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참치의 두피 위 혁명 선언문
#T-R-Θ50427-G
선언자: 박참치 (탈모인류혁명사상가 / 진화론적 급진주의자)
인류는 오랫동안 불필요한 털을 벗어던지며 진화해왔다.
그러나 유독, 머리 위의 털만은 아직도 ‘있어야 하는 것’으로 남았다.
길고 짙고 풍성한 모발은 건강, 젊음, 생식력, 미적 완성의 상징으로 숭배되었고,
이 시대의 미디어는 가닥 당 수천 원짜리 욕망을 팔아 치우며,
탈모인을 무력화시켜왔다.
하지만 나는 묻는다.
“머리숱이 적다는 게 왜 미(美)가 아닌가?”
나는 물리학, 생물학, 인류학, 천문학, 유전학, 심지어 기상학까지 동원했지만
‘머리숱이 많아야 미남’이라는 명제에 대해 납득 가능한 과학적 근거는 단 한 줄도 찾지 못했다.
도리어, 듬성듬성한 모근은 강력한 남성호르몬의 증거이며,
태초의 전사들이 투구를 벗었을 때 가장 흔하게 보였던 두피의 형태였다.
탈모는 병이 아니다.
그건, 탈진화적 미의 과잉에 저항하는 남성적 절제다.
인간은 털을 잃은 유일한 유인원이다.
그렇다면 머리카락은 왜 아직 남아 있는가?
진화론적 설명은 분분하지만, 현재 가장 설득력 있는 설은 다음과 같다:
두피 보호
체온 유지
미적 장식
그러나 우리는 이미 모자를 쓴다.
실내온도는 23도를 유지한다.
머리 위 장식을 위해 수백만의 모공이 매달려 있어야 할 이유는 사라졌다.
탈모는 진화다.
머리카락은 뒤처진 장식의 관성일 뿐이다.
테스토스테론은 남성호르몬의 핵심이다.
문제는 이 호르몬이 DHT로 변환되면 모근을 수축시킨다.
→ 즉, 머리카락은 남성성에 패배하는 부위다.
그러나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는다.
풍성한 머리카락은 남성성이 부족하다는 증거는 아니다.
다만, 듬성한 머리카락은 종종 과잉된 남성성의 흔적이다.
탈모는 성적 위축이 아니라, 호르몬적 과포화 상태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빼앗겨온 건 머리카락이 아니라, 의미였다.
모발이식 평균 비용: 1,200만 원
탈모약 평생 복용 비용: 연 180만 원
이 모든 산업은 “탈모는 잘못된 것이다”라는 전제를 깔고 존재한다.
그리고 그 선전은 TV, 광고, 연예인 캐스팅, 캐릭터 설정까지 전방위적으로 수행된다.
탈모인은 ‘관리 안 한 사람’, ‘노화된 사람’, ‘패배자’라는 프레임을 쓴 채
정작 가장 많은 테스토스테론을 품고 있는 사람들은
밤마다 인스타그램 필터 속 풍성한 가발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거세된 존재로 상상한다.
이건 모욕이다.
이건 구조다.
그리고 이제, 이건 혁명이 될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머리카락의 풍성함으로 인간의 가치를 나누지 않겠다.
우리는 이마를 더 넓게 쓰는 사람들이고, 바람의 저항을 줄이며 달리는, 실용적 두피의 인간들이다.
우리는 이마의 위엄으로, 얼굴 뼈대의 선명함으로, 그리고 말 한 마디의 중량으로 ‘잘생김’을 설계한다.
우리는 정수리의 반란이 아니라, 두개골의 진실이다.
나는 오늘도 이마 위에서 햇빛을 튕긴다.
그것은 후퇴가 아니라 개화다.
나는 줄어드는 머리숱을 보며 인생의 간결함을 배운다.
나는 더 이상 머리숱이 적은 내 친구들을 위로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을 경외한다.
탈모인이여, 이제 그만 캡모자를 벗어라.
우리는 드러난 두피의 민낯으로, 이 과잉된 장식의 사회를 박살내고
드디어 인간이 된 자신을 마주하리라.
일어나라, 탈모인이여.
두피 위엔 아무것도 없지만,
너의 선언 위엔
혁명의 광채가 있다.
남은 것은 이마가 아니라, 진보된 사고의 창(窓)이다.
— 박참치, 현장노트 제27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