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한다는 자신감보다 더 힘이 되는 것은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켜가는 일.
매주 목요일 밤, 그날 어떤 일이 있었더라도 이내 마음 포근해지는 만화를 애독했습니다. 읽는 동안 난로라도 켜둔 것처럼 온기가 느껴진 그 작품은 바로 얼마 전 완결된 웹툰 <모퉁이 뜨개방>입니다. 평온한 그림과는 달리 열 달간 치열한 연재생활을 해내야 했던 소영 작가는 마지막 마감을 마치자마자 단행본을 준비해 텀블벅을 찾았습니다. 데뷔작이자 전작인 <오늘도 핸드메이드>와는 달리 편집부터 제작까지 혼자 도맡아 계속해서 바쁜 일정을 소화 중이지요. 독립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된 이유와 더불어 패션회사를 그만두고 웹툰 작가로 데뷔, 큰 플랫폼 연재를 하게 된 여정까지 궁금한 게 참 많았고, 와르륵 쏟아진 질문에도 소영 작가는 견고한 에너지를 뿜으며 답변을 이어갔습니다. "잘한다는 건 제가 판단하기 어렵고, 그저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할 뿐이에요"라고 하셨지만 대화 속에는 나에게 뭐가 중요한지 아는 사람의 단단함, 결과에 좌절하지 않고 움직여온 사람의 성실함이 묻어나서 왠지 저도 용기가 났어요. 물론 보내주신 성원에 반드시 좋은 작품과 리워드 전달로 보답하리라,하는 각오도 함께였습니다.
만화 그리는 소영,
웹툰 작가의 치열한 하루와 작품 이야기
첫 텀블벅 성공 축하드립니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분들이 큰 금액을 모아주셨어요. 덕분에 목표금액의 2500%를 넘게 달성했고요. 통화에서도 떨림이 느껴졌는데, 기분이 어떠신가요?
우선 정말 놀랐어요. 연재하는 동안 다른 인기작품에 비하면 잔잔한 호응을 보내주셨기 때문에 100% 달성하면 좋겠다, 많아야 200% 정도 달성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사실 좋으면서도 지금은 끝까지 잘해내야 된다는 무게감이 큽니다. 기쁜 건 배송까지 마치고 나면 누릴 수 있을 것 같아요.
10개월간의 연재생활을 마치고,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계속 바쁘게 지내고 있어요. 세이브 원고(미리보기)가 5주치 있었기 때문에 사실 저에게는 완결을 올리고 후기를 올릴 때까지 5주라는 텀이 있었는데요, 그 기간에 단행본 구상하고 견적도 받고 텀블벅 올릴 준비를 하느라 정신없었죠. 지금은 제작할 부수가 크게 늘었고, 감사의 의미로 선물도 준비하고 싶어서 단행본과 굿즈 제작에 총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연재 이후 계획되어 있던 것들은 양해를 구하고 일정을 미뤘어요. 텀블벅 펀딩이 끝나면 온라인 클래스 개설과 다른 작품의 책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웹툰작가가 연재모드일 때는 24시간과 일주일이 어떻게 흘러 가나요?
굉장히 심플하게 답변드릴 수 있어요. 하루에 12시간 이상씩, 월화수목금토일 만화를 그렸답니다. 그래서 디스크도 오고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었죠. 많은 작가님들이 어시스턴트와 호흡을 맞추는데 저는 아직 제 그림과 만화를 완성하는 일의 업무 분장을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안 서서 도움을 받지 않았어요. 게다가 연재 시작 전에 작업을 약속했던 한국관광공사의 브랜드 웹툰 <오늘, 걸을까> 8부작을 병행하게 되면서 더 빡빡한 일정을 소화했습니다. <모퉁이 뜨개방>을 오래 준비한 덕에 미리보기 다섯 화씩 올리고도 저만의 세이브 원고가 있었는데 <오늘, 걸을까> 하면서 세이브 원고를 많이 까먹어서 엄청 쫄렸죠.(웃음)
본격적으로 <모퉁이 뜨개방> 얘기를 듣고 싶은데요, 모퉁이 뜨개방이라는 공간, 마음 속 서랍, 언니와 털실이라는 캐릭터를 구상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쓰고 싶은지는 꽤 오래 됐고요, 모퉁이 뜨개방이라는 공간을 떠올리고 끄적끄적 그려보기 시작한 건 2년 전입니다. 한번에 와르륵 떠오른 건 아니고 천천히 쌓아올린 이야기였어요.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하듯 ‘이런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상상이 첫 번째 출발점이었죠. 그리고 저도 소중한 존재를 떠나보내고 심리 치료와 관련한 책을 열심히 읽었는데 그게 혼자서는 적용이 잘 안되더라고요. 누가 와서 그 과정대로 내 속을 좀 정리해줬으면 좋겠다 했던 게 두 번째 출발점입니다.
실제로 <모퉁이 뜨개방>에서 과거의 감정을 다시 내 앞에 가져다놓고 보는 상황 등의 스토리 전개가 심리 치료 과정과 유사한 부분이 있고요, 알아봐 주시는 독자분도 계셨습니다. 잘 대입이 될까? 했는데 그런 피드백을 받아서 나쁘지 않은 접근 방식이었구나 생각했어요.
저는 이 작품을 ‘힐링물’로 규정하고 시작하지 않았는데 연재하는 동안 유난히 “위안받았다”는 말씀을 많이 해주셨고, 댓글에는 저마다의 사연이 가득했어요. 어떤 이유로 힘들어하고 뜨개방을 통해 치유해가는 스토리에 공감하는 분들이 이렇게 많다는 게 가슴 아프기도 했습니다.
작가님께는 뜨개방 같은 곳, 할머니와 언니와 털실이 같은 존재가 있으셨나요?
우선 뜨개방 외관은 여행 갔을 때 많이 본 거리의 평범한 집처럼 보였으면 했어요. 작품 직전에 다녀온 곳이 스페인 바르셀로나여서 카사 바트요처럼 곡선이 많은 건물 그림을 그리고 싶기도 했는데 그건 제 손목 사정이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았어요. 하하.
뜨개방 할머니는 제가 저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서 떠올린 캐릭터고요. 조금 전에 얘기했지만 소중한 존재를 잃고 큰 슬픔을 극복해야 했거든요. 오래 함께 살았던 강아지 ‘동이’인데요, 떠나보냈다는 면에서는 언니 캐릭터에 투영되었고, 사랑스러운 외모 면에서는 털실이 캐릭터에 투영된 친구예요.
작가님 그림에는 노오란 조명을 켜둔 것처럼 따스함이 느껴져요. 그림체도, 색감도요. 그러고 보면 스토리도 따뜻한데 이런 스타일은 일부러 잡으신 건가요?
네, <모퉁이 뜨개방>에 맞춰 그림 톤도 잡아 나갔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 전작 <오늘도 핸드메이드>와는 달리 노란 빛 도는 색감을 잡고 시작했지요. 온기가 느껴졌으면 했어요. 노란 조명 켜진 것 같은 배경색에, 검은 선은 쓰지 않고, 동화 같은 느낌을 냈습니다. 어떻게 보면 신파일 수도, 좀 삭막할 수도 있는 상황을 슬프게만 흘러가지는 않도록 그림으로 밸런스를 맞춰줬어요.
평소 일하는 작업실은 어떤 공간인가요? 작품들로 미루어 보아 왠지 예쁘게 꾸며두셨을 것 같아요.
전혀요… 평범합니다. 저는 집에서 일하는 게 편해서 작업실을 얻지 않았어요. 집무실이라고 하죠? 집에서 집중이 잘 되는지 묻는 분도 있는데 습관이 잡히고 ‘일하는 공간’이라고 인식하면 일이 됩니다. 물론 가끔은 답답해서 근처 카페를 왔다 갔다 하기도 해요. 제가 일하는 공간이 궁금한 분은 최근 시작한 브이로그에서 보실 수 있어요. 참고로 <모퉁이 뜨개방> 속 현이네 집 구조는 저희 집 구조랑 똑같답니다.
그림은 어떻게 그리시나요? 일러스트 작가분들은 손그림으로 베이스를 그리고 컴퓨터로 채색과 마무리를 많이 하시던데, 웹툰은 아무래도 무리겠죠?
저도 손그림 좋아하는데요, 웹툰 그릴 때는 수정이 하도 많아서 100% 프로그램으로 작업합니다. 텀블벅 리워드 중 만년 달력은 종이에 그린 그림이고요. 웹툰 작업을 할 때도 아날로그 느낌을 내고 싶어서 사이툴이라는 툴을 씁니다.
만화를 그리는 데 영감을 주는 작가나 작품이 있는지요?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을 만들어와서 인풋에 대한 고민은 하고 있어요. 의외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다큐멘터리를 많이 보고요, <그것이 알고 싶다> 같은 시사 프로그램과 팟캐스트를 주로 보고 듣습니다. 우리 사회에 대해 놓치고 있던 생각들을 넓혀 갈 수 있어서 좋아해요. 책은 실용서, 고전문학, 그림책을 많이 읽습니다.
회사를 나와 작가가 되기까지,
그리고 또 책을 혼자 준비하는 일에 대하여
연재 데뷔작인 <오늘도 핸드메이드>는 베스트도전부터 시작되었죠. 회사원이었다가 소영 만화가 시작되기까지 어떤 여정이 있었나요?
패션 디자인을 전공했고 패션회사에 취업을 했었어요. 학교에서부터 주어진 건 뭐든 열심히 하는 편이었는데 희망했던 디자인팀이 아니라 소재개발팀으로 배치되며 고민이 많았습니다. 다른 회사로 이직하려고 해도 디자인팀 경력이 없어 조금 애매했죠. 무엇보다 큰 조직에서 일하는 것이 제 성향과 맞지 않았어요. 아시다시피 저는 혼자 뚝딱뚝딱 무언가 만드는 일을 좋아하거든요. 고등학교 때 만화 전공이었고 만화가가 꿈이었는데, 회사 생활이 힘들 때도 만화를 그리며 여가시간을 보냈어요.
또 한편으로는 패션산업이 대량으로 생산해내는 결과에 대해 죄책감이 좀 있었습니다. 엄청난 환경운동가는 아니지만 최소한 지키고 싶은 것들이 있어서요. 지금 와서 생각하니 많이 만들어내고 재고를 쌓았다가 폐기하는 고리 안에 있는 것이 싫어서였는지 회사를 나오고는 소량 생산, 주문 제작 같은 반대되는 일을 많이 했네요. 전작 <오늘도 핸드메이드>도 그 과정에서 탄생하게 됐고요. 만화를 연재하기까지는 그림을 열심히 그리면서 핸드메이드 제품을 판매하는 등 텀이 꽤 있었어요. ‘내 것’으로 돈을 벌 수 있게 되기까지는 버텨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예전 인터뷰에서 ‘일에 대한 애정’을 말씀하신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어떤 작업을 끝내기 위해서 꾸준함은 꼭 필요한 요소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단추는 애정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이요. 꾸준히 무언가를 하려면 잘하는 게 중요할까요, 좋아하는 게 중요할까요?
저는 ‘내가 이걸 진짜 잘하지’라고 생각하는 타입이 아니어서 잘하는 건 스스로 판단하기 어려워요. 그래서 좋아하는 걸 꾸준히 하고 있지요. 그리고 그것을 독자분들 앞에 내어놓기에 부끄럽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뿐이에요. 잘하는 게 있다면 스스로 투두리스트를 만들고 자체 마감을 지켜나가는 거고요, 또, 망해도 계속하는 걸 잘합니다. 열심히 했으니까 묻어두지 않고 어떤 결과라도 만들어볼 거야, 하면서요.
아주 많은 작품들 속 대형 플랫폼에서 연재 기회는 어떻게 얻게 되는 건가요? 네이버웹툰에서 세 작품을 연재하고 나면 안정적인 생활이 보장되나요?
저는 연재 경험이 있지만 예전 담당자분께 다시 연락한 것은 아니고 다른 분들과 똑같이 투고했어요. 아마 다음 작품에서도 똑같은 과정을 겪게 될 거 같아요. <오늘도 핸드메이드>는 일상툰이었기 때문에 끝내고 나서 스토리가 가미된 작품을 할 수 있을까 두려웠고, <모퉁이 뜨개방>을 하면서도 ‘이게 마지막일지도 몰라’ 하는 마음으로 절박하게 작업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앞으로 안정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작품활동 할 수 있다는 확신은 전혀 없어요. 계속 불안해하면서 여러 갈래의 길을 만들어 놓는 편이죠. 1인 브랜드가 되기 위해서 한 플랫폼이 아니라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 여러 소통 창구를 이용하고 있고요.
<모퉁이 뜨개방>을 연재하면서 출판사들의 단행본 출간 제안이 많았다고 들었는데, 독립출판을 선택하셨지요. 출판 준비부터 텀블벅까지 해보니 어떠신가요?
워낙 혼자서 무언가 만드는 걸 좋아하고, 예전부터 언리미티드 에디션 같은 아트북페어 등을 다니며 독립출판도 꼭 해보고 싶었습니다. 예전 작품은 출판사와 함께 만들어봤으니 이번에는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겠다고 다짐했기에 출간 제안은 감사하지만 모두 거절했어요.
텀블벅은 몇 년 전에 킥스타터 같은 플랫폼이 한국에도 있다고 소개받아 알게 되었는데요, 써니사이드업 작가님처럼 같은 업계에 계신 작가님들 프로젝트를 후원해 왔습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재고를 쌓아두는 일이 싫었는데 텀블벅에서는 후원해주시는 분들에게 보내드릴 분량만 만들어도 되는 것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그리고 웹툰 연재 플랫폼 말고, 내가 단독으로 콘텐츠를 선보일 때 얼마나 수요가 있을까, 누가 좋아해주실까 하는 반응을 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텀블벅 펀딩을 해보니 투명하게 수치를 다 알 수 있어서 필요했던 부분이 충족됐어요.
프리랜서의 생활 방식이 잘 맞으실 것 같아요.
불안이 많은 성격인데도 프리랜서가 맞다면, 모순일까요? 불안한 마음은 계획을 촘촘히 잡아가면서 다스립니다. 좋아하는 일을 온전히 내 작업으로 끌고 가는 것이 저에게 가장 중요한 점이라 이렇게 일하는 게 좋아요.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망해도 내가 떠안으면 되고 잘 되면 내가 좋은 거잖아요. 자유도 높은 작업을 이어가려고 협업도 최소화하는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는 게 부담스럽기도 하고요. 수정을 여러 번 거친 만화 속에서 이야기를 건네는 게 저의 최대치입니다.
다음 작품 계획도 들려주세요.
<모퉁이 뜨개방> 펀딩이 모두 마무리되면 온라인클래스 론칭과 작년에 써둔 에세이 출간 준비를 할 예정입니다. 다음 작품은 아직 자세히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지금까지 했던 분위기와는 또 다른 장르를 도전해보려고 합니다.
앞으로의 꿈,을 여쭤보고 싶어요.
꿈은 단순합니다. 지금처럼 좋아하는 작업 오랫동안 하는 거요. 과정은 어렵겠지만요.
마지막으로 소영 만화의 독자이자 후원자 분들께 전하고 싶은 얘기 있으신가요?
제가 감사하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해서 지겨울 수도 있으시겠지만, 정말로 감사하다는 말씀밖에 드릴 게 없습니다.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큰 지면에 올린 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화면을 넘어 책으로, 그것도 이렇게 욕심껏 만들 수 있게 해주신 후원자분들께 부끄럽지 않도록 열심히 제작하겠습니다. 무사고 안전배송이 마무리되면 넘치게 받은 마음을 돌려드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도 열심히 고민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다들 복 받으시고, 건강하시고, 또 재밌는 작업으로 만나요!
소영
그리고, 쓰고, 만드는 사람. 네이버웹툰에서 <오늘도 핸드메이드!>, <오늘, 걸을까?>, <모퉁이 뜨개방>을 연재했습니다. 앞으로도 좋아하는 것들을 다양한 이야기로 풀어갈 거예요.
에디터_ 주소은 | 이미지 제공_ 소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