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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굽쇠 Feb 03. 2023

말과 글과 마음

언어의 한계와 가능성을 느끼며

1.

   어렸을 때부터 나는 말이 많았다. 나이가 한 자릿수였을 시절부터 이동하는 차 안에서 몇 시간이고 쉬지 않고 떠들었을 정도라니 나 스스로 생각해도 시끄러웠던 것 같다. 물론 요즘에는 말이 조금 줄어들었다고 생각하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어떨지 모를 일이다.


   중학생 때였을까? 누군가로부터 ‘여자들은 말 많은 남자를 싫어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지금 떠올려보면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여자들이 말 많은 남자를 싫어할 것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단순히 말이 많기 때문에 싫어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이후로 나는 조금씩 말을 줄여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예전부터 많았던 말이 그리 쉽게 줄어들지는 않았다. 의식적인 노력으로 말을 줄이는 한계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효과도 별로 없었다. 내가 말을 줄이게 된 것은 나 스스로 말의 효용성에 대한 신뢰를 어느 정도 버렸을 때부터였다.



2.

   지금껏 내가 말이 많았던 이유는 나를 설명하고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든 나를 알리고 싶었고 이해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으레 그러듯이 세상은 일개 개인에게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가까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기 자신보다 중요한 일은 없기 마련이다. 그래서일까?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보다 들어주지 않는 사람이 더욱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러한 현실을 인식한 것이다. 그때 나는 자각(自覺)하고 자인(自認)했다. ‘나는 참 시끄러운 사람이구나.’


   그다음부터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글쓰기보다는 브레인스토밍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욱 적절할 정도로 짤막한 생각들을 나열할 뿐이었다. 그저 내 안에 있는 무언가를 눈앞에 형체화시키기 위한 몸부림 정도로 여길 수 있었으리라. 그 기록들은 나에게 있어서 그렇게 큰 의미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기록한 행위 그 자체였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바라보지 않을 나 자신을 바라봐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고, 나는 나 스스로에게 말을 걸기 위해 글을 썼다. 그것이 가장 조용하고 차분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면서도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나는 자기만족을 위한 글을 썼었다. 그것은 아마 지금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내가 써온 글들을 되짚어보면 하나같이 내 생각을 바깥으로 꺼내보고자 하는 욕구가 가장 먼저였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 글을 읽고 호평을 하든 혹평을 하든 그것은 그다음 일이었다.



3.

   내가 글을 쓰는 것은, 내가 쓴 글을 읽는 것은 마치 앨범에서 내 사진을 찾아보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 그 당시의 나라는 사람은 어떠했는지, 그로부터 지금의 나라는 사람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마치 다른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듯이 한 발 물러서서 타자화(他者化)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분명 내 글인데도 읽다 보면 글쓴이가 부러워지거나 한심해질 때가 많았다. ‘이 글은 꽤 괜찮다’라든지 ‘이것도 글이라고 쓴 건가’라든지. 물론 일말의 현실감은 있기에 내 글에 대한 아픈 손가락으로써의 마음은 있다. 문제는 대부분이 아픈 손가락이라는 점이지만.


   글은 그 사람을 담는 그릇이기도 하고 그 사람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 내 글을 읽으며 바라본 ‘나’는 참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다. 다중인격도 아니면서 이런 스펙트럼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신기할 정도로 말이다. 물론 글과 그 글쓴이를 동일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이런 글이 나오는 사람이라면 그 본체(?)는 어떨지 더욱 궁금해지게 마련이다. 때문에 스스로 글을 쓰면서 혹은 읽으면서 나도 모르고 있던 나의 일면을 발견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4.

   어느 친구와 잠시 메일을 주고받은 적이 있다. 내가 그 친구에게 메일을 보낸 것은 편지를 보내기가 번거로웠던 이유도 있었기에, 메일을 보낼 때마다 편지에나 쓸 법한 긴 호흡의 이야기들을 메일에 담아 보낸 적이 많았다. 이것도 나름 ‘전자 우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내 메일을 몇 번 받아서 읽어보던 그 친구는 어느 날의 답장으로 나에게 ‘네 글에서는 따뜻한 느낌이 난다’고 평했다. SNS 등에 올리는 글처럼 딱딱해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그때 처음으로 내가 썼던 글에 자부심을 느꼈다. 글을 통해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누군가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지금껏 내가 글을 써오면서 할 수 있었던 일들 중 가장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글을 써서 먹고사는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니고 그저 취미로 몇 자 끄적이는 정도의 글밖에 쓸 줄 모르는 아마추어이지만, 그래도 그 투박함 속에 나만의 부드러움을 담고 싶었다. 그래서 SNS 상에 돌아다니는 진부한 소재와 표현들을 가져오기를 가급적 피했다. 여기저기 널려있는 싸구려 감성팔이로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나의 언어로 나의 표현법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했다. 다만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동안 별 생각 없이 살아왔기 때문이거나, 별 굴곡 없이 살아왔기 때문이리라.



5.

   나는 가슴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었고 따뜻한 사람이라 불리고 싶었다. 그래서 따뜻한 말과 글을 건네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따뜻한 글을 선물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길든 짧든 내가 선물해준 글을 받은 사람이 언제 어디서든 그 글을 꺼내 읽을 때면 항상 그 안에 고이 담겨 있는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쓰려 할 때마다 거기에 나를 담으려고 노력했다. 진심이 전혀 담겨있지 않은, 수사법과 미사여구만이 가득한 글을 쓸 바에야 아예 쓰지 않았다. 그런 글은 쓰는 자신뿐만 아니라 읽는 타인마저 모욕하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평소에 편지를 잘 쓰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나는 나 자신과 분리되어 철저하게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글은 잘 못 쓰는 것 같다. 아무리 논리적이고 냉정하게 글을 쓰려 해봐도 경수필이 중수필은 될지언정 논설문이 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레포트를 쓸 줄 모른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런 글은 어쩐지 쓰면서도 쓰고 나서도 정이 잘 붙지를 않는다.



6.

   내 주변에는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 많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나보다 나이가 많든 적든 간에 나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고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경지에 서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내가 할 줄 아는 것들 하나하나마다 그것을 나보다 훨씬 능숙하게 그리고 우수하게 해낼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보다 보면 - 그런 비교를 하지 말라는 말을 자주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 나 자신은 그런 사람들에 비해 한없이 평범하게 느껴진다. 그들 사이에서 내가 내밀 수 있는 ‘나만의 특별함’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지 궁금해질 정도로.


   그런 비교와 고민 끝에 내가 갖게 된 작은 목표는 따스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나 그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나를 찾아주는 사람에게는,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상냥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측정 가능한 능력이 아니라는 점과 대상에 차별성을 둔다는 점에서 이는 매우 약삭빠르게 설정한 목표이리라. 나의 조악한 필력을 어떻게든 써먹고자 하는 욕심마저 포함하여.



7.

   고등학생 때 한 후배로부터 ‘문어체로 말한다’는 평을 들은 적이 있다. 구어체에서는 쓰지 않을 법한 단어나 어구를 사용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글로만 담아내던 표현들을 직접 입에 올리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 말투는 참으로 어색하고 작위적인 느낌이 들지도 모른다. 만연체로 느긋하게 풀어가는 대화라니, 그런 대화야말로 책에서밖에 본 적이 없으니까.


   남들이 느끼기에는 다를 수 있겠지만 나 스스로는 구어체로 많이 돌아왔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종종 문어체를 서슴없이 사용할 때가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문어체라기보다는 글에서만 사용하던 진솔하고 섬세한 표현들을 입에 올리기를 주저하지 않을 때가 있다. ‘오글거린다’는 표현 뒤에 숨어 진심을 주고받기가 전보다 어색하고 껄끄러워진 요즘의 문화 속에서, 이해와 공감이 결핍된 메마른 구어체에 견디다 못해 질려버린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와 한 가닥의 따스함과 상냥함을 원할 때, 바로 그때이다.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그것이 가능해 보이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 사람이 뛰어난 것이리라. 어쨌든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란 극도로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나는 갑자기 큰 욕심을 내서 박애주의자가 되거나 하지는 않으련다. 지금은 그저 내 주변 사람들을 돌아볼 수 있는 섬세함과 여유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 거기에 단 한 명이라도 깊이, 제대로, 성숙하게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 정도로 장성한 인격을 갖추고 싶다. 달성할 수 있을지, 확인할 수 있을지조차 불분명하지만 분명 목표임은 확실하다.



8.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말을 궁리하고 글을 궁리한다. 특히나 글을 궁리한다. 나를 제대로 바라봐 주고 있을 몇 안 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말과 글로 진심을 보여줄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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