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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로루디 Jun 30. 2022

술독에 빠져 산다는 건

겪어보니 죽겠더라. 알코올 중독의 대물림



아빠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원래부터 술버릇이  좋았다고 한다. 일곱  먹은 나는 스누피와 친구들 무늬가 있는 흰색 잠옷을 입고 가장 좋아하는 인형을 안고 부엌 구석 바닥에 앉아 벌벌 떨었다. 초등학교  학년의 어느 날은  밖에 두고  강아지를 아빠와 아빠 친구들이 잡아먹지는 않을까 무서워서 울었다. 아빠는 엄마가 가장 아끼는 소파에 오줌을 싸고,  년여 뒤에 방바닥에 오줌을 쌌다. 내가 어렸을  아빠가 엄마한테 던졌던 곰인형은 솜뭉치에 지나지 않았지만  년이 지나자 그것들은 무거운 대리석 조각상과 무거운 원목 의자 같은 것으로 돌아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주  봐줄 정도로 행패를 부렸다는 뜻이다. 눈에 보이는 물건들을 가리지 않고 집어던져 세간살이가 남아나질 않았다. 우리 집에는 1.4kg밖에 나가지 않는 아주 작은 강아지도 있었는데.


그런 일들은 내 감정을 오히려 꾹꾹 눌러담아 평평하게 만든다. 집이 그 난장판이 되고 유리나 겨우 치운 채 눈을 붙인 다음 날 아침, 그제서야 정말정말 아끼던 컵이 깨진 걸 발견했고 그게 너무 서운했다는 것 외에 다른 감정은 느낄 수 없었다. 그래도 중학교를 지나 머리가 어느 정도 컸을 때는 쌍욕을 하고 폭력을 휘두르고 물건을 던져대는 아빠한테 더 심한 쌍욕을 하며 대들었다. 엄마와 강아지를 지켜야 했으니까. 강아지는 뭐에 잘못 맞기라도 하면 큰일 날 게 분명했고, 그건 '너 누구야, 너 00이 아니지.' 라는 말을 들으며 맞아야 했던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똑같았다. 안경이 날아가고 머리가 번쩍 얼얼하도록 뺨을 여러 차례 맞았는데 목이 돌아가는 것 같았다. 술 끊을게, 절주라는 단어를 반복하던 아빠는 어느 날 한 잔만 했어, 세 잔만 했어, 하다가 취해서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잦아졌고 또 다시 굴레가 반복되었다.


가장 심했던 날, 아빠는 제 분에 못 이겨 유리를 걷어찼고, 그게 그대로 아빠 발목에 박혀 피가 미친 듯이 솟아나왔다. 엄마는 영화에 나오는 피나 칼조차도 제대로 못 보는 사람이었다. 유리 파편은 멀리까지 날아가기 마련이니, 일단 강아지를 내 방에 넣어 두고 119에 전화를 걸었다. 구급대원분들이 오시는 동안 어디서 본 것들을 총망라해서 최대한 응급처치를 했다. 그리고 구급차에서부터 술에 취한 아빠의 행패가 계속되었다. 첫 번째 병원에서는 너무 심해서 치료를 거부했다. 두 번째 병원에 가서야 술이 좀 깬 아빠는 생각보다 상처가 깊어 입원을 했다. 나는 집에 돌아와 말라붙은 피를 따뜻한 물로 적셔 닦아냈다. 그 때부터 같이 안 살기 시작했다. 사실 이게 첫 번째로 같이 안 산 건 아니었는데, 나는 여기에서 우리 가족이 이제 끝났다는 것을 실감했다. 나중에 가 보니 아니었지만.


여튼 이렇게 알코올 중독자를 가장 가까이 두고 살아온 나로서는 술이야말로 최악의 돌파구였다. 술을 마시는 것 자체가 어떤 범죄와 같이 느껴졌다. 물론 이렇게 죽을 것 같이 두려워하다가도,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잘 마시고 다녔다. 다만 '절대 취하면 안 돼' 라는 말이 머릿속에 불로 지진 것처럼 새겨져 있어서, 웬만하면 취하는 일이 없었고 설령 취했다 하면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같이 마시는 사람들을 챙기고 주변을 정리했다. 웬만하면 술에 취한 것이 티나지 않도록 행동했지만, 많이 취한 날에는 모든 사람에게 끊임없이 미안하다고 말했다. 날 부축하게 해서 미안해. 날 데려다주게 해서 미안해. 신경쓰게 해서 미안해. 반짝 그렇게 술 몇 번 마시고, 이제는 웬만하면 술을 잘 안 마시는 사람이 되었다.


근데 그런 사람이 왜 알코올 중독을 경험했냐 하면. 이건 2019년 하반기의 이야기이다.


1.

나는 타국에서 잠깐 살며 일을 했었다. 일 년이었는데, 상반기가 지나자 지옥이 찾아왔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인력이 많이 교체되었고 어쩌다 보니 일 시킬 만한 가장 만만한 사람이 내가 되었다. 신입으로 들어온 직원들은 회사 구조를 익히기 바쁘고, 나는 거기서 6개월 가량 일을 해본 사람이었으니. 그래도 돌아가는 일을 조금 아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것이 낫지 않겠나. 문제는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이 신규 인력 빼고 모두 다였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을 받고 있었다. 루디야, 이거 좀. 루디 님, 이거 좀. 야, 루디. 여기로 와 봐. 메인 일이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가 되어가는 상황에서 머릿속이 복잡하게 꼬여 갔다. 하기는 했는데 정말 날 다 갉아먹고 있었다. 나중에 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본 원장님은 다른 분들을 소집해 회의를 열었다. 회의 주제는, '루디 님을 이렇게 두어도 되는가'. 사무실이 분리되어 있는데도 힘들어하는 모습이 눈에 띌 정도였으니, 일 분배를 제발 잘 해달라는 결론이 났다고 했다. 물론 회의 후에도 나아지는 건 없었다. 도리어 내가 신규 인력에게 자그마한 일이라도 맡기려 들면 위에서 눈치를 주었다. 웬만한 건 떠안고 사는 성격에 이런저런 것들이 겹쳐지니 혼자 바윗덩이를 끌어안고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2.

이렇게 살아가다 보니 결국 지독한 우울증 증상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만성 우울증인 나는 그런 시기가 있다. 일정하지는 않지만, 일 년에 한두 번, 많으면 다섯 번 정도 찾아오는데, 평소의 낮은 텐션이 아니라 정말 아주 깊은, 심각한 자살과 자해 충동까지 내려가는 시기였다. 이 시기가 되면 온 몸이 저리면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 거기에 나의 만성 우울증은 매번 수면장애를 동반했다. 새벽 다섯 시까지 깨어 있는 것은 기본이었고 아예 잠을 못 자는 날도 많았다.잠깐 잤다가 출근하는 삶. 거기에다가, 도무지 뭘 먹을 수가 없었다. 음식 강박 몸무게 강박이 있는 나는 이것이 '일부러 안 먹는 것' 인지, 혹은 '진짜 못 먹겠는 것' 인지쯤은 구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건 거식증과는 조금 달랐다. 나는 몸무게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데, 도저히 입에 음식을 넣을 수가 없었다. 배는 꼬르륵 소리를 내며 고파왔는데도 먹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사온 음식들이 썩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출근 직전, 복숭아를 하염없이 노려보다가 울면서 씹어 삼켰다. 이거라도 먹어야 사니까. 그렇게 하루에 복숭아 하나 겨우 먹고 물 한 병 겨우 마시는 삶을 살다 보니 일 주일도 안 되어 6kg가 빠지기도 했다. 나중에는 제대로 걷는 것도 힘들어 어떻게든 뭐라고 먹어 보려 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보다 못한 친구들이 날 꺼내서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강아지를 안겨주고 낮잠을 자게 하고 음식을 입안으로 직접 들이밀어 줄 정도였다.


위 요인들이 합쳐지고 기타 다른 요인들이 버무러지며, 이제는 그 우울의 수렁에 빠진 지 한 달 정도에 다다랐고 나는 정말 이 생활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술이었다.


처음에는 남들 그렇듯 가볍게 맥주 한 잔 하고 푹 자보자는 생각이었다. 피곤에 절어 있는 친구들이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내가 쉽게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와인은 달아서 배불러 싫고. 그래서 위스키를 샀다. 아주 작은 휴대용 보틀. 처음 먹는 위스키 샷의 맛은 정말 썼다. 그걸 한 반쯤 비워내고서 나는 완전히 취해 버렸고, 시계는 새벽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어찌저찌 잤던 것 같다.


그렇게 하루 하루, 매일마다 저녁에 술을 마셨다. 저녁에 퇴근해 들어와 저녁 일곱 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일곱 시를 기다린 이유는, 해가 떠 있을 때 술을 마시면 정말 술에 미친 사람처럼 보일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게 일곱 시가 되면 혼자 방에 틀어박혀 담배 냄새를 없애기 위해 인센스에 불을 붙이고,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셨다. 하지만 여전히 잠은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이상하다. 분명히 술 마시면 잠이 잘 온댔는데. 그래서 그 이론(?) 이 통할 때까지 마셔보기로 했다. 그것도 침대와 창문 그 사이에 마련된 아주 작은 틈에 몸을 붙이고. 여자 혼자 술을 마시는 문화는 유럽에서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지, 뭐해? 라 물어오던 친구들은 혼자 술 마셔, 라고 늘 답하는 나를 약간 불쌍한 이미지로 봤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취하고 싶은 만큼 취하려면 주변에 오히려 사람이 없어야 했다. 그렇게 일곱 시부터 새벽 네다섯 시까지 술을 마시는 나날이 한 달, 두 달, 세 달.. 12월 초까지 지속되었다. 7월 즈음부터.


주량이 늘었다. 아주 작은 휴대용 위스키 보틀 반에 제로 사이다나 토닉 워터를 섞어 마시면 소주 두 병 마신 사람처럼 취했었는데, 매일마다 마셔대니 언제부턴가는 하루에 750ml 정도 되는 위스키 보틀 반을 비우고 그걸로 모자라 와인까지 마신 다음에서야 취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알딸딸하게 취했던 처음에 비해 거의 인사불성이 된 상태로 노래를 따라 부르고 그냥 실없이 웃기만 했다. 마시고, 취하고. 마시고, 취하고. 일어나면 자해한 흔적이 가득했다. 가족들이 끊임없이 연락했지만 완전히 무시하고 살았다. 이런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나는 일하는 시간을 빼면 언제나 취해 있었으니까.


어느 날은 와인을 마시고,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스피린을 먹었다. 아마도 감기약을 먹으면 잠에 들곤 했던 기억 때문이었던 것 같다. 먹은 지 얼마 안 되어 언제 잠에 든 건지도 모르게 잤고, 20분 정도만 잔 것 같았는데 일어나 보니 이미 출근 시간을 훌쩍 넘겼다. 온 몸은 식은땀으로 가득했다. 가슴께가 심하게 아파왔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술이랑 약이랑 같이 먹으면 큰일나는구나. 하지만 나는 이 방법을 종종 썼다. 술을 아무리 마셔도 원하는 잠은 잘 수 없었으니, 이렇게라도 어떻게든 불면증을 해결해보자. 라는 마음에서. 하지만 불면증은 나아질 생각을 하지 않았고, 결국 나는 대부분의 나날들을 술 냄새 가득 풍기며 출근했다. 당연하지. 새벽 다섯 시, 여섯 시까지 마셔대고 아홉 시에 출근을 하니 얼마나 술 냄새가 많이 났겠어.


술병은 빠르게 모여서 사흘 안에 치우지 않으면 병이 온 바닥을 굴러다녔다. 매번 다섯 병, 여섯 병 정도 되는 술병들을 술이 깨지 않은 상태로 멍하니 분리수거장에 내다버리면서 이 병들을 다 모았다면 벽 하나 정도는 쌓아올렸겠다, 생각했다.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거든. 페트병과 흙으로 만든 집. 내가 마신 수많은 싸구려 위스키, 보드카, 진, 럼, 와인, 리큐어... 쌓아올리면 정말, 그걸로 벽 하나는 거뜬히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이런 술은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어'. 언젠가 집으로 놀러온 현지 친구가 말했다. 그만큼 나는 알코올 램프 속 알코올같은 맛이 나는 쓰레기들을 마셔오고 있었다. 인턴 생활은 월급이 상상도 못할 만큼 적었고, 그 안에서 집세와 생활비, 그리고 술값까지 해결해야 했으니까.


그 당시 나의 친구들은 위험하게 혼자 내버려 두는 것보다는 차라리 같이 있는 것이 낫다는 생각으로 돌아가며 나와 같이 술친구를 해주곤 했는데 그 때마다 그애들은 순수하게 '그렇게 죽고 싶어하는데 죽지 못하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나는 같은 대답을 했다. '시체를 해외에서 한국으로 운송하려면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고, 내가 사는 집의 집주인에게 배상도 해야 하고, 또 장례식도 해야 할텐데 우리 집은 가난해서 그럴 만한 돈이 없거든.' 다 웃었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그 생각으로 버티고 또 버텼다. 주저앉은 내 집을 나 때문에 또 나락으로 가게 할 수 없었다. 더 이상의 돈 문제가 생긴다면 엄마가 더 힘들 것이다. 난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퇴사가 가까워지며 한국으로 돌아갈 날도 가까워졌다. 다친 발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술만 마시다 보니 그만 상처가 심하게 감염되어 응급실까지 다녀오는 바람에 한동안 술을 못 먹게 되었다. 그 즈음 되어서 난 제정신을 며칠 동안 유지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나에게서 아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아빠랑 똑같은 짓 하고 있네. 그렇지만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걸.' 이라는 생각으로 살았다면, 저 순간부터는 '그렇게 상처를 받아 놓고 똑같은 사람이 되어가다니. 정말 진심으로 아빠처럼 살기 싫다' 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상처가 다 낫고 퇴사일이 다가오면서 엄청난 노력으로 술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취한 내 모습을 보는 것이 이제는 죽기보다 싫고 또 내 자신에게 너무나 부끄러워서, 그리고 망가진 몸이 더이상 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깨달아서, 집에 있는 술들을 다 싱크대로 흘려보내고 절대 술을 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미리 잡아 둔 여행 일정들을 소화하며 술이 들어갈 틈을 주지 않기도 했다. 그렇게 어쩌면 성공적으로, 술독에 빠져 살던 6개월 간의 암울한 날들은 막을 내렸다.



3.

그 때의 기억은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끔찍하다. 분명 그 속에 좋은 순간들도 많았지만, 내 손으로 망쳐버린 날들이 나에게 안겨준 고통은 정말 상상도 못할 만큼 어둡고 아팠기 때문이다. 그 도시에서 일 년을 살았다고 말하면 모두 '그래? 좋았겠네, 부럽다~' 라고 말하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응, 그랬지.' 하며 쉽게 웃어넘길 수 없다.  절대로 아빠처럼 살지 않겠다던 오래된 내 다짐들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던 때. 나도 언제든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살 수 있다는 공포감을 안고도 그처럼 살았던 시기. 그 시간을 겪은 뒤 귀국한 다음, 나는 엄마에게 전화나 문자도 받지 않았던 이유를 털어놓았다. 술은 예전만큼 마실 수 없게 되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분위기에 휩쓸려 술을 주문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고, 이제는 그냥 웬만하면 사이다 같은 음료만 마신다. 술은 나에게 여러 의미로 악몽이었다. 술독에 한 번 빠졌다 나왔으니, 앞으로는 절대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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