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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굽쇠 Feb 03. 2023

바보상자

군대에서 어느날 TV를 보다가

1.
 
   우리 집에는 TV가 없다어렸을 때는 TV가 있었지만내 기억으로는 중학교 1학년 때 사라졌다그 이유는 당연히 – 어쩌면 당연한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 TV를 너무 많이 보느라 학업에 지장을 준다는 것이었다단순히 부모님의 엄포인 줄만 알았던 나는 바로 다음날 TV와 셋톱박스가 거실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기 시작했다물론 심각하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그 당시의 심경을 반영한 호들갑이다항상 재미난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거실에 이제는 허전한 침묵밖에 없었기에.
 
   그 후로 우리 집에는 단 한 번도 집에 TV를 들여놓지 않았다처음에는 저녁에 TV를 보지 않는 일상이 어색하기만 했다무언가 할 일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하지만 나는 의외로 그런 방황(?)을 오랫동안 겪지는 않았다애당초 여태껏 범생이의 삶을 살아오던 나는 TV에 삶의 즐거움을 의존하는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그래서 나는 TV가 없어지자 이내 그 시간을 공부로 돌렸다게다가 공부하기가 지겨울 때쯤이면 방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던 책꽂이에도 눈을 돌리게 되었으니 지금 돌이켜보면 부모님의 TV 추방은 매우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TV가 사라지고 나서 8년 연속 나는 집에서 TV를 보지 않았다중학교 3학년 때쯤 DMB가 가능한 핸드폰을 얻기는 했지만핸드폰으로 TV를 보는 것도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그러다보니 이전까지는 열심히 챙겨보던 TV 프로그램에 흥미가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설마 사람이 아닌 것에도 해당이 될 줄이야어쨌거나 TV와 서먹해지면서 TV 프로그램과도 서먹해지게 되었고, TV 없이 사는 삶에 익숙해진 나는 아직도TV 없이도 잘만 산다. TV가 있으면 보지만 없으면 절대 먼저 찾아보지는 않으니까이제는 스마트폰을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단 한 번도 DMB를 틀어본 적이 없다심지어 스마트폰에 DMB 기능이 있는지도안테나가 어디 달려있는지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그러다가 입대 후 나는 오랜만에 TV를 자주 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났다그리고 급격히 많이 보게 되었다생활관에 다시보기 기능까지 달려있는 좋은 TV가 놓여 있으니 누군가는 TV를 틀어놓고 있고좋든 싫든 함께 사는 나도 TV를 같이 보게 되는 것이다처음에는 누가 틀어놓은 것을 옆에서 함께 보는 정도였지만 나중에는 내가 리모컨을 쥐고 채널을 돌리는 경우도 많아졌다만약 어느 채널에서 예전에 흥행했던 영화를 다시 틀어주는 날이라도 되면 몇 시간이고 TV 앞을 떠날 줄을 모르게 된다그제서야 느끼게 된 것은, TV는 사람의 정신을 지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2.
 
   여느 때와 같이 넋 놓고 TV를 보던 어느 날어렸을 때는 지겹다 못해 진부할 정도로 많이 들었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어느 샌가 잊어버렸던 표현이 문득 떠올랐다.
 
   ‘TV는 바보상자.’
 
   방금까지 TV를 보고 있던 내 표정을 거울로 보았다면 아마 바보처럼 여기지 않았을까.
 
   TV를 보다보면 나도 모르게 정신을 놓게 된다어떻게든 시청자를 TV 앞에 붙들어 두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만큼그렇게 전파를 타고 흘러오는 프로그램들은 날이 갈수록 강력한 흡인력을 지니고 있다그래서 청소기가 먼지를 빨아들이는 것처럼 TV는 내 의식을 빨아들이는 것 같다그렇게 눈과 귀가 고정된 나는 아무 생각도 할 필요 없이 TV에서 건네주는 생각과 감정을 받아먹게 된다물론 그것을 소화하느냐 마느냐는 나중의 일이지만적어도 TV를 보는 동안에는 그것들을 정신없이 받아들이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된다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TV를 끄고 시계를 보면서 드는 기분은불량식품으로 배가 차 있는 듯한 정신적인 더부룩함이다.
 
   또한 TV를 보고 나면 지금 살고 있는 현실이 상대적으로 느슨하고 지루하게 느껴진다현실에는 드라마나 영화와 달리 배경음악도효과음도 깔리지 않는다자막이나 아이콘도 들어가지 않는다집 안에서 누군가에 의해 치밀하게 가공된 일상을 눈과 귀로 잔뜩 먹어대고 나서 문 밖을 나서면그 앞에는 날 것의 밍밍하고 싱거운 일상이 놓여있다정확히 말하자면 TV로 먹었던 일상이 너무 자극적인 맛이 강했던 것이다짠 맛에 익숙한 사람은 적당히 담백한 것도 싱겁다고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시나리오가 짜인 옛날식 프로그램보다 요즘 들어 여기저기서 난무하는 다큐멘터리 식 관찰 예능이 더욱 그렇다예능 프로그램의 경우 그 기반이 되는 중심 소재가 현실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날 것의 일상과 가공된 일상의 괴리가 보다 적나라하게 느껴진다.
 
 
3.
 
   말이 나와서 하는 이야기지만관찰 예능을 볼 때마다 적어도 한 번 이상은 드는 생각들이 몇 가지 있다하나는 대부분의 사람은 전혀 알지도 못할 누군가의 일상을 굳이 왜 방송으로 만드는 걸까이고 또 하나는 방송으로 팔 만한 소재가 얼마나 고갈되었으면 일상마저도 팔아먹으려고 할까이다한때 우리나라 예능을 주름잡았다던 MC가 예능의 결국은 다큐멘터리이다라고 예측했던 것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기는 하지만다큐멘터리는 어디까지나 다큐멘터리이고 예능은 어디까지나 예능이던 그 시대가 조금은 그립다.
 
   관찰 예능이라는 미명 하에 누군가의 일상을 들춰보며 웃고 떠드는 모양새가 나는 어째서인지 마냥 편하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물론 방송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이 방송으로 나가는 것에 동의하기는 했을 테고그런 방송을 보고 좋아할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그러나 개인의 사생활이 편하고 풍부하게 담겨 있어야 할 일상마저도 공적인 방송으로 인해 조금씩 그 비중을 잃어가는 모습이 그다지 좋아보이지는 않는다그런 방송의 존재 이유를 단순히 시청자들의 그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라는 욕구만으로 정당화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어 보인다당연히 그것만이 이유일리는 없겠고 시청자들이 궁금해 하지는 않았던 사람의 일상도 방송되는 게 요즘의 현실이기는 하지만그래도 자꾸만 관찰 예능의 종점이 트루먼 쇼가 되어버리면 어떡하나 싶은 생각도 든다.
 
   개인적으로는 예능 방송이 자연스러움을 추구하기 위해 설정된 각본에서 자연스러운 각본으로그리고 각본 없는 각본으로 넘어가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장르 중 하나가 관찰 예능이라고 생각한다관찰 예능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지만주변인이 아닌 낯선 타인의 일상이라도 보고 즐기고 싶어 하는 욕구가 너무 강하다는 것은 어쩌면 그만큼 자신의 일상 속에서 풍성함과 풍족함을 느끼지 못한다는 반증이 아닐까인스타그램 등의 SNS에 주로 나타나는 있어빌리티’ 현상이 가공된 자신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이라면관찰 예능은 가공된 타인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날 것 그대로의 일상을 방송으로 끌어내온다 한들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인의 일상일 뿐이지 자신의 일상의 대체품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더군다나 다큐멘터리가 아닌 예능 프로그램이라면 더더욱 그 자연스러움과 사실성에 명백한 한계가 존재할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집도 옷도 음식도 남이 만들어놓은 것을 얼마든지 사서 살고 입고 먹을 수 있는 시대라지만일상마저 사먹고 싶지는 않다그런 거 열심히 먹어봤자 어차피 소화도 안 될 텐데.
 
 
4.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든다이런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 것 자체가 현실의 일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행위가 아닐까그렇게 생각한다면 TV를 보는 것을 아까처럼 나쁘게만 치부할 일은 아닌데 말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잠깐 보고 낄낄거리면 될 법한 TV 프로그램을 두고 이렇게까지 장황하고 진지한 생각을 하는 건 그냥 나의 전형적인 버릇이다매 순간 그렇게 생각하면서 사는 게 아니라 이런 방향의 생각을 많이 해보게 되는 것이다이래놓고 막상 TV를 틀어놓으면 그건 또 재미있게 보니까이중적인 건지그냥 잘 휩쓸리는 건지.
 
   사실 이런 걱정이 필요한 사람은 TV 속 세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판단력이 흐려진 사람 정도일 것이다많은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무분별하게 살지는 않을 테니 이런 걱정도 그다지 할 필요는 없으리라오히려 적절한 스트레스 해소와 킬링 타임에는 정말로 유용한 도구가 바로 TV이다하지만 본드를 원래 용도에 맞게 쓰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쓰면 위험한 결과를 낳듯이, TV도 마음속에 묻어있는 약간의 먼지와 그늘을 적당히 털어내기 위해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상과 정신을 무뎌지게 할 정도로 남용해버린다면 차라리 보지 않느니만 못한 게 아닐까가공의가상의 일상을 과식하는 건 일종의 정신적 도피행위인지도 모른다도피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너무 도피만 하는 게 문제라는 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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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를 타자로 칠 때는 반드시 /’ 키를 제대로 눌러야 한다. TV를 한글로 쳐버리면 꽤나 난감한 상황이 벌어질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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