는 이제 모카포트로 만든 커피를 가장 좋아한다.
그림, 글 문정인
편집 estelle
디자인 최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