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움가트너

폴오스터의 유작

by 감정평가사 정은경
추억의 대한서림


인천 대한서림_현재의 모습

인천 중구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유명한 지역 서점이 있습니다. '대한서림'이라는 곳입니다. 예전에는 건물 전 층이 서점이었지만 지금은 치과가 메인인 것처럼 보이네요. 인천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던 저는 집-학교를 드나든 만큼이나 대한서림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학교 마치고서도, 땡땡이치는 날에도 주말에도 시간이 나면 들렀던 곳이 '대한서림'이었습니다.


'대한서림'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었던 가장 큰 이유는 각종 신간을 마음 것 읽고도 꼽주는 직원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대한서림에서 문제집 외에는 즐겨있던 소설책을 구입했던 기억이 없어요. 그야말로 무상책식을 하였던 셈이지요.


공짜라면 사족을 못쓰는 건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그때의 만행을 만회하고자 하는 마음에서인지 책을 사지 못한 한을 풀고자 하는 것인지 지금 저의 집에는 읽지도 못하면서 구매한 책이 책장의 절반 정도 차지 하고 있습니다. 헤아려보니 소설류 등 문학책만 천 권정도 넘네요. 200권 정도는 정리하고도 저 정도니 저 녀석들을 가지고 공유 서재 사업이라도 해야 하는 건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 중이긴 합니다.


중고등 학창 시절 내내 베스트셀러와 세계 유명 수상작의 모든 책을 대한서림에서 섭렵했습니다. 신간이 나오자마자 일주일 내에 완독, 2층 소설 베스트셀러 칸의 1등부터 10등까지 시전 하는 일을 마치고 나면 구석 책장에 사람들이 잘 찾지 않은 문학류까지 뒤져서 읽곤 했는데요. 그때는 책 읽는 일이 왜 이렇게 재미났는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서점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불편한 자세로 몇 시간씩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수년간 반복된 과도한 책에 관한 취미는 대학 진학을 한 이후로 자연스럽게 사그라 들었지만요. 책에 미쳐 지냈던 다른 사람은 잘 알지 못하는 혼자만의 유난스러운 학창 시절이었지만, 영원할 것만 같던 책에 대한 열정은 성인이 되고서는 오랜 친구 같은 친근함과 같은 감정으로 바뀌어졌습니다.


훌륭한 위인들은 다독가 애독가인 경우가 많던데요. 대한서림 건물주이자 사장님의 공짜 책을 시전 하는 아이도 나무라지 않는 너그러운 경영철학 덕분에 저는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지만 그 덕분에 성공의 목표에 얼마만큼 달성했을 까요? 한 가지 확실한 건 코드가 잘 맞는 책을 만나면 엄청난 속독이 가능하다는 능력치가 생기긴 했습니다. (성공에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는 학습서는 저와는 코드가 맞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만. ㅋㅋ)

중학생 자녀 둘을 키우고 있지만 '공부 좀 해라' 하는 잔소리는 즐겨하지만 '책 좀 읽어라'라는 말은 입도 벙긋하지 않습니다. 책은 여전히 좋아하는 것은 맞지만 책이라고 좋은 영향만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측면에서는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주변인과의 자연스러운 관계에도 방해가 되기도 했으니까요. '쾌락독서가의 정감사의 책수다'에 대한 연재를 시작하다 보니 책에 관한 개인적인 잡수다를 하게 되네요.


저의 글은 책으로 부의 축적이나 신분의 상승 등 성공하고 싶은 사람은 도움이 될 부분이 없을 수도 있으니 연재의 글을 읽고 계시다면 이 점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운명처럼 만난 폴오스터

수능 시험 후 고3 끝무렵 대한서림 2층 구석 책장에서 운명처럼 만난 폴오스터의 '달의 궁전'은 시전 하며 읽었던 베스트셀러와는 다른 결의 책이었습니다. 사실 학창 시절에는 서양 고전 문학류이나 고전 인문서를 좋아했지만 살아 있는 작가 중 맘에 쏙 들어오는 작가가 없다는 갈망이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한 갈망이 충만했던 시절 아무런 정보 없이 폴오스터의 책 속 문장을 몇 줄 읽는 것만으로도 강한 끌림을 느꼈고, 직감했습니다. 오랜 갈망을 해소해 줄 작가라는 사실을요.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의 중간쯤에서 머무르는 듯한 문장 투, 쓰는 일을 업으로 하는 자이지만 나처럼 다독가인 작가

죽은 자들의 문장들과 어울려 지내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다독가인 나. '나와 같다는 착각'은 강한 매력으로 다가왔습니다.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무라카미 하루키'에게도 동일한 이유로 푹 빠져 지내게 되었지요. 다작가이기도 한 두 작가의 책은 거의 빠짐없이 읽었는데요. 오랜 기간 나의 영혼의 일부였던 작가 중의 한 명인 '폴 오스터'는 작년 봄에 77세의 나이로 작고했습니다. 나의 영혼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느낌을 받았어야 마땅했지만 이상하게도 그에 관해서는 어떤 날보다도 무감한 마음으로 작년을 보냅니다.


유작인 폴 오스터의 '바움가트너'를 읽고서야 이상하리만큼 평온한 마음이었던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저의 무의식은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의 글을 통해서 살고 죽는 것 이상의 영혼의 유대를 지속하는 이상 그와 저의 연결은 소멸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죠. 노인 '바움가트너'의 삶에 관한 소설인 '바움가트너'에서 폴오스터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육체의 소멸인 죽음에 대해 살아있는 자의 기억과 함께 영혼은 소멸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희망과 열정에 관한 당부를 잊지 않습니다.

이제야 훌쩍 눈물이 나네요.



저는 애도하는 중입니다


폴 오스터에게 처음 푹 빠지는 계기가 되었던 '달의 궁전'에서 사생아인 주인공은 생존한 유일한 가족인 외삼촌의 죽음으로 절망하지만, 그의 유품인 수천 권의 책을 읽는 일로 애도하는 마음을 흘러 보냅니다. 그의 글을 읽고 사유하며, 기록하고 남기는 폴오스터의 방식처럼 그를 애도합니다. 폴오스터의 대부분의 작품이 본인의 전부 또는 일부를 투영한 작품이었기에 살아생전에 꼭 한 번은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은 희망은 있었습니다. (그러기엔 폴오스터는 넘나들수 없는 미국의 대작가이고, 애석하게도 가벼운 대화도 버거울 정도로 저의 영어 실력은 최악입니다. 넘어야 할 장벽이 너무나 많았지요.)


그리고 바움가트너에 관한 이야기


바움가트너는 10년 전 아내 애나를 불의의 사고로 잃습니다. 아이는 없었지만 무척이나 사이가 좋았던 바움가트너와 애나였기에 바움가트너는 애나를 잃고 사지가 뜯겨나가는 고통을 느낍니다. 죽은 애나를 향한 오랜 애도의 시간, 바움가트너는 미출간 된 애나의 많은 글(산문, 일기, 시 등)을 한편씩 한편씩 출간하는 일로 애나의 영혼과 연결되어 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심지어 애나의 첫사랑(베트남 전으로 단명했다네요)에 대한 절절한 글을 읽고 질투심마저 느낍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은 무척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바움가트너는 사랑하는 아내 애나를 잃은 고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P68

그는 죽은 자식을 애도하는 자식, 죽은 남편을 애도하는 여자, 죽은 아내를 애도하는 남자를 떠올리며, 이들의 고통이 신체 절단의 후유증과 얼마나 닮았는지 생각해 본다. 사라진 다리나 팔은 한 때 살아 있는 몸에 붙어 있었고, 사라진 사람은 한때 다른 살아 있는 사람에게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계속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절단된 일부, 자신의 환상에 속하는 부분이 여전히 깊고 지독한 통증의 원천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치료가 가끔 이 증상을 완화해 줄 수는 있지만 궁극적 치료법은 없다.


죽은 애나를 향한 깊은 슬픔과 고통이 멈춰지지 않는 어느 날 바움가트너는 죽은 애나와 전화를 하는 꿈을 꿉니다. 죽은 애나가 안쓰러운 남편에게 남기는 메시지처럼요. 이제 그만 슬퍼해도 된다. 나의 영혼은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라고 말이지요. 저는 애나가 바움가트너에게 말하는 다음의 문장이 지병을 앓고 있던 폴오스터가 독자들에게 남기는 유언과 같이 느껴졌습니다.


P76

바움가트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말을 하고 싶지만, 수백 가지를 말하고 수백 가지를 묻고 싶지만 입을 열어 말할 힘이 사라진 듯하다. 상관없다. 그는 혼잣말을 한다. 굳이 왜 말을 할까? 이 전화는 당장이라도 툭 끊어질 수 있고, 그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그녀의 목소리에 계속 귀를 기울이는 것뿐인데, 시간이 다 되어 애나가 다시 어둠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녀는 어떤 것도 확신하지 못한다. 그녀는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그녀가 이런 이해할 수 없는 내세의 삶, 의식적 비존재라는 이 역설적 상태를 계속 유지하게 해주는 존재는 그리고 생각한다. 이런 상태는 언젠 가는 끝날 것이다. 그녀의 느낌으로는. 하지만 그가 살아있고 그녀에 관해 계속 생각할 수 있는 한 그녀의 의식은 그의 생각에 의해 깨어나고 또 깨어날 것이며, 심지어 가끔 그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그의 생각들을 듣고 그의 눈을 통해 그가 보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도 전혀 모르고, 어떻게 지금 그와 이야기할 수 있는지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녀가 확실하게 아는 것 한 가지는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는 연결되어 있으며,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이룩했던 깊은 연결은 죽어서도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먼저 죽으면 산 자가 죽은 자를 삶과 삶이 아닌 것 사이의 일시적 림보 같은 곳으로 계속 들어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 자마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죽은 자의 의식은 영원히 소멸한다. 애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들이쉬었다가 다시 내쉬더니 그가 전화기를 든 이후 처음으로 질문을 한다. 지금 내가 한 말을 알아듣겠어? 바움가트너가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애나의 숨이 멈추고, 말이 멈추고, 전화선이 죽어 버린다.


바움가트너는 오랜 시간이 지나 죽은 애나를 향한 애도의 시간은 슬픔과 고통의 감정을 지나 '고독'의 감정만이 남게 됩니다. 노인 바움가트너는 새로운 애인 주디스를 통해 고독의 시간을 깨워줄 새로운 사랑이라고 믿습니다.


p123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삶이 없는 것과 같죠. 운이 좋아 다른 사람과 깊이 연결되면, 그 다른 사람이 자신만큼 중요해질 정도로 가까워지면, 삶은 단지 가능해질 뿐 아니라 좋은 것이 돼요.


내세와 환생이 실존하는지의 여부를 떠나 우리가 기억하는 생은 오직 한번뿐입니다. 한번 살아가는 인생을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성취하고 싶어 부지런히 살아가지만, 그 끝에 남은 기억은 무엇일까요? 노인 바움가트너의 회고의 독백을 따라 읽다 보면 삶의 덧없음이 느껴지기도, 삶의 가치를 두어야 할 것은 엉뚱한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p140

바움가트너는 생각을 중단하고 자신이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자문한다. 뭐 하러 죽은 말에게 돌아가서 때려 대고 있는가, 손 갈퀴와 장난감 삽을 들고 숲 속을 기어 다니며 아주 오래전 과거의 작은 보물을 파내야 할 때에, 예를 들어 열두 살 때 처음으로 위스키를 한 모금 몰래 마셨을 때 코가 따끔거리고 목이 타던 느낌, 사춘기 때 처음 아래가 딱딱해지는 것을 경험할 때 몸전체로 퍼지던 그 신비한 온기, 열다섯 살에 처음으로 [마테 수난국]을 들었을 때 눈물이 차오르며 몸이 가루가 되는 듯하던 느낌. 또는, 조금 방향을 틀어서 가보자면, 꼬마였을 때 허리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걸어가던 순간, 또는 조금 컷을 때 나무를 타던 순간, 또는 그보다 더 컷을 때 검은 오토바이 재킷을 입고 유대인을 박해하던 멍청이에게 마구 주먹을 날리던 순간을 되새긴다든가. 또는, 어쩌면 더 적절한 것으로, 왜 다른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순간들은 영원히 사라진 반면 우연히 마주친 덧없는 순간들은 기억 속에 끈질기게 남아 있는지 살펴본다든가.


폴오스터의 소설은 모두 자서전적 색채가 진합니다.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어떤 부분이 자신의 이야기고 지어낸 이야기인지 궁금해질 때가 있죠. 때문에 다작품을 낸 작가지만 작품들의 모든 요소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인상을 주죠. 자신의 전체를 작품으로 기록한 폴 오스터, 산문과 에세이, 일기 등의 실제 이야기를 토대로 한 글도 다 진짜로만 구성되어 있을까요? 기억이란 의도하지 않게 각색되거나 희석되기도 하니까요.


폴 오스터는 기록에 관한 재밌는 이야기를 하네요? 같이 읽어 보시죠.


p184

어떤 사건이 진실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실제로 진실 어어야 할까, 아니면 설사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해도, 어떤 사건의 진실성에 대한 믿음이 그것을 진실로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전설이나 허풍이나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전해지는 근거 없는 소문에 불과한 것인지 자신할 수 없다면? 더 중요한 점으로, 그 이야기가 너무 놀랍고 너무 강력해서 입을 떡 벌어지게 하고,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바꾸고 고양하고 심화한다고 느낀다면, 그 이야기가 진실이냐 아니냐가 문제가 될까?


이제 끝으로 애나의 운명적인 만남을 바움가트너가 회고하는 장면을 소개합니다. 저는 지독한 독서광이고 읽는 자로 자처하는 삶을 살아왔음에도 기록하는 일에는 깊은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우연치 않은 계기에 조금씩 보이는 글을 쓰게 되면서, 사진으로 기억을 기록하는 방식 외에도 글이 주는 기록의 방식은 보다 다채로운 감성을 기록할 수 있다는 장점을 느끼고 있습니다. 기록하고 쓰는 일은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지만 시간과 장소를 초월에서 제 글이 누군가와 닿는 우연한 인연의 연결이 될 수도 있다는 일은 오묘하고 신비로운 일입니다. 아름다운 일입니다. 폴오스터의 글의 상징 같은 우연의 미학. 을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많은 작품을 남기고 열심히 살아주어서 감사했습니다. 나의 영혼의 단짝 폴 오스터!


P220

웃는다는 말을 하자마자 그의 얼굴이 환해지며 다시 웃음, 그가 가을에 나를 보고 지었던 것보다 훨씬 큰 웃음을 지었고, 나 자신도 훨씬 큰 웃음으로 응답하자 어떤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웃음이 아니라, 적어도 웃음 자체가 아니라, 우리 둘 다 그 오래전 스치듯 지나간 짧은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는 이상한 사실, 그리고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는 이상한 사실, 그리고 그 순간의 기억을 우리가 공유했다는 이유로, 사실 아직도 서로 아는 것은 전혀 없는데도 우리 둘 다 우리 사이에 어떤 연결이 생긴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두 배로 이상한 사실, 가을의 작은 웃음, 봄의 두 번째 우연한 만남, 그리고 이제 커다란 웃음-대략 그 정도가 그때까지 우리에게 벌어진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때에는 우리가 서로 이미 어느 정도 알게 된 느낌이었는데, 어쩌면 실제로 알았는지도 모른다. 그때와 지금 사이의 몇 달 동안 가끔 서로에 관해 생각한 게 분명했고, 그러다 이제 운명이 두 번째로 우리를 만나게 했으니, 이 순간을 그냥 흘려보내 다시 일을 망쳐 버리지는 않겠다고 둘 다 똑같이 결심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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