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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텀블벅 Nov 19. 2019

카피라이터, 만화가, 에세이스트, 시인인 루나입니다

최근 ‘졸사’를 했습니다.


광고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하면서 웹사이트에 생활툰을 연재하고,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에세이스트로 책을 내고, 간혹 강연을 하고, 작년에는 시인으로 등단한 루나(홍인혜) 작가가 매년 하는 일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방망이 깎던 노인처럼 성실히, 그리고 정성을 다해 다이어리를 깎는 일입니다. 평소 선보이는 글과 만화에서 포착할 수 있는 기록광의 면모부터 폰트 출시 요청을 부르는 또박또박 글씨체까지 루나와 다이어리는 참 자연스러운 조합이죠.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여러 직업을 쌓아온 매일의 힘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고요. 

5년간 멈췄던 다이어리 제작을 부활시킨 이유는 뭘까? 한 가지도 해내기 힘든 직업 혹은 작품 활동을 어떻게 다양한 분야에서 이끌어가고 있을까? 퇴사가 아니라 졸사(회사를 졸업)했다는 표현은 어떤 다짐이 담긴 걸까? 올해도 시작된 루나파크 다이어리 프로젝트를 보며 몰려온 물음표들을 루나 작가에게 직접 배달해 보았습니다. 



2020 다이어리 표지를 장식한 북극곰과 알파카와 고양이와 루나



소개를 고민하다가 하고 계신 일을 모두 나열하고 말았습니다. 여러 일 가운데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체성이 있을까요?

회사원 신분일 때는 ‘만화가로 가장 알려져 있지만 실은 카피라이터가 본업인 루나입니다’라고 스스로를 소개하곤 했어요. 요즘은 광고 일을 잠시 접은 상태이기 때문에 ‘글 쓰고 그림도 그리는 루나입니다’ 정도로 자신을 소개하곤 해요. 근래 저를 가장 설레게 하는 정체성은 아무래도 ‘시인’이고요. 평생 쥐고 살 정체성은 ‘창작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지난 여름 제가 회사를 졸업했습니다! ‘졸사’라고 표현하곤 하는데요. 15년의 회사 생활을 접고 프리랜서로서의 걸음마를 떼고 있답니다. 평소 가보고 싶었던 곳에 가보고, 배워보고 싶었던 것을 배우며 살고 있어요.


졸사라니, 마약 같은 월급을 끊고 나면 어떤 세상이 펼쳐지나요?

사실 회사를 떠난다는 것은 힘든 결정이잖아요? 저도 쭉 비모험적인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퇴사가 마치 학교를 자퇴하는 기분이더라고요. 그것도 학교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아온 모범생이 말이죠. ‘졸사’라는 개념을 생각해낸 것도 그 불안함과 막막함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입학한 사람이 학교를 떠나는 방법이 퇴학 또는 자퇴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어요. 학교를 ‘졸업’할 수도 있는 것이고 그건 이 업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완결했다는 의미니까요. 그렇게 수많은 생각 끝에 졸사를 했는데 막상 회사를 떠나고 보니 불안함과 막막함은 1초만에 사라져서 신기했습니다. 오히려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이 더 강렬해져서 뜻밖에도 너무나 마음이 편안하고 삶이 만족스럽지 뭐여요.


평소 기록광이기도 하지만 준비광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언가 일을 벌일 때 세심한 부분까지 챙기고 준비하신다고 느꼈어요. 졸사에 앞서 준비한 것은요?

일단 멘탈적인 면에서는 ‘내가 조직의 규율 없이도 내 삶을 컨트롤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계속 살폈어요. 그만두기 몇 달 전에 안식월 제도로 꽤 긴 휴가를 썼는데요. 그때 집에서 기거하며 제 삶이 무너지지 않는지 잘 지켜보았어요. 사실 제가 대학생 때 방학마다 삶이 와장창 무너져서 심신이 쇠약해지곤 했거든요. 그래도 나이를 먹고 나니 그때보단 스스로를 잘 케어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준비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경제적인 면에서도 얼마간 버틸 수 있는 자금과 향후 해나갈 프리랜서로서의 일감을 준비해 두었어요. 이건 제가 다양한 일을 해왔다는 특수성 때문에 가능했던 거겠지요. 그렇지만 100% 완벽한 준비는 아니었고, 당연하게도 회사에서 주던 월급보다 적게 벌게 되겠지만 ‘이 정도면 삶의 질이 급락하진 않을 것이다’라는 선까지는 경제적인 자구책을 마련해 두었답니다.


창작자 분들 중 직장생활과 병행하다가 창작생활로 먹고살 수 있겠다(혹은 먹고살고 싶다)는 확신이 들면 퇴사하고 작가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잖아요. 다른 분들보다 비교적 직장생활의 끈도 오랫동안 잡고 계셨는데 이유가 있는지요? 

제가 광고일을 택한 것도, 15년을 일한 것도 이 업을 좋아했기 때문이었어요. 학창 시절부터 컨텐츠를 만들어내는 일을 좋아했고 무엇보다 대중과 소통하는 것에 보람을 느꼈거든요. 광고일이야말로 그 정점에 있는 일이니까요. 좋아하는 창작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다니 저에겐 천직이나 다름 없었죠. 또 제가 집요한 면이 있달까요? 어떤 일이든 ‘중간에 포기했다’는 느낌이 싫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내내 붙들고 있었던 것이고 놓게 된 계기는 ‘이제 할 만큼 했다’는 감각이 찾아와서였답니다. 업의 형태도 많이 변했고, 저 역시 연차가 쌓일수록 롤이 달라지더라고요. 그런 시기가 찾아오자 ‘이제 졸업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n잡러, 어떻게 다 해내는 건가요? 동력이 어디서 오는지요? 일정 관리 등 특별히 신경 쓰시는 점은요?

제가 기본적으로 세상에 호기심이 많은 것 같아요. 늘 배우고 싶은 것도 있고 하고 싶은 것도 있고요. 광고일로 시작해서 만화를 그리고, 일러스트도 그리고, 에세이도 쓰고, 시도 쓰고 이렇게 한 분야씩 넓혀갔던 건 그 모든 새로운 장르가 ‘너무나 매혹적’이었기 때문이에요. 즉 저의 동력은 낭만적으로 말하면 ‘사랑’입니다! 기본적으로 사랑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하진 않아요.

일정 관리의 경우, 제가 다양한 일을 해서 관리의 왕처럼 느껴지실 수도 있겠지만 실은 곡식이 새는 자루 같달까, 물이 새는 바가지 같달까… 저도 사실 허술한 면이 많아요. 가족들은 제가 부지런의 아이콘이라는 점을 몹시 비웃는답니다. 제가 정말로 게으르거든요. 그래도 광고회사에서 을로 오래 일하며 ‘죽어도 펑크는 내면 안 된다’는 기준만은 있어서 큰 사고는 안 치고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


15년간 광고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했고, 14년간 일상툰을 그려왔고, 다섯 권의 책을 내고, 시인으로 등단했고, 만화도 그리고 에세이도 쓰셨어요. 이 중에 가장 어릴 때 꿈에 가까운 것이 있나요? 그리고 앞으로의 꿈에 가까운 것은요?

놀랍게도 저의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의 장래희망 란에 ‘만화가’와 ‘카피라이터’가 써있답니다. 당시 백일몽에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두 직업을 모두 갖게 되어 신기하고요. 그보다 어릴 때는 독서광 어린이로서, 어른이 되면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해왔거든요. 그 역시 허무맹랑한 꿈 같았는데 그에 다가가고 있으니 저도 신기할 따름이어요. 제 꿈들을 보시면 모두 ‘뭔가를 만들어내고 대중에게 발표한다’는 공통점이 있잖아요? 그런 결의 일 모두를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음악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요. 지금은 말도 안 되는 꿈 같지만, 만화가도 작가도 모두 처음 입에 올렸을 때는 같은 상황이었으니까 세상 일은 알 수 없다고 생각해요.


요즘은 어떤 것에 영향을 가장 많이 받으시나요? 영감을 주는 작가나 작품이 있는지요?

제가 하나의 장르에 빠지면 그것만 파는 경향이 있어서요. 요즘은 시에 푹 빠져서 늘 시집만 읽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김소연, 서대경, 이제니, 이수명, 진은영 시인을 좋아해요. 글이든 영상물이든 작품에 깊이 몰입하고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라 영화나 드라마는 많이 보지 못하고요. 서사가 딱히 없는 자연 다큐멘터리나 음식 프로그램을 주로 보는 것 같아요. 최근 본방사수하는 프로그램은 <스트리트 푸드 파이터>가 유일하네요.


루나 말고 다른 페르소나나 다른 그림체, 다른 장르도 구상하시는지요?

저는 시를 쓸 때는 ‘홍인혜’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데 평소 아시던 ‘루나’와는 다른 느낌일 거라고 생각해요. 더 내밀하고 깊은 마음을 표현하곤 하니까요. ‘이렇게 음습한 사람이었나?’ 하고 놀라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하)

만화에 있어서도 그런 작업이 가능하면 좋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연재 같은 거대한 압박 앞에서는 손에 익은 스타일을 골라잡기가 쉬운 것 같아요. 하지만 언젠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업하고 싶기도 해요. 서사를 만드는 법을 더 공부해서 스토리 작가에 도전하고 싶기도 하고요.


루나님, 아니 시인 홍인혜의 시는 어디에서 볼 수 있나요?

신인 시인으로서 시를 발표할 지면이 아직까진 많지 않아요. 그래서인지 보여드릴 기회가 적네요. 모쪼록 새해엔 시인으로서 더 널리 활동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모든 청탁 버선발 대환영입니다!


루나파크 일상툰의 웹툰 플랫폼 연재도 계획 있으세요?

생활만화를 오래 그려왔지만 대부분 저의 개인 SNS에 올려왔어요. 그래서인지 웹툰 플랫폼 연재도 늘 마음속 희망사항에 들어가 있답니다. 하지만 요즘 준수한 생활만화들이 워낙 많고, 그 사이에서 의미 있는 작품이 되려면 준비할 게 많다고 생각해요. 이제 단순 공감 만화나, 일상 나열 만화는 힘이 없는 시대 같습니다.


작품 계획을 살짝 들려주세요.

2019년 하반기에는 직장생활의 독을 빼느라 다이어리 제작 외에 창작에 힘을 기울이지 못했는데요. 새해엔 더 다양한 창작을 하고 싶어요. 새 에세이집도 출간하고 싶고, 시도 더 단단히 꾸려서 책의 꼴을 갖추고 싶습니다. 그 생각을 하면 2020년이 기다려져요. 얏호!



2020년에 종이 다이어리를 만드는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요? 어릴 때 사이버 세계일 줄 알았던 미래에도 우리는 종이 다이어리를 만들고 쓰네요!

2020은 원더키디의 해 아닙니까. 이 즈음엔 모두가 개인 우주선 하나쯤 타고 다니고 외계인 친구 한 명쯤 있을 것 같았는데 정말 종이 다이어리를 쓰고 있네요. 저는 사실 2013년 마지막 다이어리를 만들고 이 사업이 부활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 모두가 스마트폰 어플로 일정관리를 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런 아날로그의 부활이라니 언제나 ‘비디오 킬드 더 래디오 스타’인 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답니다.


2020 루나파크 다이어리를 기획하며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요?

지난 해에서 개선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제가 실제 유저이기 때문에 일 년을 써오며 스스로 아쉬웠던 부분들을 쭉 적어오곤 했고요. 그래서 표지 재질이나, 모눈 농도, 세세한 페이지 레이아웃부터 배송할 때 포장 방식까지… 작년에 아쉬웠던 부분들을 보완하는 데 초점을 맞췄어요.


‘기록하는 즐거움’을 절감하는 순간이 있었나요?

지금처럼 한 해가 가고 일 년 쓴 다이어리를 차르르 넘겨볼 때요. 지난 2019년 1월 15일에 무엇을 하셨는지 기억하시나요? 저는 다이어리에 써 있거든요. 누굴 만났고 뭘 샀고 무얼 먹었는지 깨알같이 써 있는 것들을 읽어보면 정말 재미있어요. 이렇게 유실될 뻔했던 사건들이 개인의 역사로 남는 거죠.





두 번째 텀블벅 진행해보니 어떠신가요? 

6년 전 다이어리 제작이 중단됐던 이유는 사실 전만큼 대량으로 만들 수 없었고, 그러다 보니 기존의 유통 방식으로는 손해가 날 수밖에 없는 구조라서 그랬거든요. 그래서 새로운 유통 방식인 텀블벅이 저에겐 빅빅빅 챈스였죠. 작년에 처음이라 서툴렀던 부분도 많은데 그래도 한 번 해봤다고 올해는 한결 수월한 것 같아요.

무엇보다 루나파크 다이어리 최초로 파스텔 톤을 벗어난(!) 컬러를 도입했는데 이렇게 반응이 뜨거울 줄 몰랐어요. 베이지의 인기가 압도적이라는 소식 살짝 전합니다. 현재 표지와 내지 모두 공장에서 만들어지고 있고요. 저는 마음 졸이며 첫 샘플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작년에도 올해도 후원해준 분들께 전하고 싶은 말씀 있으세요?

다이어리의 부활은 시작도 끝도 팬분들 덕분이어요. 작년 다이어리 부록 엽서에 후원해주신 분들께 전하는 편지를 썼는데요. 읽고 눈물이 났다는 말씀을 많이 해주셨어요. 사실 저도 쓰면서 울멍울멍 했거든요. 루나파크에 관심 가져주시는 분들 모두 저의 소중한 친구, 고마운 벗, 쭉 함께 나아갈 동료랍니다. 올해도 잘 부탁 드려요!







인터뷰 진행. 주소은 | 이미지 제공. 루나


루나의 2020 다이어리&달력 프로젝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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