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서 어느날 TV를 보다가
1.
우리 집에는 TV가 없다. 어렸을 때는 TV가 있었지만, 내 기억으로는 중학교 1학년 때 사라졌다. 그 이유는 당연히 – 어쩌면 당연한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 TV를 너무 많이 보느라 학업에 지장을 준다는 것이었다. 단순히 부모님의 엄포인 줄만 알았던 나는 바로 다음날 TV와 셋톱박스가 거실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물론 ‘심각’하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그 당시의 심경을 반영한 호들갑이다. 항상 재미난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거실에 이제는 허전한 침묵밖에 없었기에.
그 후로 우리 집에는 단 한 번도 집에 TV를 들여놓지 않았다. 처음에는 저녁에 TV를 보지 않는 일상이 어색하기만 했다. 무언가 할 일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나는 의외로 그런 방황(?)을 오랫동안 겪지는 않았다. 애당초 여태껏 범생이의 삶을 살아오던 나는 TV에 삶의 즐거움을 의존하는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TV가 없어지자 이내 그 시간을 공부로 돌렸다. 게다가 공부하기가 지겨울 때쯤이면 방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던 책꽂이에도 눈을 돌리게 되었으니 지금 돌이켜보면 부모님의 TV 추방은 매우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TV가 사라지고 나서 8년 연속 나는 집에서 TV를 보지 않았다. 중학교 3학년 때쯤 DMB가 가능한 핸드폰을 얻기는 했지만, 핸드폰으로 TV를 보는 것도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이전까지는 열심히 챙겨보던 TV 프로그램에 흥미가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설마 사람이 아닌 것에도 해당이 될 줄이야. 어쨌거나 TV와 서먹해지면서 TV 프로그램과도 서먹해지게 되었고, TV 없이 사는 삶에 익숙해진 나는 아직도TV 없이도 잘만 산다. TV가 있으면 보지만 없으면 절대 먼저 찾아보지는 않으니까. 이제는 스마트폰을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단 한 번도 DMB를 틀어본 적이 없다. 심지어 스마트폰에 DMB 기능이 있는지도, 안테나가 어디 달려있는지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그러다가 입대 후 나는 오랜만에 TV를 자주 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났다. 그리고 급격히 많이 보게 되었다. 생활관에 다시보기 기능까지 달려있는 좋은 TV가 놓여 있으니 누군가는 TV를 틀어놓고 있고, 좋든 싫든 함께 사는 나도 TV를 같이 보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누가 틀어놓은 것을 옆에서 함께 보는 정도였지만 나중에는 내가 리모컨을 쥐고 채널을 돌리는 경우도 많아졌다. 만약 어느 채널에서 예전에 흥행했던 영화를 다시 틀어주는 날이라도 되면 몇 시간이고 TV 앞을 떠날 줄을 모르게 된다. 그제서야 느끼게 된 것은, TV는 사람의 정신을 지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2.
여느 때와 같이 넋 놓고 TV를 보던 어느 날, 어렸을 때는 지겹다 못해 진부할 정도로 많이 들었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어느 샌가 잊어버렸던 표현이 문득 떠올랐다.
‘TV는 바보상자.’
방금까지 TV를 보고 있던 내 표정을 거울로 보았다면 아마 바보처럼 여기지 않았을까.
TV를 보다보면 나도 모르게 정신을 놓게 된다. 어떻게든 시청자를 TV 앞에 붙들어 두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만큼, 그렇게 전파를 타고 흘러오는 프로그램들은 날이 갈수록 강력한 흡인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청소기가 먼지를 빨아들이는 것처럼 TV는 내 의식을 빨아들이는 것 같다. 그렇게 눈과 귀가 고정된 나는 아무 생각도 할 필요 없이 TV에서 건네주는 생각과 감정을 받아먹게 된다. 물론 그것을 소화하느냐 마느냐는 나중의 일이지만, 적어도 TV를 보는 동안에는 그것들을 정신없이 받아들이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된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TV를 끄고 시계를 보면서 드는 기분은, 불량식품으로 배가 차 있는 듯한 정신적인 더부룩함이다.
또한 TV를 보고 나면 지금 살고 있는 현실이 상대적으로 느슨하고 지루하게 느껴진다. 현실에는 드라마나 영화와 달리 배경음악도, 효과음도 깔리지 않는다. 자막이나 아이콘도 들어가지 않는다. 집 안에서 누군가에 의해 치밀하게 가공된 일상을 눈과 귀로 잔뜩 먹어대고 나서 문 밖을 나서면, 그 앞에는 날 것의 밍밍하고 싱거운 일상이 놓여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TV로 먹었던 일상이 너무 자극적인 맛이 강했던 것이다. 짠 맛에 익숙한 사람은 적당히 담백한 것도 싱겁다고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시나리오가 짜인 옛날식 프로그램보다 요즘 들어 여기저기서 난무하는 다큐멘터리 식 ‘관찰 예능’이 더욱 그렇다. 예능 프로그램의 경우 그 기반이 되는 중심 소재가 현실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날 것의 일상과 가공된 일상의 괴리가 보다 적나라하게 느껴진다.
3.
말이 나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관찰 예능을 볼 때마다 적어도 한 번 이상은 드는 생각들이 몇 가지 있다. 하나는 ‘대부분의 사람은 전혀 알지도 못할 누군가의 일상을 굳이 왜 방송으로 만드는 걸까’이고 또 하나는 ‘방송으로 팔 만한 소재가 얼마나 고갈되었으면 일상마저도 팔아먹으려고 할까’이다. 한때 우리나라 예능을 주름잡았다던 MC가 ‘예능의 결국은 다큐멘터리이다’라고 예측했던 것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기는 하지만, 다큐멘터리는 어디까지나 다큐멘터리이고 예능은 어디까지나 예능이던 그 시대가 조금은 그립다.
관찰 예능이라는 미명 하에 누군가의 일상을 들춰보며 웃고 떠드는 모양새가 나는 어째서인지 마냥 편하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물론 방송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이 방송으로 나가는 것에 동의하기는 했을 테고, 그런 방송을 보고 좋아할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사생활이 편하고 풍부하게 담겨 있어야 할 일상마저도 공적인 방송으로 인해 조금씩 그 비중을 잃어가는 모습이 그다지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그런 방송의 존재 이유를 단순히 시청자들의 ‘그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라는 욕구만으로 정당화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어 보인다. 뭐, 당연히 그것만이 이유일리는 없겠고 시청자들이 궁금해 하지는 않았던 사람의 일상도 방송되는 게 요즘의 현실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자꾸만 관찰 예능의 종점이 《트루먼 쇼》가 되어버리면 어떡하나 싶은 생각도 든다.
개인적으로는 예능 방송이 자연스러움을 추구하기 위해 ‘설정된 각본’에서 ‘자연스러운 각본’으로, 그리고 ‘각본 없는 각본’으로 넘어가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장르 중 하나가 관찰 예능이라고 생각한다. 관찰 예능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지만, 주변인이 아닌 낯선 타인의 일상이라도 보고 즐기고 싶어 하는 욕구가 너무 강하다는 것은 어쩌면 그만큼 자신의 일상 속에서 풍성함과 풍족함을 느끼지 못한다는 반증이 아닐까. 인스타그램 등의 SNS에 주로 나타나는 ‘있어빌리티’ 현상이 가공된 자신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이라면, 관찰 예능은 가공된 타인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날 것 그대로의 일상을 방송으로 끌어내온다 한들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인의 일상일 뿐이지 자신의 일상의 대체품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다큐멘터리가 아닌 예능 프로그램이라면 더더욱 그 자연스러움과 사실성에 명백한 한계가 존재할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집도 옷도 음식도 남이 만들어놓은 것을 얼마든지 사서 살고 입고 먹을 수 있는 시대라지만, 일상마저 사먹고 싶지는 않다. 그런 거 열심히 먹어봤자 어차피 소화도 안 될 텐데.
4.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든다. 이런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 것 자체가 현실의 일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행위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TV를 보는 것을 아까처럼 나쁘게만 치부할 일은 아닌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잠깐 보고 낄낄거리면 될 법한 TV 프로그램을 두고 이렇게까지 장황하고 진지한 생각을 하는 건 그냥 나의 전형적인 버릇이다. 매 순간 그렇게 생각하면서 사는 게 아니라 이런 방향의 생각을 많이 해보게 되는 것이다. 이래놓고 막상 TV를 틀어놓으면 그건 또 재미있게 보니까. 이중적인 건지, 그냥 잘 휩쓸리는 건지.
사실 이런 걱정이 필요한 사람은 TV 속 세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판단력이 흐려진 사람 정도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무분별하게 살지는 않을 테니 이런 걱정도 그다지 할 필요는 없으리라. 오히려 적절한 스트레스 해소와 킬링 타임에는 정말로 유용한 도구가 바로 TV이다. 하지만 본드를 원래 용도에 맞게 쓰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쓰면 위험한 결과를 낳듯이, TV도 마음속에 묻어있는 약간의 먼지와 그늘을 적당히 털어내기 위해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상과 정신을 무뎌지게 할 정도로 남용해버린다면 차라리 보지 않느니만 못한 게 아닐까. 가공의, 가상의 일상을 과식하는 건 일종의 정신적 도피행위인지도 모른다. 도피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너무 도피만 하는 게 문제라는 점에서.
덧.
‘TV’를 타자로 칠 때는 반드시 ‘한/영’ 키를 제대로 눌러야 한다. TV를 한글로 쳐버리면 꽤나 난감한 상황이 벌어질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