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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굽쇠 Feb 02. 2023

꽃잎에 새긴 편지

- 어느 해 4월 17일의 기록

언제까지나 겨울일 것만 같았던 이곳에도 슬슬 낮에는 더 이상 차갑지 않은 바람이 불고 있다.


  매년 이맘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봄바람은 시간이 얼마나 지나든 항상 비슷하다. 항상 같은 향을 담고 있고 같은 감상을 가져다준다. 자대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든 것이 낯설고 외로움으로 물들어있던 작년에도, 처음 겪어보는 대학생활을 조금씩 현실적인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가던 3년 전에도, 끝이 없을 것만 같았던 노력의 싸움에 잠시 지칠 때쯤이면 근처 테라스로 나와 적적한 마음을 달래던 4년 전에도, 마음도 생각도 너무나도 모난 채 한없이 세상을 관조하고 밀어내고 부정하고 싶었던 8년 전에도. 이맘때의 공기는 항상 똑같은 냄새를 담고 나와 마주쳤다. 그 안에는 그리운 사람의 냄새, 아쉬운 만남의 냄새가 가득 담겨있었다. 물론 그 안에 담긴 사람과 만남은 그때마다 달랐지만.


  이번 봄바람이 담아온 사람은 바로 너였다. 어젯밤에도 꿈에서 마주친 너를.


  분명 의식적으로는 너를 지웠다고 생각했었다. 아니, 아마도 의식 속에 너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의식 속에서 지워두었던 너의 얼굴이 사실은 그저 무의식으로 밀어 넣어졌던 것뿐이었다. 그리고는 무의식의 문을 잠가 두고 의식의 불빛 아래 쪼그려 앉아 시간 속에서 너의 모습이 풍화되어 가기를 하염없이 기다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무기력하게 기다리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의식의 불이 꺼진 순간은 동시에 무의식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새 열린 문틈 사이로 빠져나온 너를 마주쳤을 때 나는 당황했다. 어디에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테지만 분명 내 눈앞에는 없을 사람이라 생각했기에. 눈을 뜨고 의식의 세계로 내려앉고 나서도 여전히 그리운 듯 울렁거리는 가슴과 이유 모르게 메인 목을 느끼고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아쉬움과 안도가 반씩 섞인 마음을 이렇게나마 흘려내기 위해서.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내 사정을 알 리가 없는 봄바람은 겨우내 묻어두었던 너의 생각을 의식에까지 끌어올리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날 또 한 번 마음으로 울었다.


  한때 너를 향했던 나의 마음은 어쩌면 벚꽃보다는 목련에 가까웠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목할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다워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만한 것은 분명 아니었다. 오히려 설레발에 혼자 일찍 피어났다가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로 수수하게 너의 곁을 지키고는 금방 져버리는 것이었다. 간혹 그렇게 져버린 마음을 네가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밟아버려 추하게 문드러진 적도 있었다. 물론 밟아버린 마음에 대해 너를 탓하고 싶지는 않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굳이 책임을 돌리자면 그것은 벚꽃이 아니라 목련으로 피었던 나의 잘못이었기에.


  너를 보고 싶다, 라는 그 솔직한 한두 마디를 내뱉기가 어려워 그동안 눌러 참고 되삼켰던 마음이 어디 한두 모금이던가. 한번 흘러넘치면 걷잡을 수 없을 것만 같아 지금껏 시도조차 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에 나는 하늘을 자주 보았다. 너보다 밝지도 않고, 너만큼 반짝이지도 않고, 너처럼 따스하고 환하지도 않은 별들이 박혀있는 하늘이지만 그런 별들과 너를 비교하면서나마 너를 떠올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만족하기 위해서였다. 가끔은 너에게 연락을 해보려고 마음을 먹었다가도, 바쁘고 빽빽한 너의 일상에 혹시나 내가 부담스러운 불청객이 되어버릴까 싶어 먹었던 마음을 도로 뱉어 가슴 한구석에 묻어둔 것이 한두 조각이 아니었다. 그렇게 하나 둘씩 쌓여가던 것이 이제는 그저 문을 잠가 놓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나버렸다.


  실제로 너를 만나는 것은 가끔씩, 아주 가끔씩이었다. 그때마다 너에게 건네주고 싶었던 마음들을 미리 모아두어 한가득 준비해두었건만 나의 말과 행동들은 그것들을 다 담기에는 한없이 좁았다. 게다가 어째서인지 네 앞에 서기만 하면 자꾸만 마음을 헛디뎌 그 ‘그릇들’마저도 깨뜨려버린 적이 많았다. 그래서 어쩌면 네가 보기에 내가 차가워 보일지도, 무뚝뚝해 보일지도, 섬세하지 못해 보일지도 모른다. 돌아서면 그런 내 자신을 탓하면서도 여전히 이를 반복하고 있기에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이 아닌 글로 너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변명일 뿐이다. 용기 있게 얼굴을 맞대고 전하지 못했던 마음을 비겁하게 문자 뒤에 숨어 내던져놓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나의 마음을 이해해줄 수 있는 아량이 너에게 있다면 나는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길가를 덮는 수많은 꽃잎들처럼 여기에 뿌려둔 미사여구들 속에 숨겨진 한두 문장의 진심을 찾아내줄 수 있다면 참 좋겠다. 누구나 꽃잎 아래에서 화사하게 웃는 계절이 찾아왔기에, 아마도 그 속에서 누구보다 찬란하게 웃고 있을 너에게 나도 봄기운을 빌려 무심한 척 이를 내밀어본다.


  아직도 여전히 나는 말을 아끼고 있다.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 나의 마음을 오롯이 전할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볼품없으리만치 소박한 이 마음이라도 기쁘고 고맙게 받아줄 수 있는 자애로운 누군가를 만난다면 비로소 내보이고 싶은 말들을 꼭꼭 숨겨두고 있다. 마치 귀한 손님이 방문했을 때만 특별히 내어놓는 소중한 식기처럼, 아직 밖으로 꺼내 두지는 않았지만 기억날 때마다 열심히 닦으며 빛을 내고 있다. 이것들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어놓을 그 한 사람을 나는 기다리고 있다. 한편으로는 그 사람이 너였으면 좋겠다는 희망 같은 미련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말 그대로 미련이리라.


  수많은 낮과 밤을 헤집고 다니는 나에게 있어서 별을 볼 수 없는 날은 있어도 별을 보지 않는 날은 없다. 새벽을 잠시 거닐며 하늘을 보는 일이 어느새 나의 소소한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 벌써 일 년을 넘겼다. 며칠 전 봄비가 하늘을 쓸고 내려갔으니 아마도 오늘 밤은 맑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별자리들은 계절이 지나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촘촘히 박혀있던 별들도 겨울바람에 실려 어디론가 흘러간 것 같지만, 당분간은 봄바람에 담겨있던 너의 기억을 밤하늘 위에 덧바르는 것으로 괜찮을 듯하다.


  그렇게 오늘도 나는 너의 허락도 없이 멋대로 너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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