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엄마가 힘들까.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남편이 설거지를 시작한 시점이 결혼 10년 즈음이었다'며 한탄하듯 썼던 글이 생각난다. 하지만 나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혼 10년이 넘도록 나는 친정엄마에게서 심리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전히 사랑받고 싶어서 미움받기 싫어서 엄마에게서 떨어지지 못한 나. 분신과도 같은 자식을 더 잘 살게 하기 위해 딸을 놓지 못하는 엄마. 서로 가시로 찌르고 피를 흘리며 모녀는 그렇게 부둥켜안고 있었다. 그 곁에 나의 남편, 그리고 아이들이 서 있다.
역기능 가족의 딸들은 대부분 결혼해서도 엄마의 영향력 아래 휘둘리며 살게 된다. 육아 도움이나 집값을 핑계로 친정 근처에 신혼집을 꾸리게 만들거나 본인이 수시로 신혼집에 드나들며 딸의 살림이나 육아에 간섭한다. (중략) 딸 스스로 문제를 인지하고 엄마와의 거리를 두지 않는 한, 사위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원가정에서 엄마를 중심으로 아빠와 딸이 빙빙 맴돌았다면 이제는 딸이 새로 꾸린 가정에서 친정 엄마를 중심으로 딸, 사위, 손자가 빙빙 맴도는 셈이다. p227
- 썸머 <나는 왜 엄마가 힘들까> 중
엄마와 나와의 관계가 남편과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완벽한 엄마를 모함할 수 없어서, 빛나는 우리 집에 흠집을 낼 수 없어서. 연기해야 했고, 숨죽여 울어야 했다. 초등학교 일기를 읽은 후 내 복잡한 심정을 누구에게든 털어놓아야 했다. 나를 알고 나의 엄마를 아는 이.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들어주되 편중되지 않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상황을 읽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남편에게 일기를 보여주고 나의 아픔을 드러내 보였다. 그는 놀란 눈으로 일기를 읽어 내려갔고, 담담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며, 적당한 거리에서 나와 우리 가족을 바라봐주었다.
남편에게 털어놓고 함께 방법을 찾자. 많은 딸이 남편에게 엄마의 실체를 감추려 애쓴다. 시댁과 남편에게 흠 잡히고 싶지 않아서다. 엄마 또한 딸의 인생에 끊임없이 간섭하고 싶어서 일반적인 엄마처럼 연기한다. 과잉성취형일수록 남편과 시댁 식구 앞에서 자신의 치부와 약점을 드러내기는 어렵다. 하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전전긍긍해하느니 애초에 오픈하는 것이 낫다. 아무리 감추려 애써도 언젠가는 드러나게 되어있다. p229
- 썸머 <나는 왜 엄마가 힘들까> 중
소외, 비난은 이제 그만.
나의 아버지는 젊은 날 가족에게서 소외되었었다. 그는 온 가족을 힘들게 하는 원흉의 아이콘이었다. 거의 매일 홀로 식사하셨으며 본인이 원해서 혹은 은근슬쩍 가족여행에서 배제되었다. 가장의 40~50대가 그렇게 지나갔다. 하지만 자식이 장성한 후에는 완벽한 가족의 모습이었다. 자식들은 번듯한 직장에서 밥벌이를 하였고 어머니는 일생 최대의 풍족한 생활을 즐겼으며 아버지의 폭력성은 줄어들었다. 함께 여행과 미술관 나들이를 다니고, 큰일이 생겼을 때 너 나할 것 없이 발 벗고 나서 문제를 해결하는 멋진 가족이었다.
하지만 나는 결혼 후 '젊은 날 우리 가족이 아빠를 대했던 방식'으로 남편을 대하고 있었다. 남편에게 화가 나는 일이 생기면 남편 밥을 차려주지 않거나 내가 밥을 굶었다. 싸움이 날 것 같으면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밖으로 돌았다. 10년간 집안일로 손 하나 까딱 안 했던 남편을 탓하며 칭찬보다 비난의 말을 내뱉었다. 문제에 대면해 직접 맞서지 못하고 늘 회피해 왔다.
"야! 이제 너희 이불은 너희가 걔."
얼마 전 남편이 아이들에게 말했다.
"자기는 마흔 넘어서까지 이불 한 번 안 개 봤으면서?"
옆에 있던 내가 내뱉었다.
"맞아요. 아빠가 개요."
아이들이 얼씨구나 말한다.
"이리 와! 와서 이불 개라고."
남편이 다시 명령한다.
"너무 커요. 못 개겠어요."
아이들이 핑계를 대며 빠져나간다.
"크긴 뭐가 커!"
남편이 투덜거리며 이불을 갠다.
진짜 독립을 하려 합니다.
나는 "야!"라고 부르는 걸 싫어한다. 내게도 "야!", 첫째동생에게도 "야!", 막내동생에게도 "야!". 아버지는 우리 삼 남매를 그렇게 부르셨다. 남편이 아이들에게 "야"라 하면 마음속 뾰족한 송곳이 바로 올라온다. 그런 내가 기대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이렇다.
"얘들아, 앞으로 이불은 각자 개기로 할까?"
다정한 말투로 남편이 아이들에게 권한다.
"이불이 너무 커서 힘들어요."
사실 귀찮은 아이들이 핑계를 댄다.
"어떻게 하면 큰 이불을 쉽게 갤 수 있을까?"
아이들을 움직일 수 있게 상황을 만들어간다.
"이렇게요?"
아이들이 움직인다.
"잘하는데?"
아이들을 칭찬한다.
"내일부터는 제가 혼자 해볼게요."
아이들이 변화한다.
우리 집에는 침대가 없다. 신혼시절 퀸사이즈 침대가 하나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커가며 자리만 차지하는 침대를 처리했고 몇 년째 이부자리를 깔고 잔다. 일찍 출근하는 남편은 몸만 쏙 빠져나가 이불을 갠 적이 없었다. "자기야, 이불 좀 개 주라." 주말이라 집에 있던 남편에게 아이들 이불 정리를 부탁했었다. 하지만 남편은 "내가 잔 것도 아닌데 개야 해?"라 했다. 그런 남편이 아이들에게 이불을 개라 하자 난 드디어 기다렸던 기회를 포착한다. "자기는 마흔 넘어서까지 이불 한 번 안 개 봤으면서?"라는 방식으로 아이들 앞에서 복수를 했고, 남편은 권위를 잃었다.
미운 남편을 배척하고 아이들과 한 편이 되어 공격하는 것. 이것은 내게 익숙한 패턴이었다.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했다. 설거지 한번 안 하고, 아이들 젖병 한번 안 씻고, 이불 한번 안 개 본 대가라고. 늘 남편 탓했던 내가 부끄럽기 그지없다. 삐딱하고 예민한 나와 10년 넘게 함께 해 준 남편에게 고맙고 미안하다. 이제야 우리가 진짜 하나가 된 듯 하다. 삐뚤어진 나를 바로 세우니 용기마저 샘솟는다. 나는 결혼 14년 만에 원가족으로부터 진짜 독립을 하려 한다. 나의 독립, 만세! 독립 만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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