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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로루디 Mar 31. 2024

채울 수 없는 답은 공란으로 남겨둔 채

어쨌든 살아야 하니까. 


지난 해 3월 이후 발길을 끊었다가 문득 생각나 다시 찾은 브런치는 여전히 그 때의 우울함이 묻어 있다. 저만큼 힘들었나 싶어 놀라기도 했고 생각하는 건 크게 달라지지 않아 무뎌진 건지 나아진 건지 구별이 가지 않는다. 문득 생각났다는 것은 그다지 좋지는 않은 징조이다. 나는 힘들 때마다 늘 숨어들었고 매번 그 끝은 글이었으며, 수많은 비공개 SNS와 블로그를 거친 종착지가 저 구석에 꽁꽁 숨겨둔 이 곳, 아무도 내가 나인 것을 모르는 브런치라는 것은 어쨌든 속에 쌓아 두어 구구절절 써내야 할 말이 있다는 뜻이니까. 


우울증을 처음 진단받았던 곳을 다시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그리고 그 당시 다니던 병원에서 그렇게 하길 권유했던 21년 1월 겨울로부터 약 3년 가량이 지났다. (이 글을 처음 썼을 때는 2년 6개월 가량이라고 적었는데, 24년 3월 끝자락인 지금은 3년하고도 2개월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뭘 알긴 했었나 싶은 나이부터 5년 동안 상담을 받았던 곳이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는 이런저런 이유로 다른 병원이나 상담 센터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결국 돌고 돌아 익숙한 공간을 다시 찾았다. 이 곳을 다시 마주했을 때의 그 패배감이란. 그 후로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동안 나는 나아졌을까. 이전처럼 틈만 나면 죽어 있는 나의 모습을 보던 때보다, 작정하고 유서를 쓸 때보다는 그래도 나아진 것 같다 - 고 6개월 전의 나는 적었으나 지금의 나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 그런데 이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 3년 동안 내가 느낀 것은, 상담은 오히려 연명 치료와 많은 부분이 닮아있는 것 같다는 사실이다. 상담사들은 어떻게든 환자를 세상에 붙잡아 두려 한다. 하지만 환자들은 떠나고 싶어한다. 정해진 기간마다 - 내 경우에는 일 주일에 한 번 - 이런저런 생각들에 제동을 걸고 현실을 살기 위해 병원에 방문한다. 하지만 방문할 때마다 나 역시 수많은 내담자 중 한 명일 뿐이고, 상담사는 그들의 업무 시간을 할애해 고객을 마주하는 것이 일이며, 나는 그들에게 있어 업무 시간을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물론 과도하게 애착을 느끼는 것은 안 될 일이지만 3년이 지나도록 분명히 이전에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여러 번 설명해야 하는 구석이 있다는 것은 날 의아하게 만든다. 그럴 수 있을까?


여전히 '왜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한 답은 공란이다. 


물론 인류는 천 쪼가리 하나 걸치고 철학에 대한 토론을 해오던 고대 그리스 때도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왔기에 내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있다면 분명 이렇게 살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많은 철학가들이나 인류학자들이나 혹은 나 같은 보통 사람들이 인류의 탄생 이후 풀어내지 못하고 있는 답을 내가 알아냈다면 분명 이렇게 살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비와 향락에 물들어 자본주의 피라미드의 꼭짓점에서 살고 있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아마도 안락사를 위해 갖은 방법을 쓰지 않았을까. 시민권 취득이나, 안락사를 위한 여러 단계를 매수한다던가. 방구석에 틀어박혀 우는 것과 최고급 호텔에 틀어박혀 우는 것의 차이 정도일 뿐이다. 사실 삶에 대한 사유는 밝혀내도 밝혀내지 않아도 그 끝은 답없는 비극일 것만 같아, 그것을 알아내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먼저 죽음에 가 닿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디선가 우리는 그냥 태어난 것인데,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야말로 자의식 과잉의 증거라는 의견을 보았다. 온 힘을 다해 부정하고 싶었지만 지나친 부정은 긍정이라, 맞는 말도 같았다. 내가 죽음에 관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의식의 소멸이니까. 나의 의식을, 나의 자아를 유지하고 보존할 만큼의 가치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야말로 자기애와 자의식 과잉의 완성 아닐까? 나는 맞는 말에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거기에서 또 다시 피어나는 생각. 그냥 태어난 것이라면 애초에 자아도 주어지지 않았어야 하는 것 아닐까. 이런 쓸데없고 논쟁만 일으킬 뿐인 주제까지 생각이 닿도록 설계되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닌가. 원자는 제멋대로 집합해 사람의 형태를 만들어 놓고, 어떤 힘으로 생겨난 자의식이 존재에 관해 생각하는 순간 모른 체 시선을 돌린다. 인류가 진화를 거듭했다면 이러한 부담을 버텨낼 수 있는 어떠한 장치가 함께 진화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단단히 고장난 이 체계를 약으로도 조절하지 못해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해야 한다면, 그럼 그 신체는 틀림없는 불량이 아닐까. 교환도 반품도 전부 가능한 불량. 


생명 잉태의 과정이 아름다운가? 잘 모르겠다. 생명 잉태의 그 어떤 과정에도 생명 본인의 의지는 없다. 거기엔 오래 전부터 새겨진 종족 번식의 DNA뿐이다. 우리를 닮은 아이를 낳고 싶어, 쾌락을 쫓고 싶어, 한 명 더 있으면 안정적인 가정을 이룰 수 있겠지, 아이를 가졌대 그래서 너무 기뻐, 우리 둘 아니 셋 함께 잘 살아 보자. 배도 성기도 죄 찢어지고 변형되는 아픔을 겪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몸을 끌어안으며 울고 웃으며 키워낸다. 도대체 왜?


생명이 태중에 있을 때 누군가 꼭 물어봐 주었으면 좋겠다. 너는 이런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고, 얼마 동안 세상에 생존해 있을 것이라고. 그러니 태어날 의지가 있는지, 아니면 태어나길 포기할 것인지. 너는 그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채울 수 없는 공백과 공허를 마주하면서도 의연히 맞서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약함을 인정하고 다시 잠들어 어딘가의 공기로 다시 부유할 것인지. 의미는 찾아도 찾을 수 없으나 누군가는 작은 것들에 소중함을 느끼며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그것조차도 힘들어해 일찍 생명의 끈을 놓을 수도 있다고. 삶은 불행과 희망 그 중간에 위치해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지만 유전자에는 기질이라는 것이 존재해 누군가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한 쪽으로 한껏 치우친 삶을 살아가며 죽을 자리를 항상 마련해 놓고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삶을 시작하고 싶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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